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흔들림 (4)
도끼에 얹힌 나의 힘이 선한 자들의 피에 젖지 않길 바란다.
이번은 탐경이 하는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정도, 범오도 탐경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우.”
이번이 흔들리는 눈으로 탐경을 바라보았다.
탐경은 이번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맑은 두 눈은 오로지 연호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내 도끼에, 어찌 노인장의 힘이 실린다는 거요?”
“이해했으리라 믿네.”
“싫소.”
탐경은 왜 싫으냐고, 왜 복을 걷어차느냐고 묻지 않았다.
“싫다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늙은이의 부탁이라고 생각하게.”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나는 자네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어. 그렇다고 받을 건지 말 건지 선택을 권유하지도 않았네.”
“…….”
“그저 부탁할 뿐이야.”
부탁.
탐경의 부탁은 다른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의 내공을, 자신의 깨달음을 연호정이 받아 가길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림인에게 있어 내공은 모든 내가무공의 기초이자, 약하디약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신선의 능(能)을 구현할 수 있는 원천이었으니까.
하물며 탐경이 연성하고 가꾼 내공은 중원 최고의 불문이자 최강의 문파로 손꼽히는 소림의 심법으로 제련한 진기였다. 그것도 무극의 경지를 돌파하여 드높은 순도를 자랑하는 압도적인 내공력이었다.
같은 사문, 제자에게도 건네기 쉽지 않은 게 내공이다. 지금 탐경은 그러한 내공을 완전히 타인이라 할 수 있는 젊은이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소. 그리고 내게는 노인장의 내공이 필요 없소.”
연호정의 말은 옳았다.
야율적과의 싸움으로 한 계단 위로 올라선 그는 무신(武神)의 경지라는 무극지경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한 연호정에게 더 많은 내공은 필요가 없었다. 정확히는, 내공이랍시고 받아 봤자 효율적으로 흡수가 안 된다.
그가 괜히 양천에게 받은 영약의 힘 대부분을 강량에게 건넸겠는가. 그것을 녹여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도, 불어난 힘과 이질적인 진기에 익숙해지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
작전을 코앞에 둔 연호정에게, 그것은 오히려 독이었다. 멀리 본다고 그 많은 기운을 꼭꼭 숨기고 있다간 피를 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과유불급. 연호정은 그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타인의 내공이든 영단이든, 실보다 득이 컸다면 거침없이 손에 넣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득이 될 것도, 실이 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득실을 따지자면 실에 가까웠다. 은퇴한 소림 출신 노인장의 진기를 받는다면, 괜스레 마음에 남겨질 부담과 소림의 원망 어린 눈을 감당해야 할 테니까.
탐경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 정도의 경지라면 타인의 내공은 물론 영단의 힘도 필요 없겠지. 내상이나 일시적인 내공 손실이 있다면 모를까. 설마하니, 자네는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그럼 대체 왜 이런 고집을 부리는 거요? 난 찝찝한 거 싫소. 차라리 범오 스님에게 전수하시오.”
“안 돼. 나의 내공은 철저하게 무(武)로써 단련된 것. 범오는 지고한 깨달음으로 반야대능력을 손에 넣었네. 자칫 나의 기운으로 반야의 기운이 흐트러질 수도 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동종의 내공이라 한들, 힘의 밀도에서 범오의 내공은 탐경에 비할 수 없다. 잘못하다간 탐경의 진기가 범오의 반야대능력을 뒤흔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뭐라 해도 난 받지 않을 것이오. 타인의 힘을 받아 성장할 강함이라면 언제든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직접 쌓아 올린 힘이야말로…….”
“자네도 알고 있잖은가? 자네의 깨달음과 안목이라면, 타인의 힘이라도 능히 직접 쌓아 올린 것처럼 자기화할 수 있다는 걸 말이야.”
“쓸데없는 고생이겠지.”
“맞네. 쓸데없는 고생이야. 내공을 전수하기 전, 내가 직접 진기를 가공하지 않는다면.”
“……?!”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탐경이 이번을 보며 말했다.
“여기 이 형님께서는 불산에 오신 후 제대로 된 무공 수련을 해 본 적이 없네. 그저 끊임없는 운공으로 자신의 내기(內氣)를 다스렸을 뿐.”
“…….”
“그 결과, 형님의 내공은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극도의 순도를 자랑하게 되었지. 그 순도는, 어떤 의미로는 무극의 경지를 돌파한 고수 이상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네.”
이번의 내공 양은 연호정 이상이다.
그러나 그의 실력은 여느 절정고수보다도 못했다. 삼십 년이 넘도록 내공만 다스렸지, 실전은커녕 초식 수련조차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로 인해 이번은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내공력이, 당장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번의 나이를, 그의 세월을 역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나의 내공을 순백의 진기로 바꾸는 법을 알고 있네. 비록 그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내공을 소실할 테지만, 응축된 그 진기는 형님 못지않은 순도를 자랑하겠지.”
“…….”
“그 정도 농도라면 자네가 흡수하기도 쉬울 것이네. 어떠한 영약보다도 가치 있는 힘이 될 테지.”
“……대체 왜요?”
“그렇게나 이유를 알고 싶나?”
“말했듯, 나는 찝찝한 건 죽어도 못 참는 성격이오. 내공이란 무인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인데, 그 소중한 것을 어찌 타인인 내게…….”
“자네가 타인이기 때문이야.”
“무슨 뜻이오?”
“타인이고, 거칠고 무례한 성격이지만 그 본질은 협과 정의로 가득 찼음을 알기 때문이야.”
