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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34화 (433/963)

434화. 정세를 바꾸는 우연 (2)

거처로 돌아온 연호정은 잘 끓인 죽과 물을 마시곤 열 시진 동안이나 잠을 청했다.

하루를 완전히 잡아먹은 셈이었다. 연호정의 경지를 생각하면, 그의 심신이 얼마나 지쳤는지 알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거의 모든 피로를 풀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느새 또 석양이 지고 있었다.

연호정은 찬물을 마시곤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에 들어갔다.

우우우웅.

연가신단이 무거운 울음을 토해 냈다.

‘묵직하다.’

내단에 담긴 힘이 이전보다 더 증가했다.

힘이 증가했다는 건 내단 자체의 밀도가 올라갔다는 얘기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내단의 밀도를 비약적으로 올리기 위해선 진기 밀집에 관한 깨달음이나 압도적인 약력, 혹은 초고수의 격체전력이 필요하다.

한 꺼풀, 한 꺼풀 덮어 가는 게 아니라 폭발적인 성장에는 그렇다는 얘기다.

한데 지금 연호정의 상태가 그러했다. 달리 대단한 깨달음도 없었고, 양천에게 받은 내단의 기운은 강량에게 넘겼으며, 그렇다고 어떤 고수가 격체전력을 행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단의 밀도가 올라갔다. 무서울 정도로.

더 놀라운 건 지금껏 내단의 밀도가 올라갔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왜지?’

연호정은 당황했다.

‘왜 내단의 밀도가 이렇게까지…… 아!’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혹시 몰라서 사신기(四神氣)를 일일이 점검해 보았지만, 역시나 사신기는 이전 상태와 비슷했다.

즉 짐작대로였다.

‘오욕 칠정의 단련……!’

흑암제 시절의 그는 사신기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내공으로 홍천기를 썼다.

홍천기는 하단전을 중심으로 바다와 같은 내공을 연성하는 심법이었다. 적어도 축기(畜氣) 부문에 있어서만큼은 천하에 홍천기를 따라올 심법이 없다.

마르지 않는 진기. 그 진기의 힘을 업은 사신기의 출력은 무한의 살법으로 이어졌다. 지치지 않고 적을 분쇄해 버리는 사신무의 공포 이면에는 홍천기의 든든한 진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연호정은 달랐다.

그는 연가신단을 형성했다. 연가신단은 내단의 형태이며, 그 위치는 중단전이다.

그리고 중단전은 인간의 오욕 칠정, 즉 감정에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물론 중단전의 내력이 무조건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기(氣)란, 사람의 감정이란 여러 요소에 자극을 받는 법. 오욕 칠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하단전이 박살 나거나 상단전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마음의 중심은 중단전이며, 그래서 중단전이 바로잡히면 어지간한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번뇌가, 나의 심적 고통이 오히려 내단을 키워 버렸다.’

이 정도의 성장은 예상치 못했다. 기(氣)란 곧 의념에 영향을 받으니 모든 변화에 있어 정신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지만, 이토록 빠른 성장은 그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홍천기의 축기가 무한한 확장이라면, 연가신단의 축기는 수렴과 확산의 반복이다.

사신무의 위력에 있어, 어떤 심법이 더 뛰어나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다만 연호정은 연가신단에서 흑암제 시절 이상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래서 연가신단을 완성해 키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하의 죽음으로 인한 번뇌로 나 자신의 힘을 키웠다…….’

연호정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훌훌 털어 내려 했거늘, 이렇게까지 날 사로잡을 줄이야.’

이 힘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번뇌를 느낀 것도, 그것을 이겨 낸 것도 자신이지만, 수하들의 죽음이 없었다면 이 정도 성장을 이뤄 내진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힘은 수하들이 준 힘이다. 연호정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이 힘을, 너희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에는 쓰지 않겠다.’

내 사람의 희생을 통해 힘을 얻었다? 어지간한 사람의 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일이다. 적어도 사람을 귀하게 생각할 줄 안다면, 또 다른 번뇌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연호정은 그러지 않았다.

못난 모습을 보여 준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이 힘이 수하들이 준 힘이라 생각하기로 했다면, 이제는 나아가야 할 때다.

‘힘내자. 아직 할 일이 산더미야.’

양손으로 몇 번이나 뺨을 친 연호정이 운공을 중단하고 방을 나섰다.

“일어났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단창을 휘두르던 묵비가 연호정을 반갑게 맞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활은 어디에 두고 단창이냐?”

“아, 이거요? 제대로 파 볼까 하고요.”

“이미 남들 못지않게 휘두르던데?”

묵비는 무공에 재능이 뛰어났다. 비록 평생 궁술을 익혀 왔지만, 연호정에게 배운 권각술 역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묵비가 단창을 쥔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수와의 실전에서도 통할 정도로 잘 다룬다는 건,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재목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남들 못지않은 정도로는 안 돼요. 남들을 압도할 수준은 되어야죠.”

“궁술로도 충분하잖아?”

“충분하지 않으니까 배우죠. 수하들은 코앞에서 피 튀기며 싸우는데, 활줄 좀 튕긴다고 후방에서 쏴 대는 게 영 별로라서요.”

“무인은 단점을 메우는 것보다 장점을 살리는 쪽을 우선으로 해야 해. 까딱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무림에서는 더더욱.”

