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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54화 (453/963)

454화. 진실을 찾는 여정 (4)

“더럽게 덥네.”

씹어뱉듯 투덜거리며 인화루로 들어온 사람은 제법 거대한 덩치의 청년이었다.

키는 육 척을 훌쩍 넘어 칠 척에 이를 정도였고,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민소매 상의를 걸쳐 굵고 강인한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손바닥과 손등에 이어 팔뚝까지 칭칭 감긴 검은 붕대는 그가 권법을 연성했다는 걸 알려 주었다. 짧게 깎은 머리, 사납게 일렁이는 두 눈은 맹수를 연상케 했다.

전체적으로 몹시 거친 인상이었다. 인상도 인상이지만,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사나운 기파도 굉장했다.

그 맹수 같은 기질이 널찍한 인화루 일 층 전체를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청년이 점소이를 바라보았다.

점소이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마치 코앞에서 범이 노려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야.”

“예, 예!”

“뭐 하는 거냐? 최상층으로 안내해.”

인화루의 최상층은 전망이 좋기로 유명해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었다.

점소이는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호,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범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히는 것만 같다. 점소이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아무리 몇 년 만에 왔다고 날 몰라? 너, 신참이냐?”

“그, 그렇습니다.”

청년이 콧방귀를 뀌었다.

“신참이라 봐줬다. 주인장 불러.”

“……예?”

“주인장 부르라고!”

순간 일 층은 물론 이 층에서 식사하던 사람들까지 기겁하며 귀를 막았다.

마치 불문의 사자후처럼 우렁찬 목소리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외침엔 사나움과 짜증만 가득했다.

풀썩.

점소이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호흡이 가쁜 듯 연신 숨을 들이쉬던 점소이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청년이 뿜어내는 기세는 어지간한 절정고수도 주춤할 만큼 공격적이었다. 그러한 기세를 내공 한 줌 없는 점소이가 감당하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청년이 혀를 찼다.

“이런 쓰레기 같은.”

그때였다.

“저, 전 공자님?!”

서둘러 계단을 내려온 사람은 화려한 복식을 한 사십 대 중년 사내였다.

청년, 전홍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나야 뭐 항상 비슷하지.”

“허허,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그 거짓말, 진짜인가?”

“거짓말이라니요? 제 진심입니다.”

중년 사내가 손을 비비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나저나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진즉 자리를 마련해 두었을 텐데요.”

“그래서 자리가 없다?”

“헉!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전 공자님께서 앉으시겠다는데 누가 감히 배짱을 부리겠습니까?”

아부에도 품격이 있다고 한다면, 중년 사내의 아부에선 어떠한 품격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볼품없는 아부가 먹히긴 먹히는 모양이었다. 청년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안내해.”

“예!”

“아, 그리고 반나절쯤 뒤에 내 수하들도 올 거야. 서른 명쯤 되니까 따로 자리 만들어 주고.”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루주는 왜 안 보여?”

“허허, 아버지께서는 일 년 전에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는 제가 루주지요.”

“호오? 이거 축하해 줘야겠는데? 이따 시간 좀 내. 술 한잔 따라 주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중년 사내, 인화루주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전홍을 최상층으로 안내했다.

이내 전홍의 모습이 계단 위로 사라졌고, 그제야 일 층의 침묵도 사라졌다.

“엄청 살벌하군. 대체 누구지?”

“전 공자라고 하던데?”

“쉿! 입조심해. 까딱 잘못하다간 머리통이 날아갈 걸세.”

“자네는 저 청년이 누군지 아나?”

“알지. 나야 여기 토박이인데.”

“누군데?”

“전홍이라고, 투왕의 제자 중 한 명일세.”

“허억! 투왕이라면, 그 성천의?”

“그렇다니까. 알았으면 이만 입 좀 다물게. 무림인들은 귀가 밝다지 않던가.”

전홍은 계단을 오르며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전부 들었다.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발언이었고, 성격이 모난 사람이라면 눈총이라도 한 번 줄 법한 발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홍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만인의 위에 설 자가 힘없는 우민들의 주절거림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칠칠치 못한 짓이다.

감히 반항하고 눈을 깔지 않는 것들에게는 응당 벌을 내려야 하겠지만,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혀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는 없다.

전홍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굳어져 버린 그의 그런 성격은,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을 것이다.

삼 층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묵룡과는 여러모로 인연이 있긴 한 모양이군. 양천의 셋째 제자라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너는 저치 알고 있냐?”

“얘기는 많이 들어 봤지요. 양천이 거둔 제자 중 일제자와 함께 가장 재능이 뛰어나다고 명성이 자자했거든요.”

“그래? 난 몰랐는데.”

“흑도 무림에서는 나름대로 유명합니다.”

“그랬구먼.”

강량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상당히 날카로웠다.

연호정이 넌지시 물었다.

“저 녀석의 기파, 너도 느꼈지?”

“물론입니다.”

“어떠냐?”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박빙이겠는데요.”

놀랍게도 전홍의 기파는 무종지벽을 부수기 직전에 도달해 있었다.

