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검(劍)에 실린 미래 (1)
“어떠냐? 사찰과는 많이 다르지?”
“…….”
“광활하기 그지없는 땅. 중원 대륙은 지역마다 문화와 풍습, 날씨가 전부 다르다. 지금 이곳은 덥고 습하지만, 북부로 올라가면 건조한 지역도 많고, 심지어 여름인데도 서늘한 곳이 있다.”
인자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중년 여인의 눈은 기이한 열망을 담고 있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성품과 붉게 빛나는 눈빛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판이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천상 보살이 따로 없는데, 열망 가득한 눈빛은 평온함과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였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고 궁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을 보아라. 이 드넓은 땅에는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불태우며 하루하루를 뜨겁게 살아가고 있다.”
“…….”
“하여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선(善)이 많고, 나아가 상상도 못 했던 악(惡)도 많지. 나 자신의 깨달음도 중요하다지만, 세상을 위해 휘두르는 검 역시 그에 못지않은 가치가 있느니.”
중년 여인이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의복을 입고 똑같은 죽립을 쓴 젊은 여성이 있었다.
“혜검(慧劍)이란 내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고,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지혜를 찾아 만인의 번뇌를 끊어 내려는 것도 중요한 법이다.”
“…….”
“내 말, 이해하겠느냐?”
그제야 젊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한번 열린 여인의 입에서 청산유수와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세상의 악을 보고, 참악(斬惡)의 결단 아래 가벼워진 선(善)에 약간의 무게를 실어 주는 것. 그 하나의 협(俠)을 공손함으로 삼아 세상에 일러 주며, 나아가 나 자신이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이 보타의 정신 아니었습니까?”
“본 사찰의 수백 년 역사를 보증한 전통이자, 여러 지혜로운 시각 중 하나이기도 하지.”
“네, 맞습니다. 그것이 보타입니다.”
“보타‘였’었지. 내 말은, 과거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옳았다. 다만, 힘을 지닌 자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않는 것, 약자가 신음하는 것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은 옳다고 볼 수 없다.”
“그런가요.”
“다시 말하지만, 보타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는 그것이 옳았지.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가치도 달라지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했어.”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가치 또한 존재한다.
여인은 자신의 사고(師姑)에게 그리 말하고 싶었다.
‘힘을 가진 자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요? 맞아요. 저도 그것 때문에 항상 번민에 휩싸였지요. 하나, 사부와 사고께서는 정녕 세상의 악을 처단하기 위해 중원으로 나오신 건가요?’
모르겠다. 정안(定安)은 정녕 어른들의 언행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정안에게 있어 사부와 사고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선한 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지파는 달랐지만, 두 지파 모두 경쟁 아닌 경쟁을 벌였을 뿐 자가 수행을 통한 끊임없는 번뇌의 소멸에 평생을 바친 분들이었다.
무공이 강해서 존경하는 게 아니었다. 정안은 진정으로 보타의 어른들이 존경받아 마땅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셨고, 따랐고, 행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설령 변화의 때를 깨달았다 한들, 더욱더 조심스럽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급격한 변화는 언제나 파탄을 드러내는 법이잖아요.”
“눈앞에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러나 사찰의 규율이 엄격하여 그 아이를 외면하고 돌아갔다. 이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하느냐?”
“어울리는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은 똑같다. 작든 크든, 우리 보타는 악에 고통받는 선을 외면해 왔다.”
중년 여인, 화운(和雲)은 안타까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지난날 본사의 행보와 역사가 옳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큰 번뇌와 싸워야 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차기 검후의 위(位)에 도전하기 위해 세상을 잊은 너는, 우리들의 고통과 번민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야.”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보타의 어른들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어리다고, 배움이 얕다고 상대를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자신만이 진리라고, 결국 내 말이 옳다고 강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린아이의 순수한 시선에서 더 배울 것이 많다며, 우리를 보지 말고 너 자신을 보라고 격려하고 아껴 주던 분들이 보타의 어른들이었다.
설령 진심은 달랐다 한들 이런 식의 발언조차도 조심하시던 분들이 어찌 이리 변하셨을까.
정안이 한숨을 쉬었다.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모르겠다면 모르는 대로 두어라. 너는 그저 지난날처럼, 검후의 위에 어울리는 신검(神劍)이 될 수 있도록 불철주야 연마하면 된다.”
화운의 눈이 다시 한번 반짝였다.
불법을 따르는 사람의 눈에서 보여선 안 될, 짙은 욕망이 이글거리는 속세의 안광이었다.
“그 외의 일은 우리가 처리할 것이다. 모든 고통은 우리가 감내할 것인즉, 다른 지파의 경쟁자들에게 조금도 밀려서는 아니 될 것이야.”
“…….”
“알겠느냐?”
정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사고라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정안을 보며 화운이 한숨을 쉬었다.
“너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꼭.”
“…….”
“가자꾸나.”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셨습니까?”
가득상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화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과 가득상 사이엔 연배의 차이도 있고, 배분의 차이도 있다. 가득상은 개방의 후계자지만, 자신은 보타암을 이끌어 가는 현역 장로인 것이다.
아무리 지역마다 풍습이 다르다지만, 이건 다소 문제가 있지 않은가?
‘아니지.’
화운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쪽은 이쪽이다. 그녀의 지파는 무림맹의 도움을 받기 위해 자신을 이곳에 보냈다. 하물며 상대는 백도 무림 연맹 정보 대대의 실질적인 일인자였다.
