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흔들림 (1)
모용우는 바빴다.
맹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특히 이곳에서는 더더욱 바빴다.
이번 작전으로 이백이 넘는 전우를 잃은 탕마군은 그야말로 훈련에 목숨을 걸었다. 이전에도 독한 훈련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아예 삶과 훈련이 하나가 된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탕마군의 훈련이 끝나고 나면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부터가 모용우의 훈련 시간이었다.
그의 수면 시간은 두 시진으로 고정되었으며, 한 번 훈련할 때 모든 내공과 근력을 쥐어짜 탈진할 때까지 몰아붙였다.
그러고도 쉬는 시간은 없었다. 연호정과 회의할 때가 아니면 강호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에 열중했고, 그래도 시간이 비면 책이라도 한 줄 더 읽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 아니었다. 몸과 머리에 뭐든 집어넣으면, 그 모든 것이 훗날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활도 어느새 한 달을 넘어 두 달에 다다랐다.
“후우우.”
쩡!
탕마대검의 검첨이 땅에 박혔다.
모든 내력을 쏟아붓고, 낼 수 있는 모든 근력을 소모했다.
평소에는 회초리처럼 가벼웠던 대검이 철 기둥을 드는 것처럼 무거웠다.
숨을 몰아쉬며 납검한 그가 일순 기우뚱거렸다.
‘좀 심했나?’
평소에도 뒤가 없이 힘을 쏟아부었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던 모양이었다. 중심을 잡을 극히 미약한 힘조차도 없었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모용우는 곧장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거듭했다.
그렇게 반 시진 뒤.
“이제 좀 살겠군.”
그릇을 채우려면 일단 그릇이 비워져야 한다.
그렇게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한 그릇은 더 크고 단단하게 여물기 마련이다. 바로 모용우의 몸과 단전이 그러한 반복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공 양도 내공 양이지만, 축기의 속도가 두 달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매일매일 한계를 맞이한 육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진기를 더 탐욕스럽게 빨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익숙해지니 한 호흡으로도 수십 번의 참격을 날릴 수 있게 되었다.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건 아니지만, 이 역시 무인에게 있어 크나큰 선물이었다. 노력으로 얻은 최고의 보상이라 할 수 있겠다.
“괜찮아?”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도 모용우는 놀라지 않았다. 운기 도중 그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왔는가?”
고개를 돌리니, 달빛을 등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연호정이 보였다.
‘…….’
문득 모용우는 연호정의 모습이 무척이나 신비롭다고 생각했다.
차갑고도 안락한 월광을 등진 동생의 모습은, 그야말로 별세계에서 날아온 신비인(神祕人)의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하긴.’
모용우는 속으로 납득하고야 말았다.
‘연제의 존재감은 언제나 그러했다.’
별빛 가득한 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세상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답답했던 지난날의 내 상황과 같구나.’
왜인지 모르겠지만, 과거 연호정을 만나기 전이 떠올랐다.
형제들과의 권력 싸움에 밀려 절강에서 상단을 이끌던 그때.
그때 그의 심정은 그야말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누구도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지 못했고, 알아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호정은 바로 그런 때에 나타났다.
그 어둠이 극에 이르러, 별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는 무저갱으로 변하기 직전에.
‘참으로 건방졌지.’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야밤에 찾아와서는 백도의 거인이 되라느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느니 호통이란 호통을 다 들었더랬다.
초면인 사람에게 뱃속이 뒤집히는 질책을 들었다. 모용우도 사람인데 어찌 기분이 상하지 않았겠느냐마는, 동시에 자신을 그렇게까지 울컥하게 한 사람은 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자신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때가.
연호정이 무언가를 해 주어서가 아니라, 그 호통에 실린 진심 어린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연호정의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논리를 떠나, 꽤 낮은 목소리인데도 묘하게 사람의 감정에 불을 붙이는 마력이 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참.’