셋째라고는 하지만, 둘째인 부선과 같은 나이인 그였다. 다만 오 년이나 늦게 제자로 받았기에 셋째가 되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무공을 배운 시간이 부선보다 오 년이나 짧다. 한데도 벌써 무종지벽을 부수기 직전인 것이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무종지벽을 부순 연호정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생각한다면, 전홍의 재능은 실로 극찬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성격은 영 별로인 것 같지만 실력은 진짜다. 그것도 어중간한 무공이 아니야. 제대로 된 실전까지 충분히 겪어 본 녀석인 것 같은데.”

거침없이 기파를 드러내지만, 그 거친 기파 속에 드리워진 유연함과 탐색의 분위기는 어지간한 아수라장을 거치지 않고선 체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강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저 사람이 얼마나 강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술이나 마시죠.”

“네 말이 맞다.”

양천에게 초대장을 보낼 생각이지, 양천의 제자와 안면을 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연호정이 정안을 힐끔 보았다.

“댁도 이만 마음을 가라앉혀.”

“네?”

“저 청년은 양천의 제자일 뿐 양천이 아니야. 저 녀석에게 신경 쓰지 말란 소리다.”

모르는 새 은근하게 흘러나온 정안의 기운이 위층을 더듬고 있었다.

양천이 보타암 분란의 씨앗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제자가 이 주루에 들어섰다.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그녀가 진정하기를 바랐다.

정안이 한숨을 쉬며 진기를 수습했다.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지.”

연호정이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마음 급하게 먹지 마. 평화로워 보이지만 이곳은 적지다. 섣부른 행동이 일행 전체를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어.”

“네.”

강량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배포 좋게 묵룡부로 침투해서 묵룡부주까지 속여먹은 분께 어울리는 말은 아닌데요?”

“시끄러워, 인마. 술이나 한 잔 더 해라.”

“좋지요.”

일행은 다시 술잔을 부딪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반나절이 조금 덜 지났을 무렵.

해가 떨어져 석양이 드리워진 때에, 서른 명이 넘는 사내들이 인화루로 들어섰다.

안 그래도 시끌벅적했던 주루 안이 더더욱 시끄러워졌다.

“잠시 말씀 좀 드리겠습니다.”

삼 층으로 내려온 인화루주가 손님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불콰해진 것을 보니 술깨나 마신 듯했다.

“한참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는 와중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무림의 영웅들께서 본루를 찾아오셨는데, 안타깝게도 만석이라 손님분들의 양해가 필요합니다.”

인화루주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의는 깍듯했다.

“손님들께서 지금까지 드신 술과 음식은 따로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힘이 없는 루주에게 있어선 이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삼 층에 앉은 사람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주루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홍의 정체가 전부 알려진 상황이었다. 굳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 없었어도 일어났을 것이다.

강량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망할, 하필이면 왜 삼 층이야?”

그가 연호정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형님?”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분란을 일으킬 필요 있겠냐? 우리도 얼추 다 먹었는데 일어나자. 게다가 돈 안 내도 된다잖냐?”

강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림맹 유군 부대의 대수인 연호정이 돈 안 내도 된다며 시시덕거리는 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정안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일어나시게요?”

“왜? 더 있고 싶나?”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게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요.”

솔직한 발언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미 온 손님들이 있는데, 제아무리 술값을 받지 않는다 해도 불편한 상황이긴 하지.”

“그렇다면…….”

“뭐가 되었든 이 책임은 루주가 지게 될 거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런가요?”

“주루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했다. 여기서 그러지 않겠다고 버텨 봤자 손해 보는 건 루주야.”

“손해를 보다니요?”

“사람들은 소문에 민감해. 이곳에서 싸움이, 그것도 투왕의 제자와 싸움이 났다고 하면 흥미진진해서 찾아오는 사람보다,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서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몇 배는 더 많을 거다.”

“아……!”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이런저런 생각이야 많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기준.

정안은 연호정의 말 중 그 기준이라는 단어에 가장 큰 울림을 받았다.

“다들 일어나고 있어. 우리도 슬슬 일어나자.”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룡부는 너무 크고 눈에 띄는 무기라 멸사군에 맡겨 둔 채로 온 참이었다. 흑백쌍룡부는 챙겨 왔지만, 장포에 가려져 있었기에 눈썰미가 좋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물론 강량과 정안은 검을 차고 있었으나, 그 정도야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였다.

“거기 셋. 잠시 멈춰 봐.”

강량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전홍이 앉아 있었다. 인화루주만큼은 아니었지만 볼이 살짝 달아오른 걸 보니, 그도 술깨나 마신 것 같았다.

강량이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래, 너희.”

서슴없는 반말이었다.

강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과연, 보통 배짱이 아니야. 날 앞에 두고도 혓바닥이 제법 낭창낭창한데?”

“할 말 없으면 우린 이만 가겠소.”

“하긴, 그 정도 배짱이 있으니 여기까지 기어 왔겠지. 안 그런가, 흑철검문의 소문주?”

순간 강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홍이 씨익 웃었다.

“모를 줄 알았나?”

연호정은 볼을 긁으며 생각했다.

모를 줄 알았는데.

전홍의 눈이 번쩍거렸다.

“반란 문파의 떨거지가 다시 호남으로 기어들어 왔다…… 우리가 어지간히 우스운 모양이구만.”

“……다른 건 모르겠는데.”

반란 문파라?

강량의 눈이 냉혹하게 빛났다.

“너 정도면 우스울 만하겠다.”

전홍이 씨익 웃었다.

살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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