인사 정도에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화운은 인자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이곳인가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안내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한데 이분은?”
화운이 정안을 바라보았다.
정안이 고개를 숙였다.
“보타암의 정안입니다.”
꽤 딱딱한 인사였다. 어떻게 보면 버릇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화운이 질책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제일방, 십만개방의 후계자이자 무림맹 정보 대대의 고문이시다. 다시 인사드리거라.”
질책성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에 드리워진 은근한 흡족함은 또 무엇일까?
가득상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습니다. 인사가 뭐라고요. 거지한테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거지 문파의 후계자라 봤자 결국은 거지입니다. 거지는 예의도, 뭣도 모르지요. 신경 쓰지 마시고 이만 들어가시지요.”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화운이 고개를 숙이며 정안과 함께 장원으로 들어갔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가득상의 눈이 가늘어졌다.
“……푸헐! 세상에 천재가 많기도 하다. 이건 뭐 툭 하면 천재요, 괴물이야? 에고, 어디 가서 배에 힘주고 다니지도 못하겠네.”
투덜거리던 가득상은 이내 그 자리에서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천재와 괴물이 많은 세상에서, 정작 가득상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 * *
장원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일순 훅 하고 불어닥치는 서늘한 바람에 걸음을 멈추었다.
후우우우우웅!
묵직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광동의 습한 공기를 얼려 버렸다.
화운과 정안의 눈이 동시에 빛났다.
부우웅! 부우우웅!
거대한 도끼가 잔영을 일으키며 공기를 갈랐다.
도끼를 쥔 자는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도끼는 무서운 역동성을 발했다.
심지어 양손도 아니고 한 손이다. 다른 한 손은 뒷짐을 진 채로, 사람 몸통만 한 도끼가 마치 회초리처럼 보일 정도로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휘두름은 서서히 가속되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우우웅! 부아아아앙!
광룡부가 대기를 찢으며 내는 소리는 그야말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도끼는 물론이거니와 휘두르는 팔조차도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조금 멀리서 보면 한쪽 팔이 잘려 사라진 줄 착각할 정도로 속도가 대단했다.
‘헉!’
정안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이럴 수가!’
화아아아아악!
도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경풍(勁風)은 사람은 물론 외물에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다. 뿜어지는 순간 대기를 뒤흔들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 묵직함이 남기고 간 충격량에 거센 광풍(狂風)이 일었다.
그리고 그 광풍에 남은 진기의 밀도가, 발경의 흔적이 정안을 경악게 했다.
‘힘도 힘이지만, 동작 하나하나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진기가 조율되고 있다. 단순한 공격이라고 받아쳤다간 그 즉시 검이 부러지고 육신이 박살 날 터.’
주르륵.
정안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더워서 흘리는 땀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저런 거병(巨兵)을 쾌검(快劍)처럼 다루는 것도 모자라, 그 찰나에 저리 복잡한 발경법을 흘려 내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매 순간에!’
정안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눈에, 도끼를 휘두르는 청년의 나이나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끼가 내뿜는 패력과, 그 패력 속에 담긴 부드러움과, 부드러운 흐름 속에 담긴 상상 초월의 발경법이 그녀의 혼을 쏙 빼 놓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쾅!
서서히 멈춘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딱 하고 멈추었다. 그 갑작스러운 제동에 공기가 폭발하며 엄청난 굉음을 터트렸다.
“역시, 아직은 안 되는 모양이군.”
담담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정안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부족하기 이를 데 없어. 식(式)은 그럴듯하지만, 아직도 진기가 움직임을 쫓아가고 있다. 의지는 진기를 이끌고 진기는 형(形)을 이끌어야 하거늘, 무도(武道)의 극의(極意)에 이르지 못하니 의지도, 내공도 갈 길을 잃고 헤매다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구나.”
연호정이 고개를 돌려 정안을 보았다.
화운 쪽은 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정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
“아니면, 내 생각보다 더 부족해 보인 것이오?”
정안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부족하기는커녕 넘치도록 과해 보입니다.”
“그렇소?”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안타깝구려.”
“왜 그렇습니까?”
“두 분 중 나보다 강자가 계시길 바랐소. 또한, 두 분 모두 오늘의 대담 이전에 순수하게 무(武)를 바라볼 줄 아는 열혈이시길 바랐소. 한데…….”
연호정이 화운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봐도 두 분의 검은 내 도끼에 이르지 못한 듯하고, 심지어 한 분은 무(武)와 오(悟)가 아닌 속(俗)과 욕(慾)에 묶여 계시는구려.”
“……!!”
“어찌 되었든 초면부터 무례를 범했소. 사과드리오.”
광룡부를 거둔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무림맹 유군 부대의 대수 연호정이오. 보타암에서 오신 귀빈들을 뵙소. 이만 안으로…….”
그때, 정안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말했다.
“시험해 볼까요?”
“음?”
“제 검이 당신의 도끼에 이르렀는지 이르지 못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요?”
연호정이 화운을 보았다.
화운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져 있었다. 무(武)에 정신이 팔려 자신에게 의견도 구하지 않고 나선 사질에게 못마땅함을 느낀 것이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 사람의 눈빛, 언행, 기도만 봐도 어떤 사이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디, 대담을 풍성하게 할 전채 요리라 생각하고 가볍게 손을 섞어 보시겠소?”
“좋아요.”
파아아악!
정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호정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