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어둠을 얻다 (3)
“아, 오셨는가.”
양천의 얼굴에는 아무런 미안함도 없었다.
“본부가 지상이 아니라서 말일세. 공기는 충분히 잘 통하지만, 그래도 답답함이 상당했겠지.”
“편하지는 않더군요.”
상당히 딱딱한 목소리였다. 기분이 많이 상한 듯했다.
양천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래도 수하들이 잘 챙겨 주었다고 들었네.”
오랫동안 기다린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보타암의 한 지파, 연화문의 문주인 적연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묻어났다.
당연하게도, 양천은 그녀의 기분이 나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이 사람을 보고 싶어 했다고?”
적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저희 제안에 응답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리 말했네만, 자네도 알다시피 이 부분에 관해선 우리 측에서도 신중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몇 달을 고민해도 모자람이 없을 사안이지. 고작 며칠의 고민으로 결단을 내릴 만큼 보타의 이름이 가벼운 건 아니지 않나?”
그만큼 보타암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적연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부주님의 고민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로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하군. 시간이 어찌 그리 부족한가?”
적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에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본문은 세상에 나가고자 합니다. 예전처럼 후보에게 시련을 부여하지 않고 순수한 무력의 상징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건 들었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가는 다른 지파에서 수작을 부릴지도 모릅니다. 본문의 후보, 여기 이 아이의 재능이야 다른 지파를 압도하는 수준입니다만, 그들의 탐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양천의 눈이 자연스레 적연 옆의 여성에게로 향했다.
부선과 비슷한 연배, 그러나 품고 있는 힘은 진실로 대단했다.
‘봐도 봐도 신기하군.’
완벽하게 갈무리된 기도. 순수한 무력만으론 대문파 장문인을 웃돈다. 지금의 연호정과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힘이었다.
이런 천재는 두 번 보기 힘들다. 양천 자신도 저 연배에 저 정도 경지에 이르진 못했다.
‘경험이 일천하여 지나치게 순진한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 하지만 무공의 경지가 높으니, 어지간한 돌발 상황에서도 충분한 대처가 가능할 거야.’
양천이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이 연심(蓮心)이라 하였던가?”
연심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새삼 느끼는 건데, 정말 대단한 무공을 쌓았군. 그 연배를 생각하면 나보다도 수년은 빠른 진경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런 자네에게 묻고 싶네.”
양천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는 차기 검후가 되고 싶은가?”
돌발적인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연심보다 적연이 더 놀랐다.
연심이 고개를 들어 양천을 보았다.
순간 연심은 두 눈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엄청나구나.’
연심은 느낄 수 있었다. 보타암의 신공, 보리살타공(菩提薩埵功)으로 연마된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이자,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욕망으로 가득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체격.
겉으로 보면 인상도 좋아서, 도무지 나쁜 사람 같지가 않다.
하지만 연심의 눈에 비친 양천은 그야말로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였다. 지배, 승리, 파괴, 복수 등등, 수행자로선 절대 가져서는 안 될 공격적인 욕구가 한가득하였다.
연심에게는 그것이, 양천의 절대적인 무공보다도 훨씬 더 큰 충격이었다.
“어찌 나를 그리 보는가? 질문이 다소 당황스러웠던 모양이군.”
“……아닙니다.”
연심은 눈을 감았다.
“검후가 되고 싶은 욕구가, 분명 저에게는 있습니다.”
“음, 그런가?”
“하지만…….”
“하지만?”
재차 눈을 뜬 연심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검후라는 직책을 얻기 위해 가족 같은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면, 저는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적연이 소리쳤다.
“연심!”
“그것이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이 녀석이 어찌 그런 나약한 말을 입에 담는……!”
그때, 양천이 손을 들어 적연의 말을 막았다.
그가 연심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이 자네의 진실된 마음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구먼. 그렇다면 말일세.”
양천이 적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적연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분함이 가득했다. 그렇게나 설득했는데도, 연화문의 후계자인 연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적연을 화나게 했다.
“자네, 연화문의 문주는 본인의 후계조차 제대로 설득지 못한 상태로, 이 양천에게 힘을 보태 달라 요청한 것인가?”
적연이 즉시 입을 열었다.
“혼란스러워 이러는 것뿐입니다. 이 아이 역시 우리 지파의 숙원을 잘 이해하고 있지요. 자리가 자리인지라 당황해서 나온 발언일 뿐, 부주께서는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자네 귀에는, 정녕 저 아이의 발언이 당황해서 나온 실언으로 들리나?”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실망이군. 자네 지파의 후계자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있다는 뜻이니 말일세.”
“……!”
적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양천이 다시 연심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그 발언, 진심이라는 걸 아네. 만약 자네가 감히 내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았다면 용서치 않았을 것이야.”
천하의 투왕이 하는 말이다.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네 역시도 실망일세.”
“……네?”
적연과 연심, 두 사람 모두 정신이 얼떨떨했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의 그 진심이 바뀌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자네는 여기 와서는 안 되었네.”
“……!”