탐경이 범오를 보았다.
“범오, 저 녀석은 내가 부담을 지우지 않아도 잘 성장할 것이네. 굳이 내 몫이라고 할 것도 없고, 실제로 반야까지 깨달았지.”
범오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탐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다르다네. 자네에게는 도움이 필요해.”
“나는…….”
“자네가 당대 백도 무림의 핵(核)이라면서?”
“……?!”
“왜? 세상과 연을 끊은 늙은이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 게 놀랍나?”
“그렇지 않소. 백도 무림의 핵이라니, 당치도 않은…….”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네 성격을 생각하면 앞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싸움을 해 나갈 테지. 그리고 사람은 언젠가 패배의 쓴맛을 경험하게 되네. 안타깝게도, 패배의 순간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
탐경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겁이 난다네. 늙을 대로 늙은 주제에 죽음이 겁난단 말이야. 그래서 다시 세상에 나가기 싫네.”
이번의 눈이 깊어졌다.
세상에 나가기 싫다? 그렇지 않다. 탐경의 마음에는 여전히 세상에 뛰쳐나가 마음껏 천하를 질타하고자 하는 열정이 숨어 있었다.
다만 탐경은 인정했을 뿐이다.
그것이 한때의 꿈이요, 추억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세상에 나가 봤자, 과거처럼 열정을 불사를 수 없다는 것을.
고작 보람을 느끼는 정도로, 그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주먹을 드는 것은 그 자신에게 불순한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한데도 말일세, 이놈의 힘이라는 것이 자꾸만 내 가슴에 불을 붙이지 않는가 말이야. 나는 이미 나의 삶을 선택했는데,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번뇌를 일으켜 자꾸 한숨을 쏟아 내게 만든단 말이지.”
“…….”
“나는 그것이 싫네. 이 내공과 소림의 무공은 더 이상 내게 필요치 않아. 나는 비록 소림의 무(武)를 상징하는 나한당주였으나, 이제는 중생 구제를 위하여 남은 생을 바친 덜 떨어진 땡중에 불과할 뿐이네.”
탐경의 눈은 그 어떤 때보다도 맑았다.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이해한, 또 하나의 각자(覺者)로서 보여 줄 수 있는 혜안(慧眼)이었다.
“이 일이 정녕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네. 삼백 년 동안 윤회의 비밀을 풀지 못하고 부처님의 곁으로 가신 무수히 많은 선사분들과 똑같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지.”
“…….”
“그래도 나는 나의 선택에, 나의 과거에, 앞으로 다가올 나의 미래에 불만이 없네.”
한참 동안 탐경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정녕 그 힘을 버리고 싶다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주시오.”
“싫네. 난 자네에게 주고 싶네.”
“나 따위보다 훨씬 정의롭고 의협심 충만한 사람이 많소.”
“당연하지. 오만하지 말게. 천하에서 자네가 가장 뛰어나서 준다는 게 아니니까.”
“…….”
“나는 그저, 자네가 이 힘으로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
탐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게다가 우리 불문은 자네 사문에 빚이 있어. 사방무제가 이곳에 남긴 화두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이곳에서 생을 불사를 일이 없었을 것이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빚이 아니라 애증 아니오?”
“뭐가 되었든.”
결국 더 대화가 이어져 봤자 같은 얘기만 반복될 것이다.
누군가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 결단을 내릴 사람은 연호정일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탐경의 눈을 직시하던 연호정이 재차 한숨을 쉬며 말했다.
“노인장이 원해서 주는 것이오. 그 힘을 주었다고 내 삶에 관여하는 것은 사절이오.”
“나 바쁜 몸일세. 가능성 넘치는 후학에게, 이제는 필요 없어진 칼 한 자루 던져 줬다고 내 사람이라 생각하는 멍청이도 아니야.”
“그 말은 참으로 반갑소.”
“다만 말했듯, 혼란의 순간 선택해야 할 때가 다가오면 이것만 기억해 주게. 선하고 정의로운 피가 흐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을, 부득이한 상황이라면 무고한 피를 조금이라도 덜 흘리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임을 기억해 주게.”
“그런 건 노인장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고민하고 있소.”
“허허허, 그래서일세. 그래서 자네에게 이 힘을 주려고 하는 게야. 쓸모없어진 힘이라도 잘 쓸 만한 사람에게 주는 게 나을 테니까.”
탐경은 그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진기를 가공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걸세. 기다리는 동안 자네도 내부를 다스리게. 절반 이상이 날아간 힘이라도, 그 순도가 높아서 쉬이 받아들이긴 힘들 게야.”
“제길, 배도 안 고픈데 성찬을 차려 주는 격이로군.”
연호정이 탐경의 맞은편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렇게 연호정은 뜬금없이 생각지도 못한 힘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 힘이 연호정의 무공에 대단한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연호정의 삶에 있어서만큼은 분명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연호정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많았다.
가족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공공대사나 승현진인 역시 연호정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소림의 전전대 고수이자 소림 역사상 최강의 나한당주였다는 탐경도 연호정에게 자신의 힘을 넘겨주려 하였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연호정이 가진 가장 큰 힘일는지도 모른다. 깨달음을 얻은 이들로 하여금 그냥 지나칠 수 없도록 만드는 힘, 천하를 논하는 이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기이한 존재감.
어둠으로 가득했던 흑암의 제왕에게, 눈부심 가득한 백색의 세계에서 초대장을 보내는 이들.
흑과 백, 밝음과 어두움 사이를 거닐며 천하의 혼란을 바로잡으려 하는 한 청년의 역사가 격동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