후방에서 화살을 날리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신기(神技)에 이른 그녀의 궁술을 믿는 멸사군은 전면전을 치르는 데에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움직인다면 그렇긴 하죠. 나도 더 잘하는 게 있는데 굳이 어설픈 장기로 목숨 걸고 싶지 않아요.”

혼자서 난전을 헤쳐 나갈 때도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녀의 궁술 실력이라면 사방에서 공격해 와도 어떻게든 뚫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번에 사마현이 얽힌 싸움에서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성과가 있으면 찾아와. 부족한 게 있으면 봐주도록 하지.”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은?”

“다들 훈련 마치고 쉬고 있어요. 몇몇은 아니지만.”

“몇몇?”

묵비가 입맛을 다셨다.

“연 공자가 바쁘게 움직일 때, 이곳에서도 누구보다 바쁘게 수련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바쁘다기보다는 거의 미쳐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누군지 알겠군.”

“가 보게요?”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안 본 지 너무 오래됐으니까.”

“나중에 사마 공자에게도 가 봐요.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알겠다.”

담담한 목소리로 대화를 마친 연호정이 멸사군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물끄러미 그의 등을 보던 묵비가 말했다.

“이따 술이나 한잔해요.”

연호정은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멸사군의 거처로 들어선 연호정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옥청이었다.

모두가 훈련을 끝낸 시간, 간이 연무장에 홀로 남은 옥청은 부드럽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검 끝을 따라 흐르는 공기가 몹시 부드럽게 느껴졌다.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였다. 실제로 옷 밖으로 드러난 팔과 빗장뼈 인근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다만 혈색은 좋았고, 기도 역시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 회복이 빠른 듯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우웅.

부상 때문에 격렬한 훈련은 금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옥청의 움직임은, 단순히 부상 때문에 느릿한 건 아닌 듯했다.

연호정은 옥청의 검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태극혜검(太極慧劍)이로군.’

무당파의 진산절기.

소림에 백보신권(百步神拳)이 있다면, 무당에는 태극혜검이 있다. 말하자면 문파를 상징하는 절기인 것이다.

옥청의 태극혜검은 몹시 부드러웠다. 저렇게까지 부드러울 수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 부드러움이 지나쳐서 과연 검법으로서의 효용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러나 연호정의 눈에는, 그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동작 속에 녹아든 치열한 진기의 움직임이 보였다.

간단한 동작에 진기가 수십, 수백 가지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다치기 전의 옥청에게는 불가능했던 진기 운행이었다.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지만, 저 정도 성과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어지간한 공격은 한 번의 휘두름으로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진기의 움직임에 빈틈이 없었다.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이군.’

검을 휘둘러 얻은 깨달음은 아닐 것이다. 정신이 든 이후, 아니 의식을 잃고 있었을 때도 옥청은 자신의 무공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가만히 옥청을 보던 연호정은 이내 기척을 죽인 채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괜찮냐고,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몰입을 깨고 싶지도 않았지만, 옥청의 심중에도 나름의 변화가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렇게 연호정이 반 각을 더 걸었을 때.

파바바바바바박!

일순 살벌한 소리와 함께, 번뜩이는 검광(劍光) 수십 개가 허공을 수놓았다.

연호정의 눈에서 기광이 떠올랐다.

‘호오.’

후원에서 반듯하게 부러진 반검(半劍)을 휘두르고 있는 청년.

그는 바로 연지평이었다.

멸사군과 함께 움직인 연지평은 이번 임무에서 아무런 활약이 없었다. 애초에 멸사군 자체가 부대전을 벌이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잔뜩 날 세우면서 긴장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연호정은 자신의 예측이 틀려서 기분이 좋았다.

연지평은 더 이상 과거의 어리기만 한 동생이 아니었다.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도, 멸사군이 따로 부대 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연호정은 새삼 연지평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부대 일이 아무리 바빠도, 생각이 있으면 한 번씩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무에만 급급해서 동생 한번 제대로 챙겨 주질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될까 무서워 훨씬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너는 물론 아버지를 뵐 면목도 없구나.’

하나를 얻으려거든 하나를 포기하라 했던가.

하지만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을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의 규율을 위해서는 동생이라고 특별 대우를 해 줘선 안 되겠지만, 적어도 사석에서 한 번씩 토닥여 주는 정도는 괜찮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도.’

번쩍!

허공을 가르는 검광은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떠오른 초승달처럼 맑고 서늘했다.

‘어떻게든 혼자서 발전하고 있었구나.’

휘두르는 검에 일정한 형(形)과 식(式)이 보이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자유로웠고, 나쁘게 말하자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검도 반으로 뚝 부러져 있었기에, 섬세한 자격(刺擊)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베고, 또 베는 검식.

그러한 검식 속에서 무엇을 찾은 것인지, 동생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참이나 연지평을 보던 연호정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어째 말을 걸기가 쉽지 않군.’

옥청에게도, 연지평에게도.

어쩌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다독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긴 했으니까.

한참 동안 동생의 수련을 지켜보던 연호정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내일 아침에 다시 와야겠군.’

그때였다.

“연 대수! 연 대수 여기 있소?!”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상황이 주는 다급함이 동시에 묻어 나왔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연지평과 옥청의 수련이 뚝 끊어졌다.

파악!

단숨에 연무장으로 달려온 연호정의 눈에 가득상이 보였다.

“후개?”

“아! 여기 있을 거라더니.”

“무슨 일이오?”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소!”

또 뭐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면? 설마 관부 쪽이오?”

“그렇지 않소.”

가득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연 대수, 보타암을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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