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66화 (465/963)

466화. 어둠을 얻다 (6)

도끼냐? 아니면 검이냐?

벽산연가의 대공자이자 천하제일 후기지수인 자신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차후 신검(神劍)의 위명을 자랑하게 될 천재의 문파를 택할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선택지였다. 여러 가지 의미로.

“호장님!”

정안이 놀라서 연호정을 불렀다.

연호정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눈으로 양천을 주시할 뿐.

정안이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번에도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안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호장께서 희생하시다니요?! 저는 절대 이런 결과를 바란 게……!”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해라.”

“호장님!”

“너의 생각은 옳다. 너의 마음은 바르다. 적어도, 욕망에 눈이 멀어 말 몇 마디에 휘둘리고 있는 저 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

연호정의 목소리는 낭랑하기만 했다. 이곳에 있는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맑고 또렷했다.

적연과 연심의 얼굴이 붉어졌다. 특히 연심의 얼굴은 불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연호정의 말에 소름이 돋을 만큼의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이야. 넌 바른 의지를 지녔지만, 그 의지를 관철할 만한 힘이 없어. 당장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없었다면, 부주는 널 만나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죽었을 수도 있지.”

“……!”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용기 없는 칼질은 붓질보다 약하고, 칼의 광기를 모르는 자의 용기는 겁쟁이의 신념만도 못한 법이지.”

뼈가 시릴 만큼 단호한 말투였다. 그리고 그 말은 정안을 부끄럽게 하였다.

스스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분명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또한 경험이 부족한 자의 가벼운 발언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왔지만, 연호정이 있었기에 든든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날 여기까지 오도록 이끈 것. 너의 마음이 바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딱 거기까지다, 너의 역할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지금은 그 정도로 만족해라. 혼란 가득한 내게 올바른 길을 보여 준 자는 그리 많지 않아. 이 상황에서, 넌 충분히 네 역할을 했다.”

오만하다면 오만한 말이었다. 동시에 그녀를 인정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바른길을 보여 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세상이 바르지 않다는 말이니까.

그런 세상에서 정안처럼 올바른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정안이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본문의 일 때문에 호장께서 희생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오해하지 마라. 희생이 아니니까.”

“네?!”

“안타깝게도 난 너만큼 정의롭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 내 목숨과 미래를 가져다 바칠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양천에게 보내는 미소였다.

“그렇지 않소?”

양천은 웃을 수 없었다.

“자네, 정말 이렇게 나올 건가?”

“설마하니 내가 순순히 묵룡으로 올 줄 알았소?”

“고백하자면, 그럴 줄 알았네.”

“정말 솔직해지셨소이다.”

“거짓말로 자넬 속여 봤자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욕심 많은 내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군. 보타를 포기하라? 자네도 알 텐데.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노력이란 보타의 정신을 무너트린 것을 말하는 것이고, 화는 사음교주를 향한 것이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오. 선택이란 소유가 아닌 다른 하나의 포기를 의미하지.”

“말했듯, 난 욕심이 많네. 두 마리 토끼를 다 얻은 경우도 심심찮게 있어.”

“안타깝구려. 난 토끼가 아니라서 말이오.”

“다시 생각하게. 이건 자네에게도 좋은 일이야. 게다가, 이미 이쪽 지파 하나는 놈들에게 가 버렸어. 돌이킬 수 없다는 얘길세.”

보타암은 망가졌다. 적어도 당대의 보타암은, 예전과 같은 정기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일을 진행하는 게 낫다.

과거의 연호정이었다면,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하고 넘어갔을 일이었다.

“난 마음을 정했소. 그리고 전에 말했듯,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오. 도적 하나 잡자고 집 한 채를 무너트렸다간 부주의 칼도 몇 자루 부러질 거요.”

불문의 개입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소림의 분노는 연호정도 막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부러질 칼도 지킬 겸, 무너지기 직전인 집도 적당히 보수해 줍시다. 당장은 아쉬울지 몰라도, 멀리 보면 그게 더 나을 거요.”

“삼 년 동안 쏟아부은 노력을 털어 내라는 말인가?”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소? 편한 인생은 재미없다고. 예측불허의 인생이야말로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

“가끔은 편하게 갈 줄도 알아야지.”

“아쉽게도 그 편해 보이는 길에 온갖 야수들이 들끓고 있소이다. 웃으면서 내달리다 맹수 밥이 될 수도 있소.”

“…….”

서늘한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던 양천이 이내 탄식을 토해 냈다.

“자네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어쩔 때는 마인(魔人)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독하고 악랄해 뵈는데, 또 어쩔 때는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 정파의 노강호 같기도 하네.”

“이런저런 얘기는 다 치우고, 이거 하나만 분명하게 합시다.”

연호정이 연심을 가리켰다.

“저 칼은, 제대로 휘두르려면 못해도 십 년은 더 걸릴 거요. 하지만 난 지금 당장이라도 쥐고 휘두를 만한 놈이 아니오?”

“……!”

“십 년을 더 투자해도 아차 하면 부러질 수 있소. 그럼 나는 어떻소? 부주께서 보시기에, 나 역시 그리 허무하게 부러질 칼로 보이시오?”

절대 부러지지 않을 칼이지.