지금처럼, 연호정은 언제나 느닷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났고, 또 갑작스레 사라졌다.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이 거칠고 흉흉한 무림에서도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더니,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천하에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연호정에게 의형제를 맺자고 한 것도, 외로움이라는 감정 외에 인간적인 끌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그러한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러한 의동생과 함께 천하를 위해 세상을 질타하고 있었다.
문득 깨달은 그 사실이 모용우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떠오르게 했다.
“뭐야? 그 웃음은?”
연호정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말일세.”
“오랜만은 무슨.”
“연제는 그게 문제일세. 하도 바쁘게 지내니 시간 감각이 없어. 그때도 술 한잔하자고 했더니만, 깜빡 잊고 오지도 않았지?”
“술? 언제?”
“거보게. 기억도 못 하잖나.”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그랬다면 미안하구먼. 진짜 정신 좀 차려야겠어.”
“미안할 필요는 없네. 다만, 연제가 아무리 고수라도 휴식은 필요해. 그러다 정말 과로로 죽겠네.”
“섬뜩한 소리 들으러 온 거 아니야. 일단 내가 온 건…….”
“그만.”
모용우가 손을 들어 연호정의 말을 막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연호정은 입이 턱 닫히는 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농담이랍시고 한마디 던질 만도 한데, 오늘의 모용우에게는 어쩐지 장난을 치기가 힘들었다.
“밥은 먹었나?”
“반나절 전에 먹었지.”
“그럼 못 지킨 약속이나 지키시게. 조금만 기다려. 술상을 봐 오지.”
가만히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디 탕마군장의 요리 솜씨나 볼까?”
“하하하!”
모용우가 다시 돌아오기까진 이각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제법인데?”
“음?”
“솜씨가 꽤 그럴듯하잖아?”
술상 위에는 조촐한 요리 두 가지와 독한 화주 세 병이 놓여 있었다.
냄새만으로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채소볶음에 말린 육포를 불려 만든 고기 요리지만, 어지간한 객잔에서 파는 것보다도 향이 좋았다.
모용우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향신료 덕분이네. 재료의 질이 나쁘면 양념으로 속이는 수밖에.”
“속일 줄 아는 것만도 대단한 거야. 난 이렇게는 못 해.”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굳이 요리까지 섭렵할 필요가 있겠는가?”
“왜? 요새는 남자도 요리를 잘해야 색시한테 귀염받는다고 하던데.”
“호오.”
모용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좋아하는 처자라도 생긴 겐가?”
“언젠가는 생기겠지. 하긴, 그것도 문제야. 내가 좋아해도 상대가 안 좋아하면 말짱 꽝이잖아. 그런 거 보면 참 관계라는 게 힘들어.”
“차마 걱정 말라는 말은 못 하겠군. 자네 명성이라면야 수많은 처자들이 눈독을 들이고는 있겠지만.”
“이름 좇아서 혹하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싫어해.”
“그래서가 아닐세. 천하제일고수도 칼질에서나 천하제일이지, 사람 사귀는 데에도 천하제일이라던가? 관계란 쌍방이야. 자네가 아니라 자네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도 관계에서의 고민은 어쩔 수 없다고 보네.”
“상담 시간이었나?”
“그냥 그렇다는 말일세. 언제고 연제에게도 연심을 부르는 처자가 생길 텐데, 그때는 이것저것 재지 말고 솔직하게 대하기를 바랄 뿐이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형님은? 당 소저가 아직 눈에 차지 않나?”
모용우가 피식 웃었다.
“언제 적 소리를 아직도 하나?”
“호오? 언제 적 소리라? 뭔가 있기는 있었나 보네?”
“그런 거 없네. 서로 바쁘기도 오죽이나 바빴고. 게다가 나나 당 소저나, 부자연스럽게 이어진 관계를 좋아하지 않더군.”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나중에 귀맹할 때 가서 차라도 한잔하자고 그래.”
“하하, 알겠네.”
모용우의 장점은 바로 이 넉넉함에 있었다.