“나아가, 군웅할거의 시대에 그런 말랑말랑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수행자를, 천하 제패의 욕망으로 가득 찬 내가 좋게 평가할 것 같은가?”
“부주님.”
“삶은 투쟁이야!”
순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양천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흠칫 놀랐다.
“검후가 되고 싶지 않다면 모르되, 그 꿈을 분명하게 간직하고 있는 자가 어찌 투쟁을 두려워하며 발을 뺀단 말인가!”
“……?!”
“자네 손에 들린 그 검이, 정녕 수행의 도구로 적합한 물건인가? 수행의 도구라면 어찌 검도(劍道)에 그리 매진했단 말인가! 검은 살상용 병기야! 병기를 쥐고 휘두르는 자가 어찌 제대로 된 수행을 할 수 있단 말이야!”
과격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양천의 이 발언은, 수백 년 보타암의 역사를 부정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적연이 입을 열었다.
“오늘의 자리는 부주님의 결단을 듣기 위해 온 것이지, 저희 문파의 역사를 운운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못난 놈!”
“뭐, 뭐라고요?!”
“수백 년 보타의 역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세상에 나와 구원의 뜻을 펼치겠다고 천명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보타의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내 말이 그리도 듣기가 싫단 말이더냐!”
“……!!”
“수행을 원한다면 경전을 파고 고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으라! 천하를 원한다면 투쟁의 도구로서 냉엄하게 검을 휘두르라! 검후? 수행자 집단에 그러한 상징이, 정녕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냐?!”
준엄하기 그지없는 질책이었다.
양천의 진심이 담겨 있기에 그 말은 더욱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일까? 적연은 우물쭈물했다. 양천에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양천이 불타오르는 눈으로 연심을 바라보았다.
연심은 그 눈빛에 고개를 돌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욕망의 눈이, 자꾸만 시선을 끌기도 했다.
“검후가 되고 싶다고 했느냐? 하면 검후가 되어라! 수행자가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검을 놓아라!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마음으로 투쟁을 피하는 자, 싸워 보지도 않고 패배한 머저리에 불과할 뿐이다!”
“저, 저는……!”
“이 천하가, 그런 자까지 품에 안을 정도로 만만해 보이는가!”
“……!!”
강렬한 열기가 연심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너에게는 재능이 있다. 보타의 어중간한 가르침을 받고도 그러한 경지에 오른 너의 재능과 노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하나 재능이 있는 자가 그 재주를 외면하고 썩힌다면, 그 또한 옳은 일이라고 볼 수 없다.”
“…….”
“재능을 썩히고 싶다면 네가 진정 바라는 다른 길을, 분쟁이 없는 길을 찾아라. 하나 네 마음에 위대한 검사가 되길 바란다는 욕망이 있다면, 그 욕망을 받아들여라!”
양천의 말을 들은 연심은, 그야말로 천지가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욕망을 받아들여라?
불문이 추구하는 깨달음은 욕망을 누르고 해탈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욕망을 악(惡)으로 치부하며, 마라(魔羅)라는 악신으로 만들기까지 했을까.
그러한 가르침을 받아 온 연심에게 있어 양천의 발언은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심의 마음에는 양천의 발언 한 글자, 한 글자가 퍽퍽 박히고 있었다.
저 말은 옳지 않은 말이다. 그것을 안다.
저 말은 옳은 말이다. 양천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럼 자신에게는?
‘나는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결국은 그것이다.
연심이 충격을 받은 것은 양천의 말이 옳아서가 아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들여다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중간했다.’
그렇다. 그녀는 어중간했다.
아마 그녀뿐만이 아니라, 보타의 많은 검수들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욕망이요, 번뇌야. 수행자의 신분으로 그런 것을 받아들이는 건…….’
문득, 연심은 생각했다.
‘나는 정말 도(道)를 얻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도를 추구하긴 했지만, 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강박은 있었지만, 그것을 원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원했던 것은……?’
순간 연심의 눈빛이 흔들렸다.
‘……검후?’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칭찬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차기 검후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보타에는 자신 못지않은 재능을 가진 자가 몇몇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검후가 되고자 했을까?’
대체 검후가 무엇이기에? 그저 보타의 상징에 불과할 뿐이지 않은가?
수행자라면, 그러한 상징에 욕심을 품을 리가 없다. 한데 자신은 품었다. 수행자로서 어울리는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비로소 연심은 깨달았다.
‘나는 검후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어. 검후가 됨으로써, 천하에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러한 마음이 있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멍하니 계단을 보며 사색에 빠진 연심의 기도가 조금씩 출렁이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연심의 재능은 대단하다. 저 재능이 개화하면, 저 천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사음에게 한 방 먹여 줄 칼로서 아주 적절할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 자신의 진실함을 찾아 줄 테니, 너는 나를 위한 신검이 되어 사음을 겨누어야 할 것이다.’
그때였다.
“부주님.”
대전 밖에서 백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과 대담 중이네.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오시게.”
“그것이…… 부주님과 약속을 잡은 이가 왔습니다.”
“약속?”
“연호정 일행입니다.”
순간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들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