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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67화 (466/963)

467화. 무림맹에서 (1)

화아아악!

적연에게서 끔찍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정말이지 불문의 무공을 연성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살기의 지독함이 거의 마공을 연성한 마인을 연상케 했다.

연심은 깜짝 놀랐다.

“문주님!”

놀란 것은 정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살기였다. 불도(佛道)에서 벗어난 걸 넘어 인도(人道)에서조차 벗어난, 가히 인외마도(人外魔道)의 살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연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내게 하는 말이냐?!”

연호정은 적연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양천에게 말했다.

“위대한 투왕의 보금자리에서 참 별일이 다 터지는구려.”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자네와 얽히지 않았으면 참으로 평온한 자리였을 걸세.”

“허가는?”

“일 다 저질러 놓고 이제 와 허가를 구하시는가?”

“그래도 집주인이니까.”

“뻔뻔한 인간 같으니라고.”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에게 말해 두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호정의 손이 등허리를 훑었다.

스르륵.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 흑룡부가 잡혔다. 도끼의 자루부터 날까지, 온통 흑색 일색인데도 묘한 광택이 나는 신물(神物)이었다.

적연의 살기가 폭발했다.

“이놈!”

번쩍!

적연이 땅을 박차기도 전에, 한 줄기 새하얀 월광(月光)이 대전을 가로질렀다.

툭!

“……!”

적연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가 천천히 자신의 요대를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검은 검집째로 잘려 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언제?!’

출수(出手)의 순간도 보지 못했다. 가히 빛살과도 같은 속도였다.

“어딜 봐?”

깜짝 놀란 적연이 등 뒤를 향해 장법을 펼쳤다.

화아악!

경악스러운 순간이었다. 적연이 구사한 관음신장(觀音神掌)의 경력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올올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이내 연호정의 왼손이 적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우두둑!

“크악!”

적연이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부러진 손목으로 침투해 오는 무식한 공력에 오금이 저렸던 것이다.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같잖은 무공으로 본인과 남을 해치지 말고, 다시 수행자의 신분으로 돌아가게나.”

그의 발이 허공을 갈랐다.

퍼어억!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적연이 피를 뿜으며 대전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연호정의 발끝은 정확하게 적연의 단전을 깨부쉈다. 기해혈(氣海穴)이 파괴되고, 단전이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평생 쌓은 공력이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부르르 떨던 적연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만일 연호정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오장육부가 모조리 박살 나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양천은 나직이 감탄을 터트렸다.

‘확실히 달라졌어.’

자신과 손속을 겨루었던 그때와 또 달랐다.

경지를 논하자면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요(要)는 무공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연호정의 무공은 두 개의 단어로 귀결된다.

살해(殺害), 그리고 파괴(破壞).

그래서 흉포했고, 효과적이었으며,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극에 이른 실전 감각으로 상대를 완전히 무너트리는 초폭력(超暴力)인 것이다.

한데 지금은?

‘분해(分解)로군.’

굳이 과격한 무공으로 피를 보지 않아도, 상대의 무공을 선점하여 완벽하게 분해해 무력화시킨다.

허를 찌르는 능력은 여전하지만, 예전에는 상대와 손속을 나누며 철저하게 망가트렸다면, 이제는 상대가 무공을 구사하기도 전에 무너트린다.

그 무너트림의 과정조차도 달랐다. 꺾고, 파괴하고, 터트려 버리는 방식에서 아예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야말로 인상적인 한 수였다. 화려하고 강력한 무공보다 훨씬 더 대단한 무공이었다.

하물며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적연의 무공은 능히 일파의 문주급이지 않은가.

‘저 녀석, 이제 정말 끝에 도달했군.’

무신의 경지.

무극지경이라 불리는 그 전설의 바다 앞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대해(大海)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연심을 바라보았다.

연심의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스승의 복수를 하고 싶나?”

이미 연심은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연호정의 도끼가 스승의 검을 두 동강 낸 순간, 연심은 이 싸움을 말리고자 검을 뽑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길 수 없다.’

단순히 이기기 힘든 상대여서 막지 못한 게 아니었다.

‘……이런 무공이?’

지금의 그녀로서는 구사할 수 없는 무공, 불가능한 술수.

아니, 어쩌면 앞으로 끝없이 노력해도 저와 같은 방식을 몸에 붙일 수 있을까 싶은 수준의 무공을 목도했다.

그 무력감이 연심의 몸을 옭아맸다.

사람들은 그 무력감을, 다른 말로 패배감이라 하였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부주와 나눈 대화,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나?”

“……?”

“당신이 아는 보타암이 예전과 달라진 것은 모두 저기 계신 부주의 작품이라네.”

깜짝 놀란 연심이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은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거리낄 것 하나 없다는 듯, 죄책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엿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연심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주께서 그랬다고요?”

“그렇다.”

“왜…… 왜?!”

양천은 상큼하게까지 느껴지는 말투로 답했다.

“보타의 힘을 손에 넣고 싶었으니까.”

간단한 말이지만, 그 말에서 무시무시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단순하고도 개인적인 욕망이었다. 그 욕망의 깊이에, 연심은 분노 이전에 공포를 느꼈다.

세상은, 강호는 누군가의 표적이 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망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도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럼, 우린 본문을 그리 만든 원수를 찾아와 도와 달라 간청한 것이로군요?”

“원수?”

