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진실을 찾는 여정 (1)
생명력 넘치는 잎사귀를 자랑하는 한 그루의 거목이 있었다.
그 거목이 뻗어 낸 가지와 나뭇잎은, 멀리서 보면 어쩐지 커다란 연꽃을 닮았더랬다.
정안은 그 나무가 좋았다. 그래서 광동에 온 이후, 그 나무에 기대어 앉아 명상하기를 즐겼다.
오늘도 그녀는 명상에 힘썼다. 잡념을 지우고 무아(無我)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을 비우려 하였다.
하지만…….
“후우.”
정안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난 수일간의 노력처럼, 오늘도 명상에 잠기려 노력했다. 그리고 지난 수일 동안의 실패처럼, 오늘도 깊은 명상에 잠기는 데엔 실패하고야 말았다.
하긴, 속 좋게 명상에 잠길 때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그런 때일수록 더더욱 나 자신을 다스리려 했지만, 그건 정말이지 쉽지가 않았다.
“땅 꺼지겠군.”
정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뒷짐을 진 연호정이 있었다.
“아, 연 대협.”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대협은 무슨. 낯부끄러운 칭호는 집어치워.”
묘한 사람이다.
말투는 상당히 거친데, 그것이 밉게 들리지 않았다. 이 사람의 천성과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투 같다고 해야 할까.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사람의 말투는 오히려 무척 솔직하게 들릴 것 같았다.
“그럼 호장이라 부를게요.”
“대협만 아니면 되니까 마음대로 해.”
“네.”
“그건 그렇고.”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답은 구했나?”
“네?”
“그날 그 사건 이후, 매일 이곳에 와서 끊임없이 명상에 잠기지 않았던가. 수행자라고는 해도 그 빈도가 너무 잦았어. 무언가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테지.”
정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행이 부족해서 그런지, 그럴듯한 시도만 많았을 뿐이에요. 답을 구하기는커녕 머리만 잔뜩 어지러워지던데요?”
“그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아주 독특한 느낌이 묻어 나오는 미소였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선명히 떠오르고, 깊게 묻으려고 하면 할수록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명상이란 그런 것이지.”
“명상에 대해 잘 아시나요?”
“한계를 맞이해 본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명상의 달인들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다만, 달인이라 해도 실패 빈도가 높은 것 역시 명상이지.”
“아…….”
“너무 잊으려 애쓰지 마라. 때로는 잡념에 의식을 맡겨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 잡념들에 미시적으로 접근해 파내고 또 파내다 보면, 어느 순간 보려 하지 않았던 곳에서 내가 원했던 것들이 명징하게 드러날 때도 있지.”
현기 가득한 말이었다. 적어도 정안이 듣기에는 그러했다.
그저 그럴듯한 단어의 나열이 아니었다. 경험이 없이는 나오기 힘든 말. 진심이 주는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결정적으로, 연호정은 정안보다 고수였다. 마냥 거칠기만 한 무공을 구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 수 한 수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리(武理)를 담을 줄 아는 진짜 고수였다.
그 사실이 연호정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정안이 고개를 숙였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고맙습니다.”
“피가 될 필요도, 살이 될 필요도 없다. 그런 것보다는 너의 그 순하고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에 주력해라. 한평생 그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네 삶은 힘든 여정이 될 거다.”
정안이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맑고 깊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정안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친숙하다.’
왜일까?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수일 동안 몇 차례 대화를 나눴을 때와는 달리 오늘의 연호정은 묘하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마치 가족이나 동문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묘한 현기에는, 어쩐지 불문의 선사들이나 자아낼 법한 여유와 깊이감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평소라면 건네지 않았을 질문을, 정안은 저도 모르게 던지고야 말았다.
“가족 같았던 사람의 당혹스러운 변화를 체감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녀의 사고, 화운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다만, 너와는 경우가 달랐지. 내 아버지께서 그렇게 웃음이 많고 여유가 있는 성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거든.”
“그렇군요.”
“오히려 내 아버지와 동생이 나 때문에 당황했지.”
“왜요? 어릴 적과는 성격이 많이 달라진 거예요?”
“판이하게.”
“신기하네요.”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되었든, 그렇게 죽치고 앉아서 시간만 보내는 것도 옳다고 볼 수 없지. 운공은 매일 하나?”
“네? 아, 네. 운공이야 절대 빼놓지 않죠.”
“좋군. 그럼 가볍게 한 수 나눠 볼까?”
“……갑자기요?”
“명상에 잠기려 노력했지만 잠기지 못했고, 잡념에 몸을 맡기려 해도 배우고 익힌 게 무아무심(無我無心)이라 시도조차 쉽지 않을 것 아닌가.”
정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칼질로 땀 한번 쫙 빼는 게 제격이지. 따라와.”
“호장께서 직접 받아 주시게요?”
“이곳에 네 검을 제대로 받아 낼 만한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그중 가장 안 바쁜 사람이 나야.”
연호정의 고평가에 정안은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처 구석의 작은 연무장에 도착했다.
“여긴가요?”
“그래.”
“여기는…….”
“왜? 문제라도 있나?”
정안이 헛기침을 했다.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그때 보셨다시피 제 검의 영역이 좀 넓은 편이라서…….”
내 검력을 이 좁은 연무장이 감당할 수 없을 거란 말은, 부끄러워서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첨언하자면, 네 검권을 자유자재로 늘리고 줄이는 것도 수행이야. 무공 구현의 영역을 한없이 팽창시키기만 하다가는 섬세함을 잃을 수도 있다.”
“아, 네.”
“좁으면 좁은 대로, 상황에 맞게 최대한 위력을 살려서 집중해 봐.”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안은 괜스레 자기 자랑을 한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럼, 갑니다.”
