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45화 (444/963)

445화. 검(劍)에 실린 미래 (7)

“뭐라고?”

제갈문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가득상이 직접 보낸 개방의 삼결제자는 현재 의정군의 상황과 광동의 정세, 나아가 보타암의 한 지파가 접근해 온 일까지 전부 소상히 전달했다.

“보타…… 보타의 지파 하나가 연 대수에게 갔다라…….”

보타암 세 지파 중 하나인 연화문(蓮花門)의 대표와 후계가 호남 묵룡부 쪽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공공대사에게 먼저 말했고, 사안이 사안인지라 봉공회의에선 아직 밝히지 못했다. 조만간 밝히겠지만, 워낙 시국이 어지러워서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물론 그 때는, 공공대사가 보타암에 넣은 서신에 대한 답장을 받은 이후가 될 것이었다.

‘한데 연 대수에게 또 다른 지파가 향했다?’

제갈문호의 검지가 탁자를 연신 두들겼다.

‘도대체 왜?’

의정군장, 무림맹 통합 유군 부대의 좌장인 연호정의 명성은 꽤 대단했다.

연배를 생각하면, 그 젊은 나이에 이만한 명성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무림맹이 한 청년 고수를 지나치게 밀어주는지라 어느 정도 거품이 끼어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당연히 오해였다. 연호정의 능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중원에 퍼진 벽산호장의 명성은 축소되어도 한참 축소된 감이 있었다.

뭐가 되었든 연호정의 명성은 후기지수 중 제일이었다. 그러나…….

‘연 대수 개인에게 뭔가를 부탁하러 갔을 리는 없다. 오히려 연 대수를 통해 본맹에 뭔가를 부탁하려 했다면 모를까.’

연호정의 명성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그래도 그는 후기지수다.

말하자면 무림맹이라는 집단의 명성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했다. 성천의 강자라도 개인이라면 집단의 명성을 이길 수 없다.

한데 보타암의 또 다른 지파, 천안문(千眼門)의 대표와 문의 후계가 연호정에게 갔다?

‘둘 중 하나다. 연 대수를 구워삶아 보려는 의도이거나, 아니면…….’

중간에서 누군가가 장난질을 쳤거나.

가능성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다소 과격하게 생각하면 연호정과 보타암이 무림맹 모르게 과거부터 모종의 연을 맺어 왔다고까지 상상할 수 있다.

당연히 제갈문호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들은 죄다 접었다. 연호정의 대한 신뢰 이전에, 그처럼 똑똑한 사람이 저지를 일이 아니었다.

‘보타암의 지파는 셋. 그중 연화문은 묵룡부로 향했고, 천안문은 연 대수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면 남은 하나는?’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정보가 너무 부실했다. 애초에 불문에 속한 문파라, 문 내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음에도 제대로 파 보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보타암은 불문이나 맹회 소속이 아니었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악랄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자체 조사를 벌이는 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뭐가 되었든 보타암에서 터진 갈등이 생각보다 큰 모양이야. 연 대수 이전에, 소속 지파의 대표가 묵룡부에 들렀다는 것 자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제갈문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네.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방도가 품에서 작은 서신 하나를 꺼냈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었음에도 서신은 깨끗했다.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후개가 말씀을 전한 뒤, 이 서신도 함께 전하라 하였습니다.”

“그렇구먼.”

“그럼 저는 이만.”

“고맙네.”

개방도가 나가자 제갈문호가 곧장 서신을 펼쳤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하여, 저와 연 대수 모두 이 사태에 묵룡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물증은 없지만, 묵룡부주에게 직접 서신이 온 것을 생각하면 정황상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보타암이라는 문파의 특수성과 묵룡부와의 명확한 인과 관계가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조사를 하다가는 정치적 압력을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이 부분, 정리하여 명을 내려 주시면 개방의 단독 작전으로 파 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이런 일이 있었군.

제갈문호의 머리가 다시 빠르게 돌아갔다.

‘보타암…… 보타암의 상징은 검후다. 묵룡부주의 무공이라면 천하의 검후라도 무서울 리는 없을 터, 하물며 집단의 힘으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 만약 묵룡부주가 정말로 보타의 분란을 조장했다면, 그 이유는……?’

순간 제갈문호는 탄성을 질렀다.

“확실히, 지금의 묵룡부라면 검후의 존재가 달갑지 않을 만도 하지.”

보타의 최종 후보가 검후의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공 외에 선과 악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검후 후보는 세대마다 중원에 나왔고, 아무도 모르게 선을 쌓고 악을 참한 후 다시 보타암으로 돌아갔다.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무림맹 고위급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정하고 존재를 숨긴 여검수가 참악의 결단 아래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간 협행을 한다. 무공으로는 이미 완성형에 도달한 후보인 만큼 자신을 숨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제갈문호 역시 공공대사에게 듣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

‘묵룡부는 신생 연합체다. 양천이라는 거물의 존재감이 워낙 대단하긴 하지만, 하나의 단체로 보았을 때 아직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하긴 힘들어. 그것은 철저하게 세월에 맡겨 둘 수밖에 없을 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무력과 금력이 충분하다면 하나의 단체를 세우는 일이 쉽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가능이야 하다. 문제는 지속이었다.

한 세대만 반짝이고 사라질 것이냐, 수백 년을 이어 갈 것이냐는 해당 문파의 권위와 성격, 지향점에 따라 결정된다.

