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어둠을 얻다 (5)
“음?”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스스스스.
그가 보는 곳에, 한 명의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저 청년은?’
새하얀 무복을 입은 청년은 머리카락이 제법 짧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굉장히 남자답게 느껴지거나 인상이 강하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인상에 가까웠다.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평화롭게 보였다.
그런 청년의 다리 위에는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검집째로 놓인 검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검이었다.
‘……흐음.’
검을 보는 모용우의 눈빛은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보통 검이 아니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장검이었다. 실제로 평범한 장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연호정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은 검사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무엇.
‘내게는 평범한 검이겠지만, 제 주인의 손에서는 어떠한 보검 못지않은 위력을 자랑하겠지.’
모용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평범한 검에 혼(魂)을 담았다. 그런 건 담고 싶다고 담아지는 것이 아니지. 필사의 고락을 함께하여 자연스레 영기(靈氣)가 담겼구나.’
그때였다.
“누구십니까?”
청년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물었다.
모용우가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의 명상을 방해한 모양이로군.”
스르륵.
눈을 뜬 청년, 연지평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명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명상에 잠겼다면 군장님께서 오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가?”
요대에 검을 찬 연지평이 모용우를 향해 포권했다.
“연지평입니다.”
“아네. 우리 몇 번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가?”
“그랬지요.”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서 묘한 기품이 엿보인다.
모용우의 얼굴에 의외의 빛이 어렸다.
‘연제와는 다르구나.’
느껴지는 기질이 연호정과는 판이하다는 표현을 써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달랐다.
하긴, 그 누가 있어 연호정과 비슷한 기질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연위의 기세와 품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연호정이 별종인 셈이었다.
“혹시 알고 있는가? 대수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연지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형님께서, 사석에서는 형님으로 모신다고 들었습니다.”
모용우가 입맛을 다셨다.
“글쎄, 형님이라고 말은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네. 사실상 내가 졸라서 의형제를 맺은 것이나 다름없지.”
“그러시군요.”
“그러니 자네도 날 편히 대하게나. 연제의 동생이라면 내게도 동생일세.”
연지평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모용우가 손을 저었다.
“모실 필요 없네. 그냥 편하게 대하라는 것뿐이야.”
“알겠습니다.”
담백한 어조였다.
모용우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연지평을 보았다.
‘이런 아이였던가?’
그가 처음으로 연지평을 제대로 인식했던 것은 광동으로 출정했을 때였다.
그전에도 몇 번 보긴 했지만, 그때 연지평은 거의 광인(狂人)에 가까운 인상을 풍겼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말을 몰면서도 끊임없이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질적이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행이었던가.’
알고는 있었다. 연지평이 왜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
다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무인이라면, 검사라면 응당 그러한 시기를 겪기 마련이다. 그러한 고행에서 벗어나는 것은 철저히 자신의 몫이지, 옆에서 도와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한데 이렇게 보니, 그러한 고행이 연지평에게 몹시 큰 깨달음을 준 모양이었다. 무공 이전에, 사람 자체가 이전보다 훨씬 커 보였다.
모용우가 웃으며 말했다.
“연씨 가문은 참으로 대단하네.”
“예?”
“호정처럼, 지평 자네도 도통 그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가.”
“과찬이십니다. 저는 형님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그리 생각하지 말게. 우리는 무림을 살고 있지만, 무공이 전부는 아니야. 보아하니 정검(靜劍)을 깨달은 듯한데, 그 경지는 호정조차도 이르지 못한 경지일세.”
“형님께서는 굳이 정검에 이를 필요가 없으니까요.”
“맞는 말일세. 내 말은, 서로가 다른 것을 추구할 뿐 누가 더 낫고 말고를 따질 건 아니라는 것이지.”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미 그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겸손한 발언이었을 뿐이다.
모용우 역시 연지평의 겸손함을 알았다. 그저 이 거친 세상에서, 지나친 겸손함은 때로는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자네의 그 검, 보통 검이 아니로군.”
연지평의 눈이 빛났다.
“그렇게 보이십니까?”
“혼이 실려 있군. 내가 쓰면 평범한 검에 불과하겠지만, 자네의 손에 들린 이상 여느 보검 못지않겠네.”
연지평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것을 알아보시는군요.”
모용우가 탕마대검을 툭툭 건드렸다.
“나 역시 검사니까.”
“서로 다른 깨달음을 얻어 가는 과정이라지만, 모용 형님께서는 정말 많은 것을 깨달으신 분 같습니다.”
“과찬일세. 멀어도 한참 멀었지.”
가만히 미소 짓던 모용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호정과는 여러 번 비무를 했더랬지. 하지만 배우고 익힌 무공이 달라, 연가의 무학을 제대로 경험한 적은 없었어.”
모용우가 검병을 쥐었다.
“어떤가? 동생도 잠이 오지 않는 듯한데, 가볍게 손이나 나눠 보겠나?”
연지평이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좋네. 바로 시작해 볼까?”
“다만, 아직 제 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모용 형님께서 받아 내지 못하실까 두려운 것은 아니나, 이왕 하는 비무라면 제대로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 이 비무는 사흘 뒤로 넘기는 것이 어떨는지요?”