양천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자네가 진정 부처의 도를 따랐다면 나를 원수로 보지 않았겠지. 자네가 나를 원수라 생각하는 것은, 자네 역시 보타의 억압이 싫었기 때문이 아닌가?”

궤변이다.

불도를 좇는 평안한 사찰. 자신만의 정의로 세상을 보는 보타에 분란의 씨앗을 던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쁜 일이다. 연심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연심의 생각은, 실로 옳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녀에게 있었다.

“인정해 버리게. 자네는 불법과 어울리지 않아. 세상에 나가 명성을 떨치고 싶어 하고, 자신이 지닌 재능을 개화시키길 원하지.”

연심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 양천의 일갈에 흔들리던 자신을 알기에 감히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양천이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보타의 붕괴는 고작 이간질 정도에도 버티지 못할 만큼 느슨해진 자네들의 가벼운 수행에서 기인했네. 물론, 그걸 알았기에 한 발 뒤에서 분란을 조정한 것이지만.”

이 또한 궤변이다. 애초에 양천이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보타는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면 강도에게 죄를 물어야지, 돈 많은 부자를 욕해서는 안 된단 말이다.

하지만.

‘…….’

연심은 이번에도 쉬이 입을 뗄 수 없었다.

양천은 이간질이라 하였다. 만일 소림이라면, 그러한 이간질 정도에 무너졌겠는가?

이것은 무공이나 가치의 문제 이전에 수행의 문제였다. 강도를 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보타의 검수로서 수행의 가벼움 역시 반성해야 할 일이었다.

양천이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 나는 자네를 손에 넣고 싶네. 자네의 재능은 실로 대단한 것이야. 저 벽산호장께서는 자네가 언제 부러질지 모를 검이라고 했지만, 내가 봤을 때는 지금도 이미 훌륭하다네.”

진심이었다. 연심의 무공은 정안 이상이었다. 당장 연호정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보타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네. 적어도 당장은 말이지. 말하자면…….”

양천이 턱을 세웠다.

“자네를 묶고, 억누르고, 제재했던 것들은 모두 파탄이 나 버린 셈이야. 즉, 자네가 진정 원하는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나올 수 있는 기회라는 걸세.”

“……!”

“이러한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지. 마음에도 없는 불법 따위는 내던져 버리고 내게 오게. 보타의 말랑말랑한 가르침 아래 성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빠르고 분명한 발전을 약속하네.”

차갑고 오만했던 양천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불법을 수호하는 검후, 제 실력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는 반쪽짜리가 아닌 진정한 검후가 되어 보게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유혹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투왕 양천이기에 더더욱 설득력이 강했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욕심이 많군.’

양천을 욕할 생각은 없다. 자신이나 그나, 결국 거기서 거기니까.

다만, 자신이 무너트린 문파의 후예에게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뻔뻔함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연심을 보던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정하기는 쉽지 않겠지.”

“…….”

“뭐가 되었든, 저기 쓰러진 반쪽짜리 수행자는 연화문의 수장이자 자네의 스승이지. 내가 볼 때 스승의 자격이라곤 요만큼도 없지만, 인정(人情) 앞에선 사람의 가치를 논할 필요가 없겠지.”

양천이 태사의에 몸을 묻었다.

“스승과 함께 의방으로 가게. 스승을 간호하며 생각해 보게나. 그 정도 시간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떨리는 눈으로 양천을 보던 연심은 결국 어깨를 늘어트렸다. 지금의 그녀는 아무것도,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적연과 연심이 묵룡의 무사들과 함께 대전을 나갔다.

“어땠나?”

양천이 연호정을 보며 웃었다.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는 내 욕심, 잘 보았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체할 거요.”

“대식가라서 말일세.”

연호정이 정안을 보았다.

정안 역시 혼란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다만 맑고 깊은 두 눈은 여전히 올바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상황이 좀 묘하게 돌아갔구나.”

“……그렇군요.”

“뭐가 되었든, 보타를 재건하는 데에 충분한 도움을 줄 것이다.”

원한, 복수.

그런 것들은 지금으로선 잊어야 했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던 정안이 양천을 향해 포권했다.

“오늘은 이렇게 물러갑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양천이 눈을 빛냈다.

“오늘은? 하면, 다음에 또 올 생각인가?”

“그때는 힘 있는 정의가 되어 찾아올 것입니다.”

묘한 눈으로 정안을 내려다보던 양천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새삼 자네 주변엔 인재가 많군.”

연호정이 강량에게 눈짓했다.

강량이 정안에게 말했다.

“우린 잠시 빠집시다.”

그렇게, 강량과 정안도 대전을 떠났다.

“후우.”

단둘이 남자, 양천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아쉬움이 가득 실린 한숨이었다.

“그래도 자네가 온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는군.”

연호정이 말했다.

“당장 오는 건 아닙니다. 저쪽 허가도 받아야 하고.”

“그 정도는 자네 선에서 관철시킬 수 있잖나?”

“그렇다고 하지요.”

“그래, 언제쯤 올 수 있나?”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무림맹에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부터 처리하고 오도록 하지요.”

“어지간한 건 남한테 좀 맡기게. 그러니까 그렇게 바쁘지.”

“이번 일은 반드시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라서 말이오.”

“무슨 일인데 그러시는가?”

“세작이 있소.”

“……?!”

“무림맹 봉공 중에 삼교의 세작이 있소.”

양천의 눈이 차가워졌다.

“……자네가 있어야겠군.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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