오랜 세월 동안 어떤 평가를 받아 왔는가. 어느 정도의 힘을, 어떤 목표로 사용하는가.

시간은 물론 시운(時運)도 맞아야 하며, 민심과 다른 문파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묵룡부는 아직 세상에 보여 준 것이 많지 않았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흑도의 나쁜 인식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후 후보가 악을 처단하겠답시고 세상에 나온다면?

‘무조건 도전을 받을 것이다. 검후 후보 역시 자신의 힘과 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흑도 연맹인 묵룡부를 지나칠 수 없을 터. 누가 패배하게 되든, 양천에게 있어서는 도전을 받는 것 자체가 위엄을 상실케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세상과 드잡이질을 하며 살아온 무적의 싸움꾼 양천.

제아무리 검후 후보의 무공이 대단해도 양천을 넘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양천도 검후가 무서워서 보타암을 그 지경으로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묵룡부의 영향력이요, 존재감일 터였다.

‘역시 양천. 거기까지 들여다볼 정도라면, 정말이지 보통 인물이 아니야.’

아직 확실한 물증은 없다지만, 제갈문호는 이미 보타암의 갈등 뒤에 양천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군사에게 있어 물증 없는 확신은 위험천만한 선택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번 일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연호정과 가득상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그렇게 가정하고 움직이자. 그렇다면 의문점이 하나 남는데.’

양천은 세 지파 중 하나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 그리되면 그 지파에서 검후가 탄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나아가 묵룡부와 보타암은 한편이 될 수 있다.

달리 말해, 보타암의 분란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한데도 양천은 연호정에게 서신을 보내 보타의 지파 하나를 잘 받아 내라고 하였다.

대체 무슨 이유로?

‘보타암을 손에 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야.’

그렇다고 보타암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것도 목적이 아니다. 보타암을 지워 버릴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직접 쳐들어가 관계자 모두의 목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양천에겐 그 정도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보타암을 이용해 뭔가를 하겠다는 수작.’

본디 군사는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정황과 개인의 성격, 위치, 시국의 흐름 등을 읽고 한 수 앞을 내다볼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경험과 직감으로 한 수 앞을 예측하는 연호정과 달리 제갈문호는 확실히 군사다운 군사였다.

제갈문호는 재빨리 서신을 썼다.

‘지금은 섣불리 움직일 때가 아니외다, 양 부주.’

등천교의 폭탄 발언으로 무림맹 수뇌부의 분위기가 살얼음판처럼 싸늘해졌다.

이미 삼교의 존재가 모두에게 까발려진 상황. 만에 하나라도 양천이 보타암을 이용해 삼교를 어찌 해보겠다는 심산이라면, 흑백의 도(道) 이전에 무조건 막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밖에 있느냐?”

“예, 군사님.”

문이 열리고 군사부의 무사가 들어왔다.

제갈문호가 서신 두 장을 건넸다.

“이것은 후개에게 전하고, 이것은 호남 묵룡부의 정보단으로 흘리거라.”

“……예?”

“시간이 없다! 어서!”

“아, 예!”

무사가 서신을 챙겨 방을 나섰다.

제갈문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태가 제법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여유롭게 집무실에 앉아 업무나 살필 때가 아니란 말이다.

의관을 갖춘 제갈문호가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모용군의 거처였다.

* * *

범오의 일갈과 불문 기공의 여파에 충격을 받은 화운은 피눈물을 쏟아 내다가 기절해 버렸다.

기절한 화운은 사흘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했다. 내상을 입는 등 몸에 무리가 간 것은 아니었지만, 범오의 반야대능력이 그녀가 연성한 불문 기공을 뒤흔들어 중단전에 깃든 혼란을 걷어 냈기 때문이다.

외부의 힘으로 흔들린 중단전은 상단전까지 치고 올라가 심혼에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당분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나저나, 새삼 대단하구려.”

연호정의 말에 차를 마시던 범오가 눈을 끔뻑였다.

“무슨?”

“저만한 강자가 사흘째 정신을 못 차리다니. 범오 스님의 사자후가 어지간히 위력적이었던 모양이오.”

범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반야대능력은 불문 최고의 신공 중 하나라오. 항마불기를 익힌 자, 누구라도 반야의 힘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지.”

“호오.”

“다만,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잘못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술수였소.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면, 반야의 힘도 무용지물이었을 거요.”

사자후는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일갈(一喝)로써 번뇌를 뒤흔드는 깨달음의 소리다. 물론 시전자의 내공력과 깨달음이 남달라야 그 효력도 제대로 나오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나중에 일어나면 예전과는 좀 달라지겠소이까?”

“그 또한 모르는 일이오. 일갈로 깨달음을 얻게 할 수 있다면 세상에 각자(覺者)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런 것은 부처님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외다.”

“하긴.”

“난 그저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번뇌에 균열을 일으켰을 뿐, 결국 모든 것은 본인에게 달려 있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정말, 어엿한 스님 같소이다.”

범오가 멋쩍게 웃었다.

“연 대수에게는 정말이지 못난 모습을 많이 보였소.”

“인간미 넘치고 좋던걸, 뭐.”

“허허허.”

두 사람이 평온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이었다.

“연 대수!”

창가 저 멀리서 가득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오?”

“군사께 연락이 왔소! 한데…….”

“음?”

어느새 창가 앞에 도달한 가득상의 얼굴이 시름으로 가득했다.

“봉공회의에서 삼교의 존재가 알려졌다 하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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