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흔들림 (5)
우우우우웅.
검이 울었다.
‘음?’
나무에 기대어 앉아 땀을 닦고 있던 연위는 땅에 꽂아 둔 검을 바라보았다.
‘뭐지?’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분명, 검이 저 스스로 울었는데?’
연위 정도 되는 고수가 착각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는 과거의 연위가 아니었다. 의정군이 창설되고 유군 부대의 대수가 된 연호정이 출정한 이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수련에 집중했다.
그 수련은 당관과 함께였으며 종종 제갈문호의 조언도 곁들인, 그야말로 최고의 질을 자랑하는 수련이었다.
그래서일까? 연위의 검극사기는 대성을 넘어 또 다른 경지에 진입했고, 절대삼검 중 일검을 확실하게 완성했다.
그리고 그 경지는?
사라라라라락.
불어오는 바람이 검을 흔들었다.
스르르륵.
세워진 두 무릎에 양팔을 얹은 연위.
손을 뻗지도 않았고, 내공 발산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검이 저 스스로 움직여 뽑혀 나오려 하고 있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슥!
부드럽게 뽑혀 나온 검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이내 연위의 앞에서 멈추었다.
무서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허공섭물이었다. 내공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거의 의지로만 검을 조종한다고 느껴질 만큼의 압도적인 무(武)가 거기에 있었다.
연위가 손을 뻗어 검을 쥐었다.
우우우우웅.
검이 또 한 차례 울었다.
주인을 만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작용했기 때문일까?
한참이나 검을 보던 연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호정?”
모르겠다. 왜 이 순간에 저도 모르게 첫째의 이름을 입에 담았는지.
하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마치 자신이 성장한 만큼, 자신의 아들도 크게 성장한 듯한 기분이랄까.
호정만이 아니었다.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은, 이제는 앳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둘째의 모습이었다.
출맹 전까지만 해도 거의 광기에 젖어 검을 휘둘렀던 둘째.
그것이 그리도 걱정스러웠는데, 왠지 지금은 모든 역경을 이겨 내고 멋지게 성장했을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위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오?”
비꼬는 듯한 말투는 이제 익숙함을 넘어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햇살이 좋아서 말이오.”
당관이 하늘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사천과는 다르군.”
“그렇소?”
“나중에 한번 놀러 와서 보시오. 사천이 어떤 지역인지.”
“중원의 다른 지역보다는 해 뜨는 날이 적다고 듣긴 했소만.”
“해가 뜨면 개가 짖는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소? 하긴, 그런 동네에서 사니 자연히 우중충해지는 게지.”
연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관의 말이 웃겼던 것이다.
“그럼 사천 사람들은 다 어둡소?”
“그냥 그렇단 말이오. 그나저나…….”
당관의 눈이 빛났다.
“그새 또 늘었소?”
“무엇이 말이오?”
“아까 보았소. 허공섭물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사하더군.”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술수야 당가주에도 쉬운 일 아니겠소? 오히려 당가주에 비교하면 이제 걸음마 수준이외다. 멀어도 한참 멀었지.”
허공섭물로 조종되는 물체의 움직임 자체만 보면 연위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암기를 다루는 당관의 허공섭물은 극치의 섬세함으로 가득하니까.
그러나 당관은 연위의 허공섭물에서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느낌을 받았다.
마치 내공이 아니라 순수하게 의지로 검이 움직인 듯한 느낌.
‘……어검(馭劍)?’
당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야.’
진정한 어검의 경지를 본 적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아버지가 구사하는 어검의 경지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인간의 능력으로 그런 것이 가능할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연위의 깨달음은 진정한 어검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물고 있다. 연가주의 깨달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검의 끝을 물고 있어.’
당관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저 나이, 저 무위에 이 정도 성장 속도라…… 정말 지독하구만.’
무림맹에 온 이후, 연위의 성장 속도는 가히 눈부시다는 표현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체되었던 성장의 재개는 당관 자신에게도 일어났다.
‘완전히 다른 무리(武理)를 이해하는 과정은 폭발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물론 아무나 이런 일이 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당관 자신이나 연위나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그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 부단한 고민과 피를 토하는 노력을 감행했기에 이만한 성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거기에, 자식의 존재도 한몫했겠지.’
언젠가 연위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무섭지 않소?’
‘무엇이 말이오?’
‘댁의 둘째는 충분히 천재요. 하지만 연호정, 그놈은 그조차도 넘어섰어. 그 나이에 그 정도 경지라면, 조만간 연가주를 뛰어넘는 고수가 될 거요.’
‘허허, 말만 들어도 기쁘기 그지없소.’
‘기쁘기만 한 거요? 무섭진 않소?’
‘무서울 것이 뭐가 있소? 내 자식이 다 커서, 어느새 아비인 나를 넘어설 수준이 되었소. 그것은 그 어떤 깨달음에서도 얻을 수 없는 희열이자 감동일 것이오.’
‘흠.’
‘다만,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아버지로서, 아들이 나를 넘어서는 것은 한량이 없는 기쁨일 것이오. 그러나 무인으로서의 나는, 아들에게 더욱 높은 벽이 되어 더 큰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를 바라고 있소.’
‘…….’
‘오로지 검(劍)만을 생각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땀을 흘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오. 그저 궁구하고 또 궁구하면 그뿐. 그러나 무인이자 아비로서, 나는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오.’
‘그래도 녀석이 가주를 초월한다면?’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패배를 자인하겠소. 아마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아름다운 패배겠지.’
당관은 피식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아름다운 패배라. 말은 좋군.’
