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33화 (432/963)

433화. 정세를 바꾸는 우연 (1)

“앗! 대수님?”

며칠 정비하며 모용우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묵비의 입에도 연 공자라는 호칭보다는 대수라는 호칭이 붙은 모양이었다.

“돌아오셨군요.”

“그래.”

연호정의 얼굴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딱히 전투를 치른 것 같진 않았지만, 눈빛만 보면 백전(百戰)을 치르고 온 사람처럼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만큼 심적 피로가 크다는 뜻이리라.

“갔던 일은 잘 마무리됐어요?”

“나쁘지 않게.”

“다행이네요. 고생하셨어요.”

“고맙다.”

“일단 좀 쉬세요.”

“아니, 쉬기 전에 할 일이 있지.”

연호정은 곧장 탕마군의 거처로 향했다.

개방이 힘을 써서 얻은 이 거대한 장원은 멸사군과 탕마군 모두를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물론 탕마군이 전력 손실을 입지 않았다면 제법 빡빡했을 것이다.

“대수님?”

한참 훈련을 지휘 중이던 모용우가 검을 내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일은 끝나셨습니까?”

“그래.”

모용우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전원 집결.”

파바박.

흩어져 있던 탕마군병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도열했다.

상당히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멸사군과 달리 탕마군은 몹시 일사불란했다. 그 분위기는 확실히 모용우와 어울렸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편히들 쉬게.”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바로.”

모용우의 말에도 군병들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저 딱딱했던 군인의 눈빛이 지친 사람의 눈빛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모용우가 웃으며 말했다.

“일은 잘 해결이 되었습니까?”

“그럭저럭.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

“그렇군요.”

모용우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연호정이 물었다.

“어디에 있나?”

느닷없는 물음이었지만, 모용우는 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기실, 딱히 안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탕마군의 연무장에서 오십여 장 떨어진 곳, 커다란 제단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위패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제단 앞으로 간 연호정은 가만히 위패들을 둘러보았다.

이백이 넘는 위패들은 그 크기가 일반 위패의 절반 정도였다. 전부 제단에 올리기 위해서는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위패를 보던 연호정은 무릎을 꿇고 향을 피웠다.

가까이 있던 모용우,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도열해 있는 탕마군의 눈은 연호정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스르륵.

향을 피운 연호정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위패를 올려다보았다.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대수님.”

“할 일을 하게.”

“예?”

“한창 훈련 중이지 않았나? 마무리하게. 나 신경 쓰지 말고.”

“……알겠습니다.”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간 모용우가 탕마군을 도열시켰다.

“중진(中陣)부터 다시 시작한다!”

“예!”

그렇게 모용우와 탕마군은 훈련에 매진했다.

그동안 연호정은 위패에 적힌 이름 하나하나를 신중히 들여다보았다.

‘많구나.’

죽은 부하가 참 많기도 했다.

탕마군의 인원수가 많다는 거야 알았지만, 새삼 실감이 되었다. 너무 많은 부하들이 죽었다는 게.

의정군으로 통합된 이후 첫 출동이었다. 임무가 임무였던 만큼, 당연히 사상자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건 어떤 임무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다만, 연호정이 이들에게 미안해하는 것은 하나였다.

‘너희의 죽음은 개죽음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놈을 놓치지 않았다면 너희도 죽지 않았을 거다.’

사마현과 처음 만났던 그때 그 자리.

그곳을 급습한 야율적과 소방 두 사람 중 반드시 잡아야 할 적은 야율적이었다.

물론 사음교와 더 깊게 연관된 사람은 소방이다. 그것은 혈음사기와 혈음장의 존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광동성의 평화를 위해서는 소방보다도 야율적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야율적을 잡는 것이 먼저요, 소방은 그다음이었다.

연호정은 그것을 놓쳤다. 사마현의 돌발 행동? 거기까지 내다보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결국 야율적을 놓친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그 실수가 부하들의 목숨 이백을 날려 버린 것이다.

‘참으로, 참으로 쉽지가 않구나.’

흑암제 시절에도 무수히 많은 부하를 잃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가까운 지인이나 부하, 상관을 잃었을 때의 충격은 대단히 크지만, 그것도 거듭하다 보면 차차 익숙해지더라고.

연호정은 달랐다.

흑암제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부하를 잃는 경험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표정을 더 담담히 할 수 있고, 찢어질 듯한 마음을 더 쉽게 숨길 수 있게 되었을 뿐, 고통의 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기만 했다.

‘앞으로, 난 또 얼마나 많은 부하를 잃을 것인가.’

부대의 장으로서, 그와 같은 경험은 숙명이다.

‘얼마나 많은 부하의 이름을, 이 조막만 한 머리에 담아야 할까.’

