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진실을 찾는 여정 (2)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
“아직 많이 혼란스러우신 모양입니다.”
“…….”
화운은 묵묵부답이었다.
하기야 자신의 못난 모습을 깨우쳐 준 사람 앞인 데다 마음도 다스리지 못한 상황에서, 쉽게 입이 열릴 리가 없었다.
화운의 신색을 가만히 살펴보던 범오가 찻잔을 내밀었다.
“숭산에서 나는 약초를 달여 만든 차입니다. 빈말로도 맛이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에 이만한 물건이 없지요.”
소림승이 강호행을 할 때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물품 중 하나가 바로 약초잎이었다. 대단한 효용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 번씩 우려 마시면서 그 향으로 소림에서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힘없이 찻잔을 내려다보던 화운이 조심스레 찻잔을 들곤 한 모금 마셨다.
범오가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쓰군요.”
“하하, 아무래도 그렇지요. 찻잎으로 쓰려고 말린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본디 적정선의 양기(陽氣)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약초였습니다.”
“…….”
화운은 말없이 찻물을 내려다보았다. 그 쓰디쓴 맛과는 달리 꽤 투명하고 맑았다.
그 투명한 찻물의 표면에, 지치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중년 여인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범오가 말을 이었다.
“아직 많이 혼란스러우시지요?”
“…….”
“화 각자와는 상황이 달랐지만, 저 역시 얼마 전까지 부처의 도(道)는커녕 사람의 도에서도 한참이나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로잡기란 정녕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화운이 고개를 들어 범오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도에서 멀어졌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범오의 얼굴에선 손톱만큼의 혼란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범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선, 지금의 못난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불법을 배우든 배우지 않든, 모든 사람의 발전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화운이 미소를 지었다.
자조적인 웃음인지 상대를 비웃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제가 많이 못나 보이지요?”
“물론입니다.”
범오의 대답은 뜻밖에도 신랄했다.
“화 각자께서는 큰 잘못을 저지르셨습니다. 하물며 수행자의 신분이라면 더더욱 큰 죄이지요. 본인도 인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리 당당하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범오가 고개를 저었다.
“잘못을 저지른 것 자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린 사람입니다. 그럴 수 있어요. 문제는, 그것이 잘못이란 걸 명백히 깨달았는데도 외면했을 때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행위, 분명 부끄러워해야 마땅할 일입니다.”
“…….”
“많이 부끄러워하십시오. 다만, 그것에 무너질 필요는 없습니다.”
화운은 한숨을 내쉬고 싶었다. 정말이지 땅이 꺼져라 몇 번이고 내쉬고 싶었다.
하지만 소림승이 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한숨조차도 쉽게 뱉을 수가 없었다.
‘…….’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소림을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아니, 자신만이 아니라 중원 불문의 모든 승려에게 소림이란 이름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알았을까? 범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소림 출신이라 어려우신 것입니까?”
“…….”
“제가 소림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때의 사자후로도 번뇌 가득했던 지난날의 화 각자께서는 진실을 외면한 채 끝까지 버티셨을 겝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러지 않으셨을 겁니다.”
범오가 미소를 지었다.
“한데 어찌 그리 눈치를 보십니까. 제가 소림 출신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화 각자 본인입니다. 허례허식에 신경 쓰지 마시고, 자신부터 돌아보십시오.”
“하지만…….”
“소림도 승려들이 모인 하나의 집단일 뿐입니다. 선사분들의 노고와 희생이 지금의 소림을 만들었지만, 그분들도 소림이 특권을 쥐고 흔들기를 바라진 않으셨을 겁니다.”
“…….”
“도망치지 마십시오. 무수히 많은 이유를 들어 회피하려 들지 마십시오.”
우웅.
범오의 동공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다시 돌아오십시오, 화 각자.”
결국, 화운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직이군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인정하는데, 또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까?”
“자꾸만 도망치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보타의 이름을 버리고 저 멀리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습니다.”
범오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시군요.”
처음으로 화운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보타의 이름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다?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각자(覺者)라는 호칭을 받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한 태도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범오는 그녀가 크게 한 발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화운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지금은…… 애쓰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혼자 있고 싶군요.”
범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과거의 잘못을 명확히 인정하신 화 각자는 이전보다 더 빛나는 길을 걸을 수 있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평온을 찾으시길.”
반장례로 인사한 범오가 몸을 돌려 방을 나서려 했다.
그때, 화운이 물었다.
“범오 스님.”
“말씀하십시오.”
“한데, 정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음?”
범오가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정 각자가 들르지 않았습니까?”
“네?”
“정 각자는 연 대수와 함께 잠시 길을 나섰습니다.”
화운의 얼굴에 얼떨떨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길을 나섰다니요? 대체 어디로……?”
“현재 중원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두 곳에 들를 예정입니다.”
“……?!”
* * *
“군장님.”
“오셨는가.”
진패가 고개를 숙였다.
“한 시진 전에 대수께서 강 검사, 그리고 보타의 후예와 함께 이곳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래?”
“예.”
언젠가 예고도 없이 떠날 테니 의정군을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더랬다.
하지만 진짜로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날 줄은 몰랐다.
‘참으로 자네답구먼.’
모용우가 고소를 지었다.
