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검(劍)에 실린 미래 (2)
격식 있는 인사는커녕 시작이라는 말도 없었다.
쩌어어어어엉!
발검, 출수, 참격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멋들어진 일검, 그 일검을 막아 낸 광룡부에서 은은한 잔떨림이 일었다. 빠르고 호쾌한 일검에는 무시 못 할 무게감까지 실려 있어, 어지간한 고수는 방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매서웠다.
하지만 연호정은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었다.
이미 그 실력이 대문파 장문인 이상, 무신(武神)의 영역이라는 무극지경을 코앞에 두고 있는 초절정고수였다.
쩌어어엉!
정안의 눈이 흔들렸다.
‘무겁다!’
반쯤 흘려 내지 않았다면 팔목, 팔꿈치, 어깨뼈가 차례대로 탈골되었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확 들었다.
‘장난이 아니구나!’
자신의 첫 일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내리란 것 정도는 예상했다. 이번 일검은 예식 없이 내지른, 말하자면 인사에 가까운 검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그것조차도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검격을 튕겨 냄과 동시에 곧장 후려치듯 도끼를 휘두르는데, 그 힘이 상상을 초월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화운 역시 연호정의 과격한 공격에 놀란 듯 눈빛을 굳혔다.
파아아악!
여유롭게 물러났던 정안이 다시 한번 연호정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연호정의 공격에서 의지를 느꼈다. 장난으로 덤비지 말라고. 너의 모든 것을 보여 주라고.
그러고도 자신을 넘지 못할 거라는 절대적인 자신감을 느꼈다.
정안의 검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퍼어어어엉!
일직선으로 쏘아지던 검격이 일순 강렬한 폭음과 함께 화려한 움직임을 보였다.
허공에 수십, 수백 개의 검영(劍影)이 생겨났다. 그 검격이 아우르는 범위는 실로 엄청났다. 마당 전체를 에워싼 검의 감옥이 치명적인 날카로움으로 연호정을 노리고 있었다.
단 두 합 만에 자신의 진신절기를 꺼내 든 정안, 바로 보타암의 삼대절기라 칭송받는 만화정검결(萬花靜劍訣)이었다.
훅!
거목처럼 당당하게 서 있던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목표는 정안이었다. 이미 상대의 검권(劍圈)이 사방을 에워쌌다. 지금은 물러날 때가 아니라 정면 돌파를 꾀할 때였다.
정안의 눈이 빛났다.
촤르르르르르륵!
수백 개의 검영이 전방으로 집중되며 연호정의 도끼, 머리, 그리고 어깨를 노렸다.
연호정이 힘차게 광룡부를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저정!
쇠와 쇠가 연달아 부딪치며 울리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범종이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정안의 눈이 흔들렸다.
‘막았다.’
만화정검결은 고작 세 개의 초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세 개의 초식에 검의 모든 것이 담겼다. 그래서 한번 펼쳐지면 무조건 승리를 안겨 주었으며, 검결을 대성하면 검에 한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종사(宗師)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그녀가 펼친 초식은 바로 만화정검결의 일초, 일검만화경(一劍萬花境)이었다.
‘이럴 수가. 저 무거운 도끼로 만화경의 검영을 전부 쳐 냈어?!’
도끼를 회초리처럼 가볍게 다룬다는 것은 직접 봤으니 안다. 하지만 그래도 도끼는 도끼다. 충돌할 때 느껴지는 무게를 생각하면 족히 칠, 팔십 근은 될 것 같았다.
그런 병장기를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휘두르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이치와 상식이라는 게 있다. 무거운 것은 빠르지 못하고, 빠른 것은 무겁지 못하다.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굳이 중검(重劍)이니, 쾌검이니 분류를 나누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상대는 평범한 상식과 이치를 깨부수고 자신만의 무(武)를 이룩한 종사(宗師)라는 뜻.
‘비무라고 생각해선 안 돼! 무조건 짓누르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부우우우웅!
살벌한 소리와 함께 광룡부가 허공을 갈랐다.
다급하게 날아오르지 않았다면 검이나 몸통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쪼개졌을 것이다. 상대가 자신을 봐주지 않고 있다는 걸 그 한 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번쩍!
정안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그녀는 곧장 만화정검결의 두 번째 검식, 성검만다라(聖劍曼茶羅)를 펼쳤다.
훅!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허공의 한 점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검압(劍壓)이 일순 기하학적인 도형(圖形)을 그려 내며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대단하군.’
연호정은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무공이 있나!’
이건 그저 화려하기만 한 검법이 아니었다.
환검(幻劍)이자 환검(渙劍)이었고, 변검(變劍)이자 변검(辨劍)이었다.
검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아우른다. 공격이 될 수도, 방어가 될 수도 있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형(形)의 목적이 즉각적으로 바뀌는 극상승의 검이었다.
능히 천하를 논할 만한 검학이었다. 연가의 정통검술과는 결이 다른, 검(劍)이 지닌 능력을 검로(劍路)로 해방한 깨달음의 무공이자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검법인 것이다.
휘이이이이이잉!
순간 백색의 돌풍이 연호정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사신무의 백호공을 끌어낸 것이다.
두 사람의 무공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르르르르릉!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바닥에 깔린 잡초와 돌멩이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정안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분쇄?!’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던 검의 만다라가 백색 돌풍을 동반한 야수의 이빨에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성검만다라를 정면으로……?!’
연호정이 성검만다라에 죽거나 다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회피나 방어 둘 중 하나를 택해 이 검초를 무마하려고 들 줄 알았다. 공격은 그다음에 택할 선택지라고 확신했다.
연호정은 달랐다. 회피도, 방어도 하지 않고 즉각 공격하여 만다라의 중심을 부숴 버렸다.