아무리 친한 동생이라도 이렇게나 말을 툭툭 던지면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할 만한데, 모용우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성품 때문에 연호정도 편하게 그를 대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연호정이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 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 모용우였다.
“말이 길었군. 일단 한잔할까?”
“뭐, 그럽시다.”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꽤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관계가 깊으니 술도 독하게 느껴졌다. 독하지만, 그 독함이 좋았다. 자주 마셨다면 이렇게 진한 술맛을 느끼긴 힘들었으리라.
모용우가 담담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어인 일로 찾아왔는가?”
편안한 자리에 편안한 물음이었다.
마음이 다소 날 서 있었던 연호정도 그 편안함에 쌓아 두었던 부담이 녹는 것을 느꼈다.
“무림맹 수뇌부 쪽에서 일이 터졌어.”
“어떤?”
연호정은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등 봉공님이라면…… 설마 형님께서?”
“모용군은 아니야. 물론 확신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난 아니라고 봐.”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
“호랑이나 늑대나, 생김새는 달라도 송곳니 달고 사는 건 똑같아. 비록 모용군의 송곳니에는 독이 묻었지만, 아무 때나 이빨을 드러내는 주둥이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독한 평가임과 동시에 고평가이기도 했다. 적어도 공동의 적이 있는 상황에서의 모용군은, 믿을 수 없는 적보다는 능력 좋은 아군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으음.”
모용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등 봉공께서는 공동파의 장문인일세. 공동파는 감숙에 있어. 감숙에서 공동파의 위세는 제일이라 할 만하지.”
“즉, 그 정도 정보를 얻어 내는 게 이상하진 않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
“동시에, 이상하다고도 생각하네.”
“어떤 부분에서?”
모용우는 마치 지나가는 얘기를 하듯,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그리 허술하게 정보를 흘릴 만큼 얼빠진 조직이, 어떻게 수십 년간 중원에 세작을 심고 황궁과 관부까지 건드리고도 걸리지 않았겠나?”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이래서 똑똑한 사람하고는 얘기가 편해.”
“연제는 어찌 생각하는가? 누군가가 그 정보를 흘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나?”
“한없이 십 할에 가까운 확률이라고 보기는 하지.”
“그렇다면 그것 또한 이상하군.”
모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이 상황에서 정보를 흘렸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인가?”
“노림수 이전에, 이 상황에 그런 정보를 흘릴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해 논해 봐야겠지.”
“……!”
모용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이 잔을 비웠다. 이제는 술이 독하지 않았다.
가만히 연호정의 얼굴을 보던 모용우가 떠듬떠듬 물었다.
“연제 말은, 봉공 중에 세작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인가?”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삼교의 정체를 봉공회의에 알리지 말라고 했던 거고.”
“……!!”
“이제는 확실하다고 봐야겠군. 봉공, 혹은 봉공과 지극히 가까운 관계를 맺은 사람 중 삼교의 세작이 있어.”
“……이런.”
의심은 했지만, 막상 그 사실이 진짜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모용우는 기가 막혔다.
어중간한 수행자들이 아니라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다. 그만한 거인들 중에 세작이 있다니? 대체 명예와 자존심은 어디로 팔아먹었단 말인가?
혼란 가득한 모용우에게 연호정이 말했다.
“조만간 맹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래야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모용우는 순간 흠칫했다.
“설마, 연제 혼자 말인가?”
“그래.”
“…….”
“그래서 온 거야. 조만간이겠지만, 정확히 언제일지는 모르겠어. 그러니 언젠가 내가 훅 사라져 버려도 당황하지 말고 의정군을 이끌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느닷없이 나타나더니, 또 느닷없이 떠날 수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감당키 힘든 녀석이 아니던가. 일의 심각함을 떠나, 자신이라면 절대 이렇게는 못 살 것 같았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용우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부탁이 웬 말입니까. 그저 명령만 내려 주시면 됩니다.”
“…….”
“다만, 사지 멀쩡히 돌아오십시오. 부하들 걱정시키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