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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62화 (461/963)

462화. 어둠을 얻다 (2)

콰아앙!

동혈 서너 개가 뒤흔들릴 정도로 막강한 충격이었다.

그나마 무의식중에 힘을 빼서 다행이었다. 이곳은 그의 거처이기 이전에 스승이 세운 영역이었다. 무시무시한 스승의 위명을 생각하면, 벽에 구멍 하나 뚫은 것만으로도 욕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 이 개새끼가!”

우르르르릉!

전홍의 분노 가득한 외침에 굉장한 살기가 실렸다.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보았다.

우측 어깨, 그 밑이 허전했다.

생각보다 고통은 크지 않았다. 아니, 고통 자체를 느낄 수가 없었다.

고통보다도 상실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평생 써 왔던 오른팔이, 이제는 영영 사라졌다는 사실을 목도한 사람의 끔찍한 기분은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으리라.

“으아아!”

쾅! 쾅! 쾅!

몇 번이고 땅을 후려치는 전홍, 그의 왼 주먹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내공도 쓰지 않고 후려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헉! 헉!”

눈이 뒤집혀서 호흡 관리도 못 했다.

몇 번이나 가쁜 숨을 들이쉬던 전홍은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상 때문에 속이 뒤집히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젠장! 젠장!’

한번 고통을 인지하자 전신에 안 아픈 구석이 없었다.

상반신 전체를 거미줄처럼 가로지른 검상은 아직도 다 낫지 않았다. 그의 평소 회복력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이 다시금 그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개자식! 죽여 버린다!”

콰르르릉!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간 전홍은 순간 움찔했다.

“확실히, 회복은 빠르구나.”

“……사저.”

전홍의 거처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바로 부선이었다.

전홍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귀여운 사제가 얼마나 처절하게 당했는지 궁금해서 오셨소?”

공격적인 말투였다.

부선이 고개를 저었다.

“너의 패배에는 관심 없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속으로 코웃음깨나 치셨겠지. 부족한 재능으로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누군가의 눈에는, 천재로 칭송받던 사제의 패배가 달콤한 꿀과 같지 않겠소?”

부선은 아무런 대답 없이 전홍을 지긋이 바라보기만 했다.

전홍은 인상을 찡그렸다. 왜인지 과거 자신이 알던 부선과는 다른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됐소. 비키시오.”

“어딜 가려는 거지?”

“내가 그걸 사저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거요?”

뜻밖에도 부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지금 뭐라 하셨소?”

“사부님께서는 너의 돌발 행동을 짐작하고 계셨다.”

순간 전홍은 움찔했다. 제아무리 성난 망아지처럼 날뛰는 그라도, 사부라는 호칭 앞에서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부선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한 예측은 비단 사부님만의 특권은 아니지. 너를 아는 모두가 예상했다. 네가 깨어나자마자 날뛰리라는 걸. 그리고 넌 우리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구나.”

전홍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내상 때문이 아니라, 지금 자신을 모욕하고 있는 부선의 꼬락서니가 토악질이 나올 만큼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사부님께서 직접 명하셨다. 너를 통제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부님 곁에 능력 좋은 신하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사저에게 그런 명을 내리셨단 말이오?”

당신에게 그만한 능력과 자격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여전히 공격적인 어조에도 부선은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사부님의 판단이 의심스러운 것이냐? 아니면 사부님을 믿질 못하는 것이냐?”

“……!!”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전홍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부선이 힐끔 그의 팔을 보았다.

“얌전히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회복은 빠르지만, 그렇다고 무리해도 될 만한 상처는 아닌 것 같구나.”

“……으드득.”

이건 분명 자신을 농락하는 것이다. 전홍은 그리 느꼈다.

부선이 몸을 돌렸다. 할 말 다 했다는 듯 냉정하게 몸을 돌리는 그 모습이 전홍의 신경을 있는 대로 건드렸다.

심사가 뒤틀린 전홍이 툭 던지듯 말했다.

“어떻게 꼬드긴 거요?”

부선이 걸음을 멈추었다.

“뭘 말이냐?”

“대체 사부님을 어떻게 꼬드겼기에 그런 중임을 맡았느냔 말이오. 뇌물을 드렸소? 아니면 미태 고운 계집들이라도 바친 게요?”

“……네가 그렇게까지 타락했을 줄은 몰랐구나.”

전홍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타락이라니! 말조심하지 않으면……!”

“않으면?”

화아아아악!

순간 전홍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부선,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무지막지한 기세가 제 심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충격적일 만큼 대단한 힘이었다. 그 어둡고도 사나운, 사람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기세는 스승인 양천에게서나 느껴 본 것이었다.

털썩!

너무 놀라서일까? 전홍은 저도 모르게 주저앉고야 말았다.

부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시에, 전홍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도 안 되는 추태를 보인 것이다.

“네 어깨 위에 달린 것은 생각이란 걸 하라고 붙어 있는 것이다. 네 주둥이는 뭘 처먹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중한 발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네가 스승님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겠다. 뇌물? 계집? 웃기는군. 너처럼 한심한 놈은 투왕 문하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런 너에게 잠시나마 부러운 감정을 품은 지난날의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구나.”

부선이 다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방에서 자숙하거라. 이 경고를 듣지 않고 허튼짓을 벌인다면, 그 즉시 뇌옥에 처박힐 것이다.”

그렇게 부선은 사라졌다.

땅에 주저앉은 전홍의 몸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려 왔다.

잠시 후.

