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어둠을 얻다 (4)
“은근히 자주 오는 것 같군.”
거대한 분지를 지나 대전으로 향하던 연호정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가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은 입을 쩍 벌린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엄청나지?”
“……삼두육비의 괴수가 사는 곳 같은데요?”
“예전보다 경계가 훨씬 더 강화되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위화감이 입구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어. 필시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기관진식을 세워 두었을 것이다.”
“엄청나군요. 이곳의 규모를 생각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었을 것이다. 다만, 아무리 지하라고는 해도 그 경계가 지나치게 삼엄해. 이 정도면…….”
연호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성이 아니라 마치 뇌옥 같군.’
앞으로 양천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양천은 절대 이곳에서 끝낼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하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이 아니었다. 양천의 욕망과 포부 때문이었다.
‘무림맹 못지않은 거성(巨城)을 지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되면 이곳은…….’
어쩌면 정말 거대한 뇌옥으로 만들 것 같기도 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이번에는 정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안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마치 딱딱한 가면을 쓴 것처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괜찮냐?”
“네?”
“괜찮냐고.”
“아, 네.”
얼떨결에 대답했던 정안은,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괜찮지는 않아요.”
“당연히 그렇겠지.”
정안이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니 호장의 말씀이 옳아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어요. 만약 호장께서 힘을 써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이곳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동시에, 너의 수습되지 못한 분노를 그냥 넘기지 못한 묵룡부의 고수가 너를 추적하고, 죽였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후회하나?”
“절대요.”
정안이 쓰게 웃었다.
“제 판단에 후회는 없어요. 다만, 세상에는 정말 배울 게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을 뿐이지요.”
“세상은 사람이 만들었다. 즉 세상을 알고 싶으면 사람을 잘 아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지.”
“…….”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는, 많이 만나 보고 많은 얘기를 해 봐야 한다. 그것이 관계이며, 사람은 관계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렇군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내 생각일 뿐이다. 사람마다 전부 생각하는 바가 다르지.”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입을 닫았다. 그 역시도 생각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양천.’
그가 밤을 새워 고민했던 것은 보타암의 일을 그냥 넘겨도 될지가 아니었다.
보타의 일은 해결되어야만 한다. 다만 시기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가 고민한 것은, 바로 양천의 발언 때문이었다.
‘자네 말마따나 삼교를 상대하려면 흑도와 백도가 손을 잡아야 할 것이네.’
‘당연한 말씀.’
‘그러나 지금껏 그에 관한 얘기가 제대로 나온 적은 없지. 그래서 자네에게 그리 물은 것이네. 사음교를 박살 내기 위해 모든 걸 던질 수 있느냐고.’
‘무슨 말씀이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자네의 무공도, 안목도, 기지도, 추진력도 전부.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스스로가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 한계를 두지 않고 달릴 줄 아는 독한 마음이야.’
‘칭찬 고맙소.’
‘파견을 오게.’
‘파견?’
‘예전처럼 세작으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무림맹의 사자(使者)로서 본부로 파견을 오란 말일세.’
‘……?!’
‘이 전쟁, 무림맹은 절대 주역이 될 수 없네. 이유인즉, 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연후에야 이해관계 따지는 짓을 멈추고 움직일 테니까.’
‘그건…….’
‘아니라고 말하지 말게. 자네 역시 그러한 부분을 답답하게 생각하는 걸 아네.’
‘맹주가 뽑히고 나면 달라질 거요.’
‘맹주가 언제 뽑히는가? 빨라야 내년 아닌가?’
‘…….’
‘내년 초에 뽑힌다고 가정해도 반년이 남았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 정도 시간이면 적이 화려하게 날뛰고도 남네.’
‘그것이 내가 묵룡으로 파견 나올 이유가 되진 않소.’
‘자네는 무림맹 정치의 핵이야. 하지만 자네는 정치의 핵으로서 무림맹을 하나로 만들 힘은 없어. 그 많은 문파의 이해관계를 단기간에 어찌 하나로 엮나? 하긴, 그런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겠지만.’
‘…….’
‘그 분야는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맡겨 두게. 대신, 쓸데없는 데에 힘쓰지 말고 묵룡으로 오게. 와서 사음교부터 제대로 밟아 보자고. 내, 자네가 그리 마음을 먹는다면 본부의 병력과 자원을 필요한 만큼 쓸 수 있도록 막대한 권한을 줄 것이네.’
‘살 떨리는 제안이군.’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네.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이 움직이면 찾아오게.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음황독에서 벗어난 양천은, 과거의 양천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양천의 본모습일는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간 세상과 싸워 온, 끝끝내 승리를 쟁취하여 투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일대 거인의 통찰력은 누구 못지않았다.
그런 양천이 말하고 있다. 이 전쟁의 주역은 무림맹이 아니라고.
연호정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무림맹은 주역이 될 수 없다. 양천 말마따나 문파가 너무 많이 집결하여, 각자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호정이 생각하는 무림맹이 된다면, 그땐 이 전쟁의 주역이 될 수 있다.
‘형님.’
모용우 역시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모용우는 어떤 노강호에게도 뒤지지 않는 통찰력과 두뇌를 갖추었으며, 닳고 닳은 그들의 느릿한 정의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분명한 협의를 품고 있다.
사람을 통솔하는 데에도 뛰어나며, 특히나 덕(德)과 인망이 출중하니 전쟁이 끝난 연후에도 무림맹을 바로 세우는데 지극히 적합하다.
다만.