“언제든지.”
연호정은 맨손이었다. 하지만 정안은 왜 맨손이냐고, 도끼를 들고 오지 않을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때 본 연호정의 무공은, 도끼를 들든 맨손이든 감당키 힘들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처럼 좁은 구역이라면 도끼보다 맨손이 더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아아앙!
기수식도 없이, 시작하겠다는 말도 없이 정안이 움직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승부관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비무를 하자고 했으면, 굳이 시작이라는 말이 없어도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승부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피슉!
날카롭게 쏘아진 검이 연호정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쾌검이었다. 만화정검결을 쓰지 않아도 그녀의 검은 매서웠다. 묵비와 비슷한 나이에 묵비와 비슷한 경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기본기 덕분이리라.
연호정의 발이 땅을 박찼다.
퍼어어엉!
허공을 후려친 각법,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무형의 충격파가 원형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빨라!’
빠르고 강했다.
이 한 번의 발길질만으로 긴장감이 확 달아올랐다. 피하지 않았다면 머리통이 날아갔을 일격, 막았어도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만한 공격이었다.
실전이 아니라도 죽을 수 있다. 세상 어떤 비무도 마찬가지다.
정안의 집중력이 일순간 최고조로 올라갔다.
파바바바박!
그녀의 검이 그리는 궤적은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웠다.
아름답고, 또한 빨랐다. 칼질 한 번이 잔영을 남기기도 전에 이검(二劍), 삼검(三劍)의 연환격이 쏟아지는데, 어지간한 쾌검수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연호정의 양손이 매섭게 움직였다.
티티티티팅!
정안의 눈이 흔들렸다.
만화정검결을 쓰진 않았지만, 꽤 위협적인 검초임은 분명했다. 그 위험천만한 검초를 맨손으로 쳐 낸 것이다.
‘무서운 동체 시력!’
차라리 내공으로 단단해진 손으로 날을 가격해 쳐 냈다면 덜 놀라웠을 것이다.
그 찰나의 시간, 연호정은 손등으로 검배를 쳐서 검로를 틀어 버렸다. 내공으로 손을 보호하며 쳐 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신기(神技)의 방어술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쿵!
진각과 함께 뱀처럼 품으로 파고드는 움직임 역시 헛웃음이 나올 만큼 자연스럽다.
빠르고 부드러우며 자연스러운 움직임. 마치 상대가 물러날 줄 알았다는 듯 반 박자 앞서 전권을 제압하는 안목이 극치에 달해 있었다.
퍼어어엉!
정안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강철 같은 주먹이 화포처럼 솟구쳤다. 피하지 않았다면 턱부터 두개골까지 그대로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파악!
‘윽!’
짧게 검을 쳐 내려는데, 솟구친 주먹이 순식간에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우측 어깨, 검을 쥔 쪽이었다. 휘두르던 검이 연호정의 옆구리 한 치 앞에서 멈추었다. 어깨 관절이 잡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놀라움의 순간이었다. 검을 수행의 도구로 쓰는 보타암에는,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검학은 있어도 인체에 대한 박식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박투술과 살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안의 어깨를 잡은 연호정이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정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맥없이 허공을 돌다가 땅에 처박혔다.
콰앙!
정안의 눈이 흔들렸다.
뒤통수부터 등판까지, 낙법도 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한데 이상하게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머리가 깨지고 척추 손상을 입어도 부족하지 않을 기세였는데, 그저 둔중한 충격이 전부였다.
정안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땀 좀 빼려고 했더니, 너무 싱겁게 끝이 나 버렸구만. 너, 이 정도가 아니었잖아?”
“호장께서 너무 강하신 것 같아요.”
“너한테는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싱겁게 당할 건 아니었어. 다만, 네가 이리 빨리 쓰러진 이유를 알 것 같다.”
“뭐죠?”
“어중간해서다.”
“……!”
정안의 어깨에서 손을 놓은 연호정이 옷을 털며 말했다.
“죽일 기세로 휘두를 건지, 적당히 대응만 할 건지 확실하게 정하질 않았으니 이리 빨리 당해 버린 거다. 네가 좀 더 집중했다면 어깨를 잡힐 일도, 검법 전개가 막힐 일도 없었어.”
“…….”
“명상이든 대결이든, 어중간한 건 안 하느니만 못한 거야. 길을 정했다면, 혼란은 하루빨리 치워 내고 거침없이 뛰어들어라. 모험을 무서워하지 마.”
누워서 연호정의 말을 듣던 정안이 눈을 감았다.
“저는 비겁자예요.”
“안다.”
“어른들의 당혹스러운 변화를 목도했음에도, 그것이 바르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어요.”
“그것도 안다.”
“저 하나 나선다고 보타가 바뀌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나서야 했어요. 목숨을 걸고 막아야 했어요.”
“그건 아니지.”
“……네?”
“너 하나가 나섬으로써 이미 보타는 바뀌는 거다. 내가 널 비겁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들의 폭주를 막지 않아서가 아니야.”
“그럼요?”
“어중간했기 때문이다.”
정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뜨인 그녀의 눈은 충격으로 가득했다.
이전에 어중간하다고 말한 것에는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은, 그녀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헤집고 있었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나는 곧 광동을 뜬다. 무림맹으로 갈 거야.”
“…….”
“하지만 가는 길에 들를 곳이 있다. 보타암이 그 지경이 된 빌미를 제공한 자가 수장으로 있는 집단이지.”
“……?!”
“같이 갈 거면 오늘부터 심신을 다스리도록 해. 미리 말하건대, 목숨 장담은 못 한다.”
정안의 눈에서 섬광이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