부하들이 죽을 때마다, 연호정은 그들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

딱히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아프게 할 수도 없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연호정이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을 때까지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흑제성을 군림했던 흑암제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머리에는 수만이 넘는 부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흑제성의 어떤 조직, 어떤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던 이들인지도 전부 외웠다.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두 번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연호정은 누군가를 다스리는 수장으로서 그들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으려 했다. 진짜 죽음은 모두에게서 잊혀지는 순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출정 전 유언장을 썼다는 걸 안다. 감히 짐작건대, 그 유언장에 내 이름 석 자가 적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너희를 기억하는 것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한참이나 위패들을 둘러보던 연호정이 나직이 입을 달싹였다.

사신의 진기를 완성한 그의 두뇌 능력은 범부의 그것과 차원을 달리했다. 응용력이나 창의력의 문제 이전에, 두뇌의 용적이 무언가를 담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연호정은 쓸모없는 지식이나 정보는 아예 담지도 않았다.

사방무제에 대해 몰랐던 것도, 각 문파의 비전 영단에 대해 몰랐던 것도, 애초에 머리에 담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의 머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이름은, 매 순간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책임감이라는 걸 선사했다.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로 머리에 담은 부하들의 이름을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 고민할 찰나의 시간조차 필요치 않도록, 그 부하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아주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곧장 이름이 튀어나올 수 있도록.

그렇게 연호정은 부하들의 이름을 외웠다.

연호정은 밤이 돼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동이 터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탕마군병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과 감동을 느꼈다.

보여 주기식일까? 벽산호장 정도 되면 기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동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그래도 사람이라면, 남은 부하들 앞에서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옳다. 군병들은 그렇게 생각했었고, 실제로 연호정의 행동을 그렇게 이해했다.

틀렸다.

연호정은 사흘이 지나도록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잠도 자지 않았고, 눈을 감은 채 끊임없이 죽은 군병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결코 보여 주기식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친혈육이 아니고서야, 아니 혈육조차도 저런 식의 애도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탕마군의 훈련이 마무리될 즈음,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하의 고수라도 사흘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면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하물며 연호정은 여전히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연호정의 자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사흘 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지고 눈에 띄게 말랐지만, 눈빛은 더 깊고 고요해졌다.

연호정을 보던 모용우가 검갑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쿵. 쿵.

탕마군 전원이 오와 열을 맞춰 도열했다.

사흘 전과 같은 자리, 같은 자세였다. 그러나 연호정을 보는 눈빛은 사흘 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연호정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모용우가 말했다.

“대수님.”

걸음을 멈춘 연호정이 말없이 모용우를 돌아보았다.

모용우가 웃으며 물었다.

“따로 하명하실 일은 없는지요?”

가만히 모용우를 바라보던 연호정이 군병들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죽지들 마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탕마군 전원이 고개를 숙였다.

“존명!”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그들의 목소리가 장원 전체를 뒤흔들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탕마군은 연호정이 사라지고도 오랜 시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누구 하나 허리를 펴려고 들지 않았다.

경의(敬意)였다.

청산유수와 같은 말도 없었고, 살 떨리는 위엄으로 자신들을 휘어잡지도 않았다. 하지만 연호정의 행동은 그들로부터 진심 어린 감동과 충성을 끌어낼 수 있었다.

때로는 말보다 행동이 오해 없는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법.

딱히 그러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연호정의 모습에서 탕마군은 자신들이 오래도록 모실 또 하나의 수장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모용우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탕마군이 허리를 폈다.

“오늘 훈련은 이것으로 마친다. 다들 돌아가서 쉬어라.”

“예.”

탕마군이 조용하게 흩어졌다.

거처로 가는 길.

죽은 부하들의 이름을 곱씹던 연호정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우웅.

광동의 날씨답지 않게 오늘은 제법 건조했다. 바람도 서늘해서 걷기가 좋았다.

그리고 그런 하늘에, 기다란 구름이 한 마리 용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연호정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황룡이라.’

그는 탐경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조만간 찾아가겠네. 어차피 광동이 제대로 바로잡히는 걸 본 연후에야 떠날 것 아니던가? 며칠 후에 다시 보도록 하세.’

‘하나 물어봅시다.’

‘얼마든지 물어보시게.’

‘불문의 고승들이 어째서 불사(不死)에 그리 집착하는 것이오? 그런 방법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불법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 아니오?’

‘허허, 그리 보일 수 있겠지. 아니, 깊게 생각해 보면 자네 말이 틀리지 않네.’

‘알고도 하는 일이다?’

‘죄라면 죄겠지. 그러나 불사의 비밀엔 윤회의 비밀과 상통하는 무언가가 있을 걸세. 우리는 그저 그것에 학술적으로 접근하려는 것뿐이야.’

‘과연 그것이 학술적인 접근으로 끝나겠소?’

‘그래야만 하겠지.’

깊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한 번뿐인 생이라 치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멍청한 땡중들아. 불사니, 윤회니 다 필요 없어. 그저 누군가가 내 이름을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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