심지어 자신은 허공에서 내리치고, 상대는 땅에서 올려 치는 형세임에도!
정안의 검이 재차 움직였다.
파라라라라라락!
부서진 검형(劍形)의 만다라가 다시 합쳐지며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다르다?’
아니, 같은 초식이다. 검기(劍氣)의 성질과 진기의 흐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형태가 달랐다. 마치 만다라의 그림이 제각각 다른 것처럼, 정안이 재차 구사한 만다라의 형(形)도 처음과는 분명 달랐다.
‘첫 만다라가 기(氣)의 압박이라면, 이번 만다라는 실질적인 공격이로군.’
하나의 초식을 수십 개로 변형할 수 있다. 상황에 따른 변형이 아니라,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초식이 가진 힘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과연.’
연가의 검법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아니, 이 검로의 다양성과 무공 자체가 담고 있는 검력(劍力)만 생각하면 가히 연가검법 이상이라 할 수 있었다.
‘본가의 검법은 검사(劍士)의 절대적 수양을 동반한다. 하지만 보타의 검은 달라. 검법 자체가 지극히 뛰어나서, 누가 익혀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공 자체의 강함, 그것을 극한까지 연성한 검후라는 존재가 버티고 있는 보타암은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겠군.’
찰나지간 보타의 검이 지닌 특성을 완전히 꿰뚫어 본 연호정.
훅!
백색 돌풍을 물들이는 녹청빛 아지랑이가 연호정의 두 다리로 깃들었다.
파라라라라라락!
수십 개의 검영이 연호정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래라면 검의 감옥에 갇혀 완전히 전투 불능이 되어야만 했다. 연호정은 그 검형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벗어나 버린 것이다.
놀라움의 순간, 정안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후우우우우웅!
연호정의 움직임은 종전과 완전히 달랐다.
세상 어떤 공격도, 방어도 산산이 찢어 버릴 것 같은 야수의 움직임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한 마리의 신룡(神龍)이 되었다.
청룡공이었다. 청룡공의 청룡답운보(靑龍踏雲步)가 성검만다라의 공격을 너무나도 손쉽게 파헤쳐 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호는 공격, 주작은 극살, 현무는 방어에 특화된 무공이다.
반면 청룡은 한 분야에만 특화된 다른 삼신기(三神技)와 달리 회피와 반격, 두 분야를 다룬다. 청룡답운보의 신묘한 움직임은 성검만다라의 공격을 완벽하게 회피해 냈지만, 단순히 회피에서 그치지 않았다.
반격.
연호정의 광룡부가 청룡공, 용군삼형(龍群三形)을 풀어 냈다.
쩌저저저저저정!
“크윽!”
코앞에서 터진 예리한 연환기에 정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맞설 수 없다!’
어느 틈에 이렇게까지 거리를 좁혔는지 알 길이 없었다.
파아아앙!
정안은 재빨리 대지로 내려섰다. 허공은 성검만다라를 펼치기에 최적의 위치였지만, 만다라를 피한 것도 모자라 반격까지 가하는 상대 앞에선 불리한 위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여기까지 왔다.
어떤 식의 결과가 예상되든 만화정검결의 이초까지만 펼치려 했다. 마지막 삼초식까지 꺼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승부가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경지에선 일검만화경으로도, 성검만다라로도 상대를 압박할 수가 없다.
훅!
정안의 자세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검을 후방으로 당기고, 좌수의 검지와 중지를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만화정검결의 마지막 삼초를 펼치려는 것이다.
‘이번 삼초는 당신이라도 절대……!’
그때였다.
번쩍!
정안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삼초를 구사하기도 전에 상대가 이미 자신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사람이 어찌 이리 빨리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움직임’을 인지하기도 전에 도달해 버렸다. 심지어 그만한 속도로 움직였음에도, 대기의 흐름에서 어떠한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속도의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 상대의 몸에서 불꽃 같은 적색의 기파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번 비무에서 정안이 가장 놀란 순간이었다.
연호정의 주먹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정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공격, 방어, 회피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아아아앙! 퍼어어어엉!
엄청난 폭음과 함께 정안의 후방 대지에 굵직한 고랑이 생겼다.
휘리리릭! 툭!
정안이 쓰고 있던 죽립이 찢어져 맥없이 날아가다 바닥에 떨어졌다. 꽉 묶여 있던 그녀의 머리카락도 풀어져 넘실거렸다.
정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단단한 주먹이 그녀의 오뚝한 코 반 치 앞에 멈춰 있었다.
“흐음.”
주먹을 거둔 연호정이 광룡부를 견봉에 걸쳤다.
“대단한 무공이었소. 그대의 수양이 아직 모자랐을 뿐, 과연 보타의 검학이 전설과 신화로 불리는 이유를 알겠어.”
패배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발언이었다. 당신이 패배한 것일 뿐, 당신이 연성한 무공은 몹시 뛰어난 절학이다. 그러니 더 정진하라.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정안이 납검 후 고개를 숙였다.
“많이 배웠습니다. 정말 대단한 무공이었어요.”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정안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사 예의에도 그리 밝지 않다. 자세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의 솔직한 모습이 연호정은 마음에 들었다. 아직 때가 묻지 않은, 그러나 자신의 주관은 분명한 모습이 보기 좋았던 것이다.
“방심하다간 금세 따라잡히겠소이다. 나도 정신 차려야겠군.”
하물며 눈앞의 이 처자는 연호정이 과거에 보았던 그 검후가 아니었다. 나이는 비슷했지만.
연호정이 화운을 바라보았다.
화운은 예상외의 결과에 얼굴이 굳을 대로 굳어져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소이다. 전채 요리는 이걸로 끝이오. 들어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