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정세를 바꾸는 우연 (4)
방 안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의정군의 대수 연호정, 탕마군의 군장 모용우, 멸사군의 부장 묵비.
거기에 가득상과, 뜻밖에도 사마현 역시 있었다. 연호정이 따로 부른 것이다.
무림맹 최강의 유군 부대 수뇌부들과 무림맹 정보 대대 실질적인 일인자, 그리고 이제는 무너져 버린 중원 암살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음신의 후예가 한자리에 모였다.
방 안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는 이유였다. 지금 그들은 서로 친분이 있는 벗으로서가 아니라, 한 단체의 중책을 맡은 이들로서 모인 것이다.
“그러니까.”
한참이나 서신을 읽었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현재 보타암 내부에서 큰 정쟁이 터졌다는 것이오?”
“그렇소.”
가득상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묵룡부주에게서 온 그 서신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설마하니 이런 문제로 거짓말을 할 위인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언제나처럼 진위를 가리기 위해 조사를 감행했소.”
“결과는 어떻게 나왔소?”
“묵룡부주의 말이 맞았소.”
“확실하오?”
“내가 이번 보타암 건을 조사하면서 허무함을 느낀 이유를 아시오?”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작정하고 조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보타암 측의 정보 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이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보타암은 검후의 문파이자 사찰이오. 소림처럼 강호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으니, 제대로 된 정보 조직도 없었을 거요.”
“그렇군.”
“어찌하여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소만, 보타암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신성한 검후의 사찰이 아니오.”
연호정이 묵비를 보았다.
“묵 부장.”
“네, 대수님.”
“자네는 보타암에 대해서 아나?”
기실, 보타암이나 관일곡이나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다만 관일곡은 하나의 종교에 가까웠고, 보타암은 사찰보다는 무(武)를 수련하는 폐쇄적인 문파에 가깝다는 게 달랐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야 몇 번 들어 본 적 있지만, 자세히 알진 못합니다.”
멸사군에 들어온 이후, 그녀는 중원 무림의 여러 단체에 대해 공부했다. 그중 당연히 보타암도 있었다.
처음에는 여인들로 이뤄진 문파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꼈지만,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강호에 나서지 않는 문파를 파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모용우에게 물었다.
“자네는?”
“대략적인 것만 알고 있습니다. 기실, 보타암의 경우엔 워낙 강호의 관심과 멀어져 있으니까요. 그들이 대대로 검후를 뽑고, 그 검후의 무력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하다는 것 정도만 알 뿐입니다.”
“그렇군.”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다들 나만큼은 모르는군.’
연호정이 보타암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양천이 보타암을 신경 쓰는 이유와 비슷했다.
‘지금이면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나보다는 묵비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보타암은 대대로 검후 후보가 될 자를 선정하여 강호로 보낸다.
그리고 강호로 나온 검후 후보는 철저하게 자신의 관점에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쌓는다. 당연히 대대로 흑도와 많은 부딪침이 있었다.
사실 흑도는 세간에 알려진 무림의 살벌한 모습의 팔 할 이상을 담당하는 무법의 세계다.
그곳에선 살인과 약탈이 밥 먹듯이 일어난다. 힘없는 약자를 사냥하는 것이 일상이란 말이다. 흑도인에게 뒤통수를 치는 것은 당연함을 넘은 미덕이었고, 조직을 운영하는 절대강자조차도 휘하 부하들을 믿으면 병신 소리를 들었다.
속되게 말하자면 흑도 무림은 개판이다. 헤아릴 수 없는 승냥이들이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난장판이란 것이다.
검후 후보들은 대대로 그런 흑도의 무뢰배들을 손봐 주거나 조직을 해체하는 등의 업적으로 스스로를 증명했다. 중원에서 악의 소굴을 찾기가 가장 쉬운 곳이 바로 흑도 무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호정이 흑도로 진출하고 흑암의 명성을 쌓은 후, 흑제성을 세워 흑도 무림을 통제했을 때.
검후는 흑도 무림을 배회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강했다.’
연호정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녀는 강했어. 당시의 나조차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당시 검후 후보와 만난 적이 있었다.
말이 후보였지, 이미 무공이 완성형에 이른 절대강자였다. 사신의 후계자로서 양천을 죽이고 흑도제일인이라 불리기 시작하던 당시의 연호정은, 별다른 아수라장을 겪지 않고도 승부를 논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던 여검수를 보며 많이 놀랐었다.
연호정은 당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 일부를 떠올렸다.
‘당신이군요. 아수라장 같은 흑도를 제패하여 철저한 규율과 법으로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남자가.’
‘그런데?’
‘당신이 추구하는 길에 빛이 가득하기를 바랄게요. 당신의 개혁으로 흑도가 지난날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할 말 다 했으면 이만 꺼져. 바쁘다.’
‘나는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겉보기와는 달리 속정이 깊은 사내죠. 몇 달 동안 당신을 지켜보고 얻은 확신이에요.’
‘시끄럽다.’
‘흑도를 짐승의 세계에서 사람 냄새 나는 세계로 바꾸겠다는 그 진심이 후대에도 통하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세대의 검후가 다시 흑도를 찾을 거예요.’
‘아직도 안 갔나?’
‘명심하세요. 당신의 원대한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 검후의 검은 다시 흑도의 심장을 노릴 겁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와 헤아릴 수 없는 사건 사고들이 있었지만, 흑도에서 태어난 거대 조직들이 한 세대를 못 가고 종말을 맞이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검후의 존재였다.
역대 검후들은 흑도의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선이 이어진 온갖 조직을 분쇄한 뒤 유유히 보타암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같잖았지.’