그런 식의 접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가는 피를 나눈 형제조차도 경쟁 대상일 뿐이었다. 뿐인가? 당관은 아버지인 당형을 이해하는 것보다 밟고 올라서길 수도 없이 바랐다.
한데 이 부자지간은 달랐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함에도 끊임없이 서로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 또한 선의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뭐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이들처럼 독특한 부자지간은 또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당관은 한 번 더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는 당가주는 어떻소?’
‘자식 자랑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소. 내게는 그 정도로 인간미 없는 자식은 없소.’
‘허허허,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오.’
‘그럼 뭐요?’
‘상아에게 더 높은 경지를 보여 주기 위해,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 않소?’
‘착각이오. 나는 나밖에 생각하지 않소. 당신을 돕는 것도 나의 성장을 위함이오.’
‘허허.’
‘웃지 마시오.’
‘허허허.’
‘웃지 말라니까.’
그냥 그렇게, 물에 물 탄 듯 마무리된 대화.
하지만 당관은 내심 당황했다. 연위의 그 말이, 어쩐지 자신의 정곡을 찌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가꾼다? 그런 인생을 살아 본 적은 없다. 그것이 부모든 자식이든, 당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
복잡한 눈으로 연위를 보던 당관이 헛기침을 했다.
“오늘 수련은 언제 끝나오?”
“언제라도 끝날 수 있고,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소. 그런 것이 수련 아니겠소?”
“말은 좋소.”
“한데 왜 그러시오? 간만에 술이라도 한잔하시려고?”
“지금 이 시국에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소?”
당관의 눈이 빛났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등천교의 폭탄 발언.”
서슴없이 등천교의 이름 석 자를 부르는 그였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할 게 무에 있겠소? 모두가 알았고, 남은 정치적 부담을 공공대사께서 떠안으셨소. 그 부담을 덜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오.”
“그런 말이 아니외다. 우리가 그간 삼교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이유가 있었잖소?”
“그렇소.”
“한데 이제 그것이 물거품이 되었소. 그간 제갈 군사가 봉공들의 뒤를 캐고 있었지만, 그 작업은 절반의 진척도 이루지 못한 상황이오.”
당관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모용군, 그놈은 아닐 것이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연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처음에는 등천교 본인이 세작인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확률도 낮을 듯하오.”
“확률은 확률일 뿐이오. 다만, 나 역시 당가주의 말씀에 동의하오.”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황궁과 관부에 침투한 건 물론 묵룡부를 세우는 것까지 지원해 줬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놈들이, 그런 실수를 했을 리가 없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가만히 검을 보던 연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납검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소. 오히려 섣불리 움직였다간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소.”
“답답하군.”
“제갈 군사가 곧 도움을 요청할 거요. 그때까지는 우리도 섣부른 상상을 맙시다.”
연위는 생각보다 더 여유로워 보였다.
평소 연위의 성격을 생각하면, 저런 여유를 보여 주는 게 이상했다. 위급 상황에서는 더 철저하게 스스로를 조이는 사람이 연위 아니었던가.
가만히 연위를 살펴보던 당관이 피식 웃었다.
“언제요?”
“음? 갑자기 무슨 말이오?”
“연호정 그놈, 언제 온다고 하더이까?”
연위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소?”
“가주 얼굴만 봐도 알겠소. 그놈이 오거나 뭔가 획기적인 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런 여유를 부리겠소?”
“허허허, 정말이지 당가주의 눈치는 대단하시오.”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연가주가 읽기 쉬운 사람이었을 뿐이오.”
냉정하고 딱딱했던 과거의 연위였다면 천하의 당관이라도 표정을 읽을 수 없었을 터. 지금의 연위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낼 만큼 여유를 간직하고 있었다.
“닷새 뒤에 출발하겠다고 연락이 왔소.”
“닷새라.”
“다만, 즉시 맹으로 오는 건 아닌 것 같소. 중간에 여기저기 들를 곳이 있다고 하더이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올 거면 빨리빨리 올 것이지, 어딜 또 들렀다 온다는 거요?”
“허허,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별일이야 있겠소?”
연위는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광동성이 있는 방향, 두 아들이 있는 그곳을.
“아마도 크게 성장했을 것이오. 어쩌면 나 이상으로.”
* * *
대낮에 큰 창이 달렸는데도, 어쩐지 방 안이 어두웠다.
그 어두운 공간에서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갔다.
“이번엔 너무 무리한 거 아니오?”
“…….”
“등천교는 충분히 의심받을 만한 자요. 하지만 그 의심이 지속되긴 힘들 거요. 제갈문호는 보통 놈이 아니오. 머지않아 봉공 중 등천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세작이라는 사실을 간파할 거요.”
“…….”
“도통 알 수가 없군.”
“너는…….”
그림자의 흐느적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습지 위를 기어 다니는 뱀처럼 늘어졌다.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해라.”
“어련하시겠소?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해 드릴까?”
“곧 지령이 내려올 것이다. 그전까지 네 위치에 어울리는 모습만 보여 주면 된다.”
“알겠소.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합시다.”
“…….”
“이 시간에 찾아오지 마시오. 걸릴까 봐 섬뜩섬뜩하오.”
스르륵.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림자는 사라져 버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술수였다. 신법인지 술법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지랄맞은 건 여전하네.”
그때, 밖에서 젊은 목소리가 들렸다.
“장문인. 접니다. 안에 계십니까?”
“왔느냐?”
“예. 말씀하신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허허, 수고했다. 들어오너라.”
저잣거리 파락호처럼 건들거렸던 그의 말투가, 순식간에 일파의 장문인에 어울리는 고풍스러움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