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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42화 (441/963)

442화. 검(劍)에 실린 미래 (4)

이곳 장원은 기식이 엄엄했던 옥청의 몸을 봐주던 의원, 백지신의의 거처였다.

백지신의는 중원 여러 곳에 이런 장원을 갖고 있었다.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지만, 각지를 떠돌며 환자를 볼 때 사용하곤 했다.

그리고 연호정의 부탁에, 백지신의는 흔쾌히 장원을 빌려주었다. 그는 여러모로 연호정에게 호의적이었다.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아무거나 준비했소이다.”

연호정은 직접 차를 탔다.

차를 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찻잎을 섬세하게 우려내는 것은 어려웠다.

당연히 연호정은 차를 섬세하게 우릴 줄 몰랐다. 그저 느낌대로 찻잎을 덜고, 물을 부었을 뿐이었다.

화운이 입을 열었다.

“향이 아주 좋습니다.”

“그리 느끼셨다니 다행이오.”

어찌 되었든 무림맹의 높은 사람이 직접 차까지 타 주었다. 초면에 살벌한 비무를 벌였지만, 적어도 체면을 챙겨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연호정에 대한 화운의 첫인상이었다.

‘초면의 무례함은 있었으나, 또 이런 면에서는…….’

기실, 세상을 알기 시작한 지는 그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다만 이 풍진강호에 얼마나 많은 위선자가 있는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악인이 존재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본 사람들은 상당히 알기 쉬운 이들이었다. 오만함이나 비겁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이들, 그들 대부분이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성품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쉽다. 표정에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니까.

그보다 더 대하기 어려운 악인들은 스스로를 숨길 줄 아는 자들이었다. 웃지만 속으로는 칼을 품은 이들. 상대의 약점을 건드리며 철저하게 이득을 뽑아내려 하는 이들.

불과 몇 년 만에, 화운은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 보았다.

‘적어도 이자는 그런 부류는 아니로군.’

연호정은 독특했다.

오만한 것 같지만 악인의 그것과는 달랐고, 나름의 예의를 차렸지만 자신을 낮추지는 않았다.

무공 역시 정안이 손쉽게 밀릴 정도로 뛰어났지만, 그렇다고 잘난 척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표정에 어떠한 감정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화운은 직감했다. 오늘의 이 만남은 가벼운 마음으로 진행되어선 안 되는 거라고.

상대는 어리지만, 지금껏 자신이 봐 왔던 어떤 사람보다도 대하기 어려운 이였다.

“벽산호장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분이시지요?”

“그렇소.”

“당대 무림에서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화운의 말투는 몹시 공손했다. 연배나 배분을 생각하면 쉽게 나오기 힘든 말투였다.

그녀의 성격을 떠나, 평생을 입에 달고 산 말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순한 마음에 짙은 욕망이 드리워졌을지언정, 적어도 배우고 익힌 공부는 잊지 않은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허명일 뿐이오. 세상에 강자는 많소. 당장 이 소저만 봐도, 무림에 나서면 만인의 찬사를 받을 만한 무공의 소유자가 아니오?”

솔직한 평가였다. 연호정이 보기에, 정안의 무공 수위는 묵비에 필적했다. 서로의 장기가 다를 뿐, 우열을 가리기 힘든 무위였다.

화운이 미소를 지었다.

“저희 지파의 후계자를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랑 같겠지만, 정말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이해가 가오. 다만, 선을 넘는 얘기일 수도 있으나 무공보다는 성품에 더 눈이 가는구려.”

“네?”

연호정이 정안을 보았다.

정안은 말없이 연호정을 마주 보았다. 동년배와의 비무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은 맑았다.

“손을 섞어 보니, 이 소저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소.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피를 토하는 수련과 궁구 없이는 이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긴 어렵지요.”

“아, 그렇지요.”

“호승심도 있고 욕심도 있소. 그 마음이 삿되지 않고 순수하게 무(武)를 향해 있음이 기껍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미소였다. 평소 여유가 있으면 지인들과 농담 따먹기도 곧잘 하는 그였지만, 이렇게 순하게 웃는 모습은 쉽게 보기 힘들다.

“나야 불법에 귀의하지 않았으니 그쪽으로는 영 문외한이지만, 적어도 소저의 마음이 누구 못지않게 깨끗함을 느꼈소. 배움이 출중하고 자신의 주관도 뚜렷하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셈이 아니겠소?”

정안이 고개를 숙였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나는 느끼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오. 무공의 성장보다도 어려운 것이 자신의 마음을 가꾸는 일, 부디 소저의 마음에 습한 욕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길 바라오.”

누가 들어도 빈말로 하는 칭찬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진심은 통하는 법. 정안은 연호정의 평가와 조언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연호정이 다시 화운을 바라보았다.

“그래, 본맹의 정보 고문께 미리 듣기는 했소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것이 좋겠지. 어인 일로 이 사람을 찾아오셨소?”

다르다.

평소 연호정이 사람을 대하는 모습과 지금의 모습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상대도 상대지만, 보타암 측에서는 자신을 무림맹의 대표로 생각하고 온 길이었다. 제아무리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연호정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 역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적에게는 가차 없지만, 아직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상대에게까지 무자비하게 나갈 필요는 없다. 연호정은 자기 나름의 중도(中道)를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얘기를 들으셨다니 대화의 진행이 빠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이경청하겠소.”