“대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혹은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우리는 이곳에서 대기할 걸세.”
“예.”
“개방에서 연락을 줄 것이야. 우리의 임무는 단순히 이곳에서 대기하는 것이 아니네. 광동성의 백도 무림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민심이 안정될 때까지, 매 순간 우리는 출정에 나설 걸세.”
진패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그래.”
모용우가 자신의 검집을 툭툭 건드렸다.
“우리는 더 강해져야만 하네. 광동성이 회복될 때까지, 힘의 공백을 노리고 난장을 치는 무뢰배들이 시시각각 나타날 게야. 그리고 그중에 무시 못 할 고수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지.”
“그렇지요.”
“충분히 단련해야 하네. 대수를 다시 뵙기 전까지, 의정군은 지금보다 배는 더 강해져야 할 것이야.”
진득한 성품의 그답지 않게, 진패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장께서 너무 뛰어나니, 쫓아가려는 부하들만 고생이로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그것은 비단 대수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음?”
“군장님의 기세 역시 예전과는 또 달라졌습니다. 더 두껍고, 더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
진패는 알고 있었다. 기세가 마냥 강하고 날카로워진다고 해서 성장한 게 아니라는 걸.
진짜 고수의 성장은 강해지는 것보다는 풍성해지는 쪽에 가깝고, 날카로워지는 것보다는 부드러워지는 쪽에 가깝다.
말하자면 내가고수의 정통적 성장이다. 모용우는 특이하고 변칙적인 수련법이 판을 치는 현재 무림에서, 몇 안 되는 정석적인 성장을 이뤄 내고 있었다.
모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혼란스럽다네. 내 수행에 믿음은 있지만, 이놈의 무공이란 것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복잡한 것 천지라서 말이야.”
“저희는 그 복잡함이라도 느껴 보고 싶습니다.”
“자네들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 이는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야.”
“압니다. 다만, 저희도 언젠가 군장님과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하하! 반드시 그래야지.”
탕마군의 다섯 조장은 묵비를 제외한 멸사군의 가장 강한 군병보다 한 수 아래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의 모용우와 비슷한 경지를 쌓아 올린다면,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자극받은 멸사군 역시 그와 비슷한 성장을 이뤄 낸다면.
차후 의정군은 무림맹이 아니라 당대 무림 최강의 부대로 거듭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휴식이라네. 오늘 훈련은 그만하고, 내일까지 푹 쉬라고 전달하게.”
“대수께서 안 계신다고 바로 쉬는 겁니까?”
“신소리 그만하고 전하기나 하게.”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패가 모용우의 거처를 나갔다.
혼자가 된 모용우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너머로, 연호정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자네는 세상에 다시 나기 힘든 천재라네. 천재에 의협심도 충만하니, 차후 무림의 큰 기둥이 될 거야.’
모용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호정이 차세대 무림의 최강자를 넘어, 강호의 판도를 움직이는 거물이 되리란 것을.
그렇기에 걱정스러웠다.
‘자네의 의협심이, 어지러움 가득한 세상이 자네를 그리 바쁘게 만들고 있다네. 하지만 이와 같은 단독 행동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할 것이야. 의정군은 자네가 아껴 줘야 할 조직이 아니라, 자네와 함께 싸우는 조직이기 때문일세.’
언젠가, 연호정과 다시 만나게 되면 이 말을 꼭 해 줄 것이다.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던 모용우가 일순 빙긋 웃으며 검을 뽑았다.
“형이 되어 동생을 넘지는 못할망정 뒤떨어져서야 안 될 말이지.”
쉬이이익!
모용우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모용세가의 가주지학, 건곤백팔검해였다.
그의 검법은, 그 무공의 이름과 같이 천지를 아우를 듯 웅혼하기만 했다.
* * *
사박.
부스러진 흙을 밟으니 확실히 광동성을 벗어난 게 체감되었다.
드높은 언덕 위, 세상을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눈빛은 한층 맑고 깊어져 있었다.
“어때?”
연호정의 물음에 정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뭐가요?”
“음, 역시 거기까지 닿지는 못한 건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연호정이 이번에는 강량에게 물었다.
“네가 느끼기에는 어떠냐?”
“그렇게 앞뒤 다 떼고 물으면 누구라도 의아할 겁니다. 대체 뭘 느꼈냐고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잖습니까.”
“그래?”
“당연하지요. 다만…….”
광활한 호남 땅을 내려다보는 강량의 눈빛은 정안보다도, 심지어 연호정보다도 훨씬 더 날카로웠다.
“공기가 조금 텁텁합니다.”
“텁텁하다…….”
“예. 꽤나 긴장감이 넘치는군요.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네 감각도 아주 못 써먹을 건 아니구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정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장감이 넘친다고요?”
그녀는 그런 긴장감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광동성과는 다른, 후덥지근하면서도 안락하고 광활한 느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안은 피 튀기는 난전에 대한 경험이 적었다. 살기를 읽는 능력은, 그 경지가 제아무리 높아도 경험자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래, 긴장감이 넘친다. 그리고 저기, 묵룡부와 가까운 이곳에서의 긴장감은 어디서 나오겠냐?”
“……!”
연호정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묵룡부주에게 초대장 하나 보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