연호정은 보타암과 검후라는 존재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을 온전히 자신들의 가치를 위해서만 썼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사람의 개성은 천차만별이고,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고통보다 중요할 수 있다. 연호정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행태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악을 처단하고 선을 쌓는다? 그것을 입증하여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같잖은 짓이다. 한번 악을 처단하는 데에 손을 댔으면, 그 일의 끝을 봐야 한다. 이유인즉, 어설프게 손을 댔을 때 더 피해를 보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협객이 무관심자보다도 나쁘다고 보는 이유였다. 소위 검후 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눈앞의 악만 보았지, 그 뒤에 흩어진 악이 민초들에게 어떤 폭압을 저지를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도 개인의 자유다? 연호정의 입장에선 언어도단이었다. 그것은 자유를 논할 문제가 아니라 책임을 모르는 자들의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연호정은 보타암을, 검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정쟁에 휘말려 난장판이 되었다고 한다.
‘뭔가 사건이 생겼다.’
연호정은 다시 한번 검후를 떠올렸다.
흑암제 시절, 자신의 앞에서 당당히 악을 향해 검을 겨누겠다 천명하던 깊은 눈의 여검수를.
‘당시 그자의 눈빛은 진짜였다. 적어도 정쟁으로 무너진 문파에서 나올 만한 인재는 아니었어.’
연호정이 그들을 어떻게 보는지를 떠나, 적어도 당시의 검후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정쟁에 휘말린 집단에서 나기 힘든 사람이요, 눈빛이었다. 섣부른 생각이지만, 연호정은 과거 자신이 알던 보타암과 현재 보타암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단순한 내 생각인데.”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보타암이 그 지경이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오.”
가득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기실, 전통이란 것은 어지간한 분란 따위는 소리 소문도 없이 증발시킬 힘이 있소. 수백 년 보타암 역사에 욕심 많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타암이 지금의 명성을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역사와 전통에 욕심과 야망을 억누를 힘이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소.”
“동의하오.”
“즉, 대수의 말마따나 그들에게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오. 더하여, 나 역시 그리 생각했기에 더 깊게 파고들어 보았소이다.”
“결과는?”
“나오지 않았소.”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더이다. 그들이 왜 그 지경이 되었는지.”
“그렇군.”
개방의 조사로도 알아내지 못했다면, 더 이상 그 부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 현재를 들여다보아야 했다.
“양 부주는 서신으로 이렇게 말했소. 보타암의 세 지파 중 하나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묵룡부의 힘을 빌려준다면, 훗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고.”
“그렇소.”
“제아무리 정쟁이라지만, 정말 썩을 대로 썩었군.”
양천이 어떤 사람인지를 떠나, 그는 흑도 연맹의 수장이었다. 보타암이 대대로 건드렸던 흑도 무림의 좌장이란 말이다.
그런 자를 찾아가 힘을 보태 달라고 했다니? 현재 보타암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더러 보타암의 한 축을 맡아 보타암을 무너트리고, 그들의 힘을 나눠 갖자?”
가득상이 머리를 긁적였다. 허연 비듬이 우수수 떨어졌다.
“정말 흑도 연맹의 수장다운 생각이긴 하오.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
“아니지. 흑도 연맹의 수장이라면 오히려 우릴 속이고 보타암의 힘을 통째로 삼키려 들었겠지.”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소만, 양천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오.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럴 수도 있지.”
가득상이 눈을 빛냈다.
“묵룡부주는 무림맹 본단이 아닌 대수에게 이 서신을 보냈소이다. 대수는 무림맹 소속이니 이 서신이 무림맹으로 향한다고 확신하겠지만, 굳이 본단이 아니라 대수에게 먼저 보냈다는 게 무엇을 뜻하겠소?”
“…….”
“난 알겠소. 그자가 왜 대수에게 서신을 보냈는지.”
연호정이 가득상을 바라보았다.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그 양반도 아는 거지. 대수가 가진 영향력을.”
“영향력이라.”
“내 그간 낯부끄러워서 말은 안 했소이다만, 아닌 말로 그간 대수가 해결한 일은 업적이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소.”
“과한 평가요.”
“정확한 평가요. 그리고 그건 묵룡부주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다른 걸 떠나서, 대수는 묵룡부주를 가지고 논 전적이 있소. 당대 천하에서 성천의 강자를 속일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
“묵룡부주는 대수를 눈여겨보고 있소이다.”
연호정은 말없이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가득상이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어떻긴 뭘 어떻게 하오? 무림맹에 알려야지.”
“그건 당연하오만, 문제는 우리가 있는 위치외다.”
가득상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일었다.
“만일 우리한테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양천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오.”
호남과 광동성은 지척이다. 나아가 장강 이남 쪽은 백도 무림보다 흑도 무림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하물며 양천이다. 그가 작정하고 움직이면, 연호정이나 의정군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권유이자 협박, 그리고 협박이자 아량이라.’
연호정이 눈을 찡그렸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 매끄럽군. 설마하니 양천, 당신의 짓은 아니겠지? 보타암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 말이야.’
그때였다.
“음?”
귀를 쫑긋거리던 가득상의 얼굴이 순간 팍 일그러졌다. 수하의 전음을 들은 것이다.
연호정이 물었다.
“무슨 일이오?”
“……상황 한번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군.”
“……?”
가득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타암의 검수 중 하나가 개방을 통해 나에게 연락을 취해 왔소.”
“…….”
“쓰벌, 다시 올 때까지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고민 좀 해 보쇼.”
가득상이 나가자, 연호정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묵 부장.”
“네, 대수님.”
“땡중 좀 불러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