“호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그 또한 좋네. 나 역시 이왕이면 자네의 모든 공부를 보고 싶어.”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 또한 배움이라면, 오히려 비무를 승낙해 준 자네에게 내가 더 감사하지.”
연지평은 모용우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감탄했다. 본디 강자는 자신보다 하수에게 무언가를 배우려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무(武)에 관한 자세만큼은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연지평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연지평은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말입니다.”
“음?”
“예전에 저희 형님과 종종 비무를 했다고 하셨는데…….”
“그랬지. 이긴 적은 없지만 말이야, 하하.”
“혹시, 형님의 무공에서 과도한 살기가 묻어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모용우가 눈을 빛냈다.
“그것이 궁금했던가?”
연지평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큰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약간의 걱정과 궁금증이 있어서요.”
“걱정과 궁금증이라.”
“정검을 깨닫고, 한 단계 더 위의 검의(劍意)를 손에 넣으니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적어도 제가 추구하는 검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대단한 성과일세. 자네 나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조금 전 형님께서 말씀하셨듯, 각자의 깨달음은 다르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 호정 형님의 무공은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살기가 짙었습니다.”
“그렇게 느낄 만하네.”
연지평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솔직한 걱정이었다.
“검의를 깨닫고 느꼈습니다. 살기가 짙은 무공은, 강인한 정신력으로도 혈향의 침식을 막기가 힘들다는 것을요. 살기 짙고 파괴적인 무공을 구사하다 보면, 제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언젠가는 심적 파탄 상태에 이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눈이 정확하네. 많은 문파에서 정신부터 단련시키고 수준 높은 무공을 전수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모용 형님께서 보시기에, 저희 형님은 괜찮을 것 같습니까?”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나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호정의 무공과 미래를 알 수는 없을 것일세.”
“……그렇군요.”
“다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고작 살기 정도에 무너질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호정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일세.”
“그, 그렇습니까?”
“자네 형을 믿게. 과거의 호정에게, 나 역시 비슷한 걱정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자네의 부친과 여러 사람이 잡아 준 덕에, 지금의 호정은 어떤 악에도 무너지지 않을 분명한 선(線)을 세워 두고 있네.”
모용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쪽 하늘, 습기 가득한 광동의 하늘은 별빛도 흐린 듯했다.
“호정에게는 선이 있네. 살기 따위에 물들지 않고 바르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선이. 스스로 인지하고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호정이 점차 바른길을 걷고 있음이 보인다네.”
“…….”
“누구보다 잘할 거야. 난 그렇게 믿네.”
* * *
번쩍!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시작부터 화려하게 살기를 뿜다 보니 늘어졌던 근육이 적당하게 긴장하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어제 양천과 대화를 나눌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양천이 말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술자리는 나중에 갖도록 하세. 자네가 날 흡족게 할 판단을 내렸다면, 최고급 명주를 대접도록 하겠네.”
“그럼 그렇게 하십시다.”
“좋네.”
“그 전에.”
연호정이 적연과 연심을 힐끔거렸다.
“손님이 계셨다면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소. 아시다시피 이쪽과는 얼굴 보기 껄끄러운 사이인지라.”
연호정이 정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다만 내 생각에, 굳이 자리를 따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더군.”
거짓말이로군.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적당한 긴장과 여유를 가져서 그럴까? 양천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어제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새삼스럽게 느끼는데, 부주께선 참 욕심이 많은 분이시오.”
“말 그대로 새삼스럽구먼.”
“이미 많은 재화와 수하를 거느렸음에도, 그 손에 신검까지 쥐시려 하오?”
양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욕심이 많으니까?”
“부주와 내 사상이 많이 다른 게 유감일 뿐이오.”
순간 양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 제안을 거절할 셈인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거절할지, 승낙할지는 부주께서 하시기 나름이오.”
“무슨 뜻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리다.”
연호정이 검지로 적연과 연심을 가리켰다.
“보타는 포기하시오.”
“…….”
“그것부터 시작합시다. 그게 맞소.”
“……흐음.”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자네에게는 그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아니라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상황이 어찌 되었든 내가 저들을 부른 건 아닐세. 저들이 먼저 날 찾아왔어.”
사실이었다. 보타를 무너트릴 생각이야 예전부터 해 왔고 실제로 분쟁까지 일으켰지만, 저쪽에서 먼저 찾아올 거라고는 양천도 예상치 못했다.
연호정의 미소가 점차 차가워졌다.
“그렇소?”
“그렇다네.”
“그럼, 부주께서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소.”
“음?”
“저쪽이요, 나요?”
“……무슨 뜻인가?”
연호정이 턱을 치켜들었다.
“보타의 신검을 얻고 싶소? 좋소,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그 신검을 쥐고 휘두르려면, 좋은 장기 말 하나는 포기해야 할 것이오.”
양천이 눈을 부릅떴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나라는 존재가 보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부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
“날 쓰고 싶다면 보타를 버리시오. 보타를 얻고 싶소? 그렇게 하시오. 난 내 집안 살림부터 챙기겠소.”
“자네, 정말 이러긴가?”
“그건 내가 할 말이오.”
연호정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욕심도 시국을 봐 가면서 부리시오. 이번에는 양 부주께서 과하셨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재를 드리겠다는 거요. 이 정도면 파격적인 대우 아니오?”
“…….”
“도끼요? 아니면 검이오? 선택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