콰아아앙!

그의 주먹이 기어이 땅에 구멍 하나를 뚫어 놓았다.

“으아아아아아!!”

* * *

다음 날 아침.

“날 새셨어요?”

정안의 인사에 연호정은 그저 손을 한 번 들어 보일 뿐이었다.

정안은 연호정의 맞은편을 보았다.

다소 뒤로 빠져 있는 의자. 빈 술잔과 흩어진 젓가락도 보였다.

정안의 눈이 깊어졌다.

“묵룡부주…… 설마 떠난 건가요?”

“그래.”

연호정의 음성은 상당히 건조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정안이 맞은편에 앉았다.

“호장께서 저와 함께 가자고 하셨지요?”

“그랬지.”

“함께 가자고 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제가 그 권유를 수락한 건 묵룡부주와의 만남 때문이라는 것도 아시지요?”

“안다.”

“한데 어찌 저를 부르지 않으셨나요.”

간밤에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가 찾아왔다는 사실 정도는 정안도 알고 있었다. 후원 쪽에서 강력한 내공 파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즉, 상대는 정안의 감각으로 잡을 수 없는 고수라는 뜻이었다.

연호정은 말없이 잔을 채웠다. 한옆에는 술병이 다섯 개나 세워져 있었다.

정안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비록 본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정안은 연호정을 신뢰하고 있었다.

적어도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은 아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잘 들어.”

연호정은 보타암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양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감 없이 얘기해 주었다.

스르륵.

소매를 꽉 쥔 정안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작…… 고작 그런 이간질 때문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고작이라고 말하지 마라. 사람은 작은 속삭임 한 번에 용기를 얻기도 하고, 빈정거리는 말 한마디에 자신감을 상실하여 할 수 있는 일도 의지를 잃고 못 하게 되기도 해.”

“아무리 그래도요!”

“저들의 행위는 분명 옳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력을 이끌고 가서 밀어 버리는 게 더 나았느냐고 하면, 그렇다고 볼 수도 없지. 중요한 것은, 보타암은 묵룡부의 공격에 당한 것이다.”

“이건 비겁한 짓이에요. 보타는 수행자들이 모인 사찰입니다. 설령 이쪽에 안 좋은 감정이 있다 한들, 일단은 대화로 시작해야…….”

“대화로 분란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것은 이상적이다. 그러나 백도 정파의 문파들도 자신들의 힘이 더 강하다고 판단되면, 대화를 생략하고 칼을 뽑아 들지. 묵룡부는 오죽할까.”

“그래서, 그들을 가만히 놔두자고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럴 순 없겠지.”

“맞아요. 대체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묵룡부가 본문을 그리 만들었다면 이는 절대 묵과할 수 없는 문제예요.”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네 생각을 들어 보자.”

연호정이 팔짱을 끼었다.

날을 샜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전보다 더 깊어진 것 같았다.

“가만히 놔둘 수 없다면, 넌 어떻게 하고 싶으냐? 묵룡부는 네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집단이다. 그 전에 양천 하나도 감당할 수 없지. 그렇다면, 네게 힘을 보태 줄 사람들을 구해 묵룡부를 공격할 생각이냐?”

정안은 연호정이 직접 돕겠다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저는 제힘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요. 그렇다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도 아니죠. 하지만 참고 있을 수도 없어요.”

“…….”

“전에 호장께서도 말씀하셨죠? 제가 어중간하게 대처한 것이 잘못이었다고요. 바뀌어 버린 보타암의 상황에 나 하나라도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면, 비록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자체가 변화였을 거라고.”

“그랬지.”

“정황을 다 알았는데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요. 그렇다고 힘을 모아서 쳐들어갈 생각도 없어요. 일단은요.”

“그럼?”

“묵룡부주에게 만나자고 연락할 겁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푸하하 웃어 버렸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리 웃어요?”

“아, 미안하다. 널 깔봐서 그러는 게 아니야. 너의 결심을 경험 없는 이의 얕은 생각이라고 치부하지도 않는다. 그저…….”

연호정이 볼을 긁적였다.

“참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당연히 만나서 대화부터 해야지요.”

순진할 정도로 단순한 생각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은, 의지는 옳은 것이라고.

세상을 모른다? 어려서 그러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 모두는 정안의 이러한 판단에 냉소 짓기 이전에, 세상이 이따위로 돌아가게 된 근본적인 문제부터 고민해 봤어야 한다..

분란이 생겼다? 대화로 풀어야 한다.

대화로 풀리지 않는다? 그럼 또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만나 주지 않는다? 그래도 만나서 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죄를 지은 사람은 분명한 사죄를 해야 하고, 피해를 본 사람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만 한다. 그게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지.’

정안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 그녀의 생각대로 처리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연호정은 그녀의 의지와 결단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연호정이 창밖을 향해 소리쳤다.

“강량! 나갈 채비 해라!”

정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갈 채비라니? 갑자기?

잠시 후, 강량이 헐레벌떡 사 층으로 올라왔다.

“뭡니까, 형님? 갑자기 나가다니요? 어디로요?”

남은 술을 시원하게 비운 연호정이 잔을 힘차게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긴. 사태를 이리 어지럽게 만든 사람한테 다시 따지러 가 봐야지.”

“예?”

연호정이 정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목숨 걸 준비는 됐나?”

정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좋아.”

치이이익!

일순간 주기(酒氣)를 날려 버린 연호정이 어깨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뒤틀린 것부터 바로잡으러 가자. 그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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