‘관록과 위치가 최소한의 자격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과연 모용우라는 이름이 먹혀들 것인가가 문제겠지.’
물론 관록과 위치는 중요하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알면서도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연호정은 쓰게 웃었다.
‘내가 흑제성을 세웠을 때의 나이를 알면, 저들 모두가 깜짝 놀라겠지.’
흑도라서 가능한 일이다?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다.
그러나 충분한 능력이 있다면, 흑도든 백도든 조직을 이끄는 것에 별문제는 없다.
‘제길, 정말 세상일이 내 마음 같지 않군.’
연호정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강량이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씻지.”
“너보다 깨끗하다.”
“말이나 못 하면.”
어느덧 일행은 대전 앞에 도달했다.
연호정이 정안에게 물었다.
“마음의 준비는 됐나?”
“네.”
“좋아.”
연호정이 백서에게 말했다.
“알리시오.”
백서는 연호정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부주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들이게.”
쿠구구구궁.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석벽이 움직였다.
석벽의 너비와 두께를 생각하면, 이 무거운 돌벽이 기관으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 웅장하기까지 한 광경에 정안과 강량은 입을 쩍 벌리고야 말았다.
‘익숙한 계단이군.’
백서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는 일행.
순간 정안이 움찔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진정해라.”
“하지만……!”
“안다. 연화문 사람들이 있는 거.”
정안의 얼굴에 격동이 깃들었다.
“설마 정말로…… 묵룡부에…….”
“정신 제대로 다잡아. 가서는 아무 말도 말아라.”
이윽고 일행이 기다란 융단 위로 올라섰다.
“오셨는가?”
저 멀리 태사의에서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빨리 뵙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그러게나 말일세. 그래서 더 좋다네. 자네가 마음을 빨리 먹은 것 같아서.”
양천이 손으로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오시게.”
세 사람이 푹신한 융단 위를 걸어 태사의 밑까지 도달했다.
그때였다.
화아아아악!
무섭게 몰아치는 기세가 일행을 뒤흔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경악한 얼굴의 두 여인이 있었다. 한 명은 중년을 넘어 초로로 보이는 여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정안과 엇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저, 정안?!”
정안이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화문주님.”
멍하니 그녀를 보던 적연이 이내 버럭 소리쳤다.
“이년! 네년이 어찌 예까지 기어들어 온 것이냐!”
생각보다 훨씬 격렬한 반응이었다. 옆에 있던 연심마저 당황할 정도로.
그 분노 가득한, 살기마저 엿보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정안은 생각했다.
끝났구나.
보타암은, 적어도 당대의 보타암은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할 것이다.
정안이 눈을 감았다.
적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개 같은 년! 못 배워먹은 천안의 후예답구나! 사문의 어른을 봤으면 냉큼 고개부터 조아려야 할 것 아니더냐! 이런 짐승만도 못한……!”
그때, 한 줄기 매서운 광풍이 일었다.
화아아아악!
끔찍하기 그지없는 열풍이 적연의 입을 턱 막아 버렸다.
지이이이잉!
회전하는 연가신단이 막대한 진기를 뿜었다.
그리고 그 진기는 주작화기의 출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화르르르르륵!
무지막지한 화기와 상상을 초월하는 살기가 적연의 몸을 옭아맸다.
적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신을 노려보는 적안(赤眼)의 청년에게서 감당할 수 없는 기파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기파가 얼마나 끔찍한지,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입 닫아라.”
“뭐, 뭣이!”
“너 따위 잡것한테 욕을 먹을 정도로 잘못한 게 없는 녀석이다. 또다시 이쪽 기분을 더럽히면, 그 쓸모없어 뵈는 머리통부터 날려 주마.”
“……!”
적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가히 천안문답구나! 어디서 마두(魔頭) 나부랭이와 손을 잡고……!!”
순간 연호정의 권풍이 빛살처럼 폭발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적연이 비틀거리며 벽까지 밀려났다.
놀랍게도 연호정의 권풍을 막은 건 적연이 아니었다. 그녀의 앞에는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비틀거리는 연심이 있었다.
권풍을 막았는데도, 그 후폭풍이 너무 강렬해서 적연까지 밀려 나가 버린 것이다.
가히 괴력이라 할 만한 무공이었다.
연심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난 무공!’
단 일수에서 느껴지는 힘이 그야말로 상상 초월이었다. 부지불식간 펼친 검학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충격량은 말이 되질 않았다.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저 녀석이다.’
그때보다 훨씬 젊고 풋풋한 모습.
‘이 녀석이 바로 검후였어.’
흑암제 시절 만났던, 당시에 대화를 나누었던 검후가 바로 저 연심이었다.
하지만 그 놀라움도 순간일 뿐이었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넌 해당 사항 없다. 물러나라. 물러나지 않으면 너도 같이 죽는다.”
연심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상대의 말은 그냥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함께 죽이겠다는 듯, 뻗어 나오는 살기가 참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양천의 입이 열렸다.
“인사는 그쯤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
“그 기세 좀 이만 죽이게.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지 않나.”
가만히 적연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살기를 수습했다.
훅.
뿜어져 나올 때는 태산과 같더니, 사라질 때는 연기와 같다.
기세의 수급이 자유자재다. 천재 이상의 괴물이 보여 주는 신기(神技)의 내공 운용이었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손님맞이 하기 전에 청소 좀 하시지 그러셨소?”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사이에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나?”
“우리 사이가 뭔데 그러시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멋진 사이가 될 것 같은데?”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술부터 주시오. 백주 말고 좋은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