양천은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할 뻔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결정적으로, 부주께서 하나 간과한 게 있소.”

“그게 무엇인가?”

“보검이 신검이 되기도 전에 놈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말짱 꽝이라는 거요.”

순간 양천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 사음교, 아니 삼교는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간 그들이 보여 준 은밀함과 전술을 생각하면, 선공을 날린다 해도 최소 수년 후가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역시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것. 지금이 평화롭다고 방심하다간 적들의 제물이 될 수도 있소.”

“그것은…….”

“현명한 왕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소. 그러나 언제나 전쟁을 대비하고 있지.”

그 말이 결정타였다.

삼교는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말하자면 정복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연호정은 그런 그들을 현명하지 않다고 보았다.

동시에 양천에게 말하고 있었다.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정복자에 맞서 선제공격을 하는 건 좋지만, 기약 없는 전면전에 적을 우습게 보지 말고 힘을 더 공고히 하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보타암의 신검은, 제련만 제대로 한다면 놀라운 힘을 발휘할 것이오. 그러나 적이 그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검을 제련하는 데 힘을 쏟다가 중원의 전력만 분산될 수 있소.”

“…….”

“부디 상황을 바르게 보시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자네의 말은 언제나 일리가 있어. 그래서 무시할 수가 없네.”

“적어도 지금 내 말은 일리보다 이 순간의 진리로 평가받았으면 좋겠소.”

양천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보타를 놔주면 본부로 파견을 오겠다…….”

“그렇소.”

“당분간 내 수족이 되어 싸워 주겠다는 것이겠지?”

“오해하지 마시오. 부주의 충신이 되겠다는 건 아니니까. 우리의 목적은 분명하오. 그 하나를 위해 달려 나갈 뿐이오.”

“그건 알고 있네. 다만…….”

“다만, 나 역시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부주께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떨어야 할 거요. 그 순간만큼은 묵룡인(墨龍人)으로서 시국을 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부주께서 원하는 것, 그것이 적의 파멸이 분명하다면 말이오.”

“허어.”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선택은 소유가 아닌 포기라…….”

곰곰이 생각하던 양천이 고개를 돌려 적연과 연심을 보았다.

연심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몹시 부끄러워하는 듯했고,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반면 적연의 얼굴은 달랐다. 연심처럼 붉었지만, 그 붉음은 터지기 직전의 화산과 같았다.

그녀는 양천과 연호정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저들은 보타를 무시하고 있다.

고작 후기지수 하나가 보타를 대신할 정도라고? 그 둘을 나란히 놓은 것 자체가 보타에 대한 도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거래인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양천이 그것을 고민했고, 나아가 연화문이 아닌 저 천둥벌거숭이와 손을 잡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연호정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정안과 손을 잡는다는 것. 정안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천안문에 힘을 실어 주겠다는 것.

적연에게는 지금 상황이 그렇게 읽혔다. 편협해진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나 비정상적이었던 것이다.

양천이 말했다.

“연화문주.”

“…….”

적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쌍욕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거 아쉽게 되었군. 내 입장에서야 자네들도 돕고 이 친구도 얻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구먼.”

“…….”

“오래 기다렸는데 미안하게 되었어. 사과의 의미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적연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양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짓?”

“아닙니까?”

그나마 상대가 양천이라 욕은 날리지 않은 것이다. 성천의 강자만 아니었다면 이미 칼을 뽑아 목을 날리려 했을 것이다.

적연이 버럭 소리쳤다.

“우리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만 리 길을 왔습니다! 끝끝내 만나 주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 모욕을 참고 견뎠습니다! 한데 결과가 이것입니까?!”

“이 친구 말 못 들었나?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지. 언제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게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씩씩거리는 적연. 양천은 그런 그녀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양천을 노려보던 적연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참으로 실망입니다. 훗날 다시 보게 될 때, 우리는 적으로 만나겠군요.”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는 것이지. 지금 자네가 맞이한 현실처럼, 나 역시 자네 정도의 사람이 보여 주는 무례를 얌전히 받아넘길 때가 오리라곤 생각지 못했거든.”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범과 사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일세. 칼질 조금 한다고 본인도 야수라고 생각하진 말게. 자넨 아직 고양이라네.”

“흥!”

적연이 몸을 홱 하고 돌렸다.

“연심! 돌아가자!”

연심은 얼떨떨한 얼굴로 적연의 뒤를 따랐다. 주춤거리는 걸 보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싶었다.

그때였다.

“뭐 하자는 거요?”

연호정의 목소리는 유독 날카로웠다.

그래서일까? 양천은 물론 적연과 연심마저도 그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목소리는 그렇게 힘이 넘쳤다.

양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뭐가 문제인가?”

“말하지 않았소? 부주가 무너트린 집, 다시 지어 주진 못하더라도 보수는 해 줘야 한다고.”

“……음?”

연호정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엄지로 적연을 가리켰다.

“보수 안 할 거요?”

“……!”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 못 하신 듯하군. 하긴, 부주 정도 되는 분께서 손을 쓰기에는 격에 안 맞는 물건이긴 하오.”

연호정이 어깨를 돌렸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의방에 미리 연락이나 해 주시오. 환자 하나 갈 거라고. 얼추 십 년은 썩어야 할 거요.”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