“본 사찰은 그간 세상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이유와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오늘의 대화에 다소 불필요한 부분이라 사료되어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계속하시오.”

“하나 본 사찰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많은 이들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하여 보타 역시, 수백 년 전통을 깨고 세상에 나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랬구려.”

“그렇습니다. 다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찰이라 해도 강호가 거칠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강호 무림이 본 사찰을 어떻게 보는지도, 조금은 알고 있지요.”

화운의 눈이 빛났다.

살상용이 아닌 깨달음의 도구로서 검을 선택한, 그 검에 실린 자아를 확인하며 불법을 탐구하던 각자(覺者)의 제자가 속인(俗人)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보타암은 대대로 검후를 상징으로 삼는 문파였습니다.”

본 사찰이라는 말이, 어느새 문파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문파에 있어, 조직의 정의와 미래를 세우기 위해 힘이 있어야 함은 필수겠지요.”

“그렇지요.”

“더군다나 보타암은 세 개의 지파가 이끌고 있었습니다. 지파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한 식구나 다름이 없지요. 지파마다 대대로 검후를 배출했으나, 그것은 문파의 상징이었을 뿐 실질적인 힘으로서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보타암이 미래를 위해 변화를 꾀한다면, 검후의 존재 의의도 달라져야 합니다. 동시에 보타의 조직 체계 역시 바뀌어야 하지요.”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무림맹이 저희 지파를 지지해 주기를 바랍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연호정은 말없이 화운을 보았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을까? 화운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놀라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귀 맹 측에도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실질적인 힘에 있어서 저희 지파가 최고라 할 순 없지만, 이 아이의 잠재 능력과 장로들의 힘을 모으면 맹 측에도 능히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힘이 될 수 있다…….”

“그렇습니다. 보타의 고수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어릴 적부터 평등한 교육을 받습니다. 검을 쥐고 수련하며, 동시에 불법을 배우지요.”

“…….”

“그러나 불검(佛劍)은 혜검(慧劍), 혜검은 곧 깨달음입니다. 감히 자신하건대, 수는 적어도 장로들의 깨달음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지파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즉, 소수 정예라 할 수 있다는 말씀이로군.”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만일 맹 측이 우리 지파를 도와 이 아이를 검후로 세우는 데에 일조해 주신다면, 우리 지파는 무림맹과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맹이 나서기 힘든 일을, 저희가 처리해 줄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얘기가 지속될수록 연호정의 눈은 깊어져만 갔다. 동시에 정안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안타깝게도 화운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스스로의 말에 심취한 그녀의 눈에는 장밋빛 미래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 입으로 하기 부끄러운 말이지만, 강호가 보타를 제법 높이 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민간에서는 보타를 신성시하는 이들도 상당하지요.”

“…….”

“무림맹은, 우리 보타와 손을 잡는 것만으로 민심을 나눠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실질적인 무력보다도 더 큰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구려.”

“그렇습니다. 물론 호장께서 보시기에, 굳이 저희 지파와 손을 잡을 필요가 있을지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습니다.”

화운이 정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안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어깨에 닿은 사고의 손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그 뜨거움은 체온이 아닌 욕망이었고, 서서히 발아하기 시작한 광기이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다른 두 지파 중 하나에, 이 아이보다 높은 경지를 구축한 후보가 있습니다. 그 후보의 무력은 이미 우리 장로를 넘어설 정도지요.”

“…….”

“다만 그 후보의 마음은 연약하기 짝이 없어, 강호의 세파를 이겨 내기가 몹시 힘듭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본문은 물론 무림맹에도 해가 될 수 있을 존재지요. 그러나 이 아이는 다릅니다.”

화운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 차를 생각하면 이 아이 역시 그 후보에 뒤지지 않고, 순후함과 강단에 있어서만큼은 모두를 압도합니다. 맹에서 이 아이를 지지해 준다면, 보타암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말씀 중에 죄송하오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소?”

“아, 얼마든지요.”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귀승께서 생각하시기에 보타암은 사찰이오? 아니면 문파요?”

“네?”

“보타암의 정신은 무엇이오? 순수한 힘을 추구하오? 아니면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목적이오? 그도 아니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은 것이오?”

화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부처를 모시는 저희가 순수한 힘을 추구하겠습니까? 그저 세상의 정의를 바로잡고, 더 많은 민초들을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함이지요.”

“그 방법은 무엇이오?”

“네?”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운다, 더 많은 민초를 고통에서 구제한다. 그 뜻은 실로 갸륵하오만, 귀 사찰이 어떤 방법을 통해 그와 같은 대의(大意)를 이룰지 궁금해서 말이오.”

화운은 잠시 당황했다. 설마하니 이런 질문이 날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의 질문은 이제 시작이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모양이구려. 하면, 이왕 말이 나왔으니 실례인 줄 알아도 몇 가지 묻고 싶소.”

“어떤……?”

“다른 정의로운 문파들은 힘이 없고 목표가 불순해서 평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하시오?”

“……?!”

“수백 년 강호의 역사를 장식했던 정의로운 문파들은, 보타암보다 못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소이까?”

화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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