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사신(四神)으로 엮인 과거 (7)
‘이럴 수가.’
범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조님께서 패배를 자인하셨다?!’
물론 그의 눈에도 사조님의 패배가 분명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문제는 그것을 사조님께서 너무 간단하게 인정해 버리고야 만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저러실 수 있지?
‘분하지도 않으신 건가?’
사조님께서는 불문은 물론 속세와도 연을 끊고 불산에서 남은 생을 불태우시는 분이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끊어진다고 하던가. 실제로 몇 번 얘기를 나눠 본 결과, 겉으로는 연을 끊었다고 하시면서도 당신께서 몸담았던 소림의 차기 나한당주를 잘 다독여 주셨더랬다.
같은 의미로, 사조님은 무(武)에서 멀어지셨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 세계와 끊어지진 않았다.
무도(武道), 무림(武林), 무공(武功).
한번 그 세계에서 살아 본 사람은 절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건 불산에 계신 어르신 모두가 마찬가지다.
한데도 저리 쉽게 패배를 자인하시다니?
‘분명 봐주신 것이다. 내 눈에 보일 정도면 연 대수 역시 알고 있을 것이야.’
그래서 연호정은 저리 말한 것이다. 초전부터 실력 발휘를 했다면 절대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사조님께서 하신 말씀은 충격적이었다.
‘진심이든 방심이든 결과는 결과일세.’
순간 범오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결과는 결과…….’
소림 역사상 최강의 나한당주이자, 역대 나한당주 중 가장 많은 악인을 제압하고 쓰러트린 협의(俠義)의 상징.
불같은 성정과 엄청난 호승심으로 당시 소림 무승 모두에게 존경과 공포의 상징으로 남은 희대의 달인.
그런 그가 저리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리고 약한 상대에게.
‘대체 무엇이 사조님을 저리 바꿔 놓은 것일까?’
물론 범오는 탐경의 전성기 시절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은 보았지만, 그의 활동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굳이 안 봐도 아는 것이 있다.
범오는 탐경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소림 출신임을 떠나, 성격에서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탐경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호승심이 강하고, 재능도 출중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이 멈췄을 때의 번민도 컸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주변에서 깨우쳐 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림은 야생이다.
야생에서는 장난이라는 것이 없다. 사슴이 범에게 장난을 칠 생각은 절대로 못 한다. 장난치는 순간 죽을 테니까.
그것이 야생이요, 자연의 법칙이다. 장절한 생(生)을 위해 매 순간을, 하루하루를 진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고도 늙어서 죽는 짐승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무림은?
‘봐주었다, 견제했다, 장난이었다, 예의였다…….’
범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객쩍은 농담만도 못한 변명일 뿐이다.’
비무라면 차라리 배울 기회라도 있다. 하지만 생사결이면 남에게 변명 한마디 못 하고 죽는다. 항변의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고, 무림이다. 승부를 논함에 있어, 변명 따위는 불순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광동성으로 오면서 이미 마음 깊이 받아들인 깨달음이었다. 새삼스레 지금 그런 걸로 충격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범오는 탐경의 자세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달라.’
탐경, 사조님, 각료.
같은 사람이지만, 또한 전혀 다른 사람이다.
‘소림의 무승 각료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분노의 명왕(明王)이었다. 당대 소림의 큰 사조님께서는 그저 인자한 노인이시다. 불산의 책임자 탐경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남은 생을 불태우는 현인(賢人)이시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주르륵.
왜일까?
이 또한 깨달음의 순간이라면 순간일진대, 어쩐지 범오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따라 배우려 하면 안 되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이미 내가 알고 있었거늘, 어찌 타인을 닮으려고만 했던가.’
타인의 자세를 보며 나를 돌아보는 것은 올바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위치 때문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옳다 여기고 그대로 따르려 한다면 이것은 불순하다.
‘이미 답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무(武)든 자아(自我)든 불심(佛心)이든, 결국 내가 한 발을 떼야 시작인 것을.’
우우우우웅.
범오의 몸에서 또다시 황금빛 진기가 솟구쳤다.
이전보다 훨씬 더 은은한 빛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빛이 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연했지만, 빛을 포착하는 순간 그 상서로움에 보는 이의 마음이 차분해질 지경이었다.
무의 깨달음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깨달음.
범오의 가슴속, 오욕 칠정의 투명한 알맹이가 퍼석! 하며 금이 갔다.
후우우웅.
대승범천신공이 꿈틀거리며 순하고도 강력했던 항마진기가 고도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소림의 무공은 깨달음의 무공이다. 불심이 깊을수록 축기의 질과 양이 향상되며, 더 높은 이치에 닿을수록 무공 자체의 위력도 달라진다.
그것이 바로 소림의 무공이 위대한 이유였다. 힘을 얻으려는 자, 그 자격이 되어야 얻을 수 있음이다. 그만한 자격을 갖추어야 큰 힘을 쥐고도 삿되게 쓰지 않는 것이다.
즉, 범오는 다른 승려보다 불심이 깊지도 않고 이치를 좇지도 않았음에도 무종지벽을 코앞에 두었던 것.
그런 그가 이제 비로소 무공을 배운 승려(武僧)로서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뎅. 뎅. 뎅…….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
대승범천신공의 내공이, 대승법(大乘法)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진기로 탈바꿈된다.
철저한 깨달음의 무학. 법문과 구결을 안다고 체득할 수 없는 절대무공.
소림 최고의 신공 중 하나이자 이대능력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반야(般若)의 대능력(大能力)이 범오의 진기를 뿌리부터 바꾸고 있었다.
* * *
“제자가 아니다?”
이 말은 또 무슨 뜻인가.
탐경이 미소를 지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로군. 정확히 말하자면, 자네의 스승과 내가 아는 사람이 동일 인물일 것 같긴 하네. 그러나 나와 만났을 때의 신비인과, 자네를 가르쳤을 때의 신비인은 많이 달랐던 모양이야.”
“말장난처럼 들리오.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건데.”
“껍데기가 같다고 다 같은 사람이라던가? 그 사람의 혼이, 깨달음이 다르다면 결코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음이야.”
탐경이 고개를 돌려 범오를 바라보았다.
“바로 저 아이처럼 말일세.”
연호정도 범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후우우우웅.
저리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진기가 뼛속까지 파고들 듯하다.
그 힘의 깊이는 실로 놀라웠다. 강하다거나 패도적이라는 평가를 떠나서, 대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절로 숙연해지는 진기였다.
마치 저 공공대사처럼.
공공대사와는 다르지만, 그 결이 비슷한 힘이 범오라는 사람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무상(無上)이 아닌 반야(般若)로군. 대단해. 무림인들은 말한다네. 소림 최강의 무공이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이라고. 그것은 틀린 말이야.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 역시 무상대능력에 전혀 뒤지지 않네. 다만 저 아이가 반야를 깨달았다는 것은, 천성과는 달리 끊임없이 지혜를 추구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지. 무상은 반야보다 세속적이거든.”
탐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당대 소림을 책임질 수 있는 또 하나의 나한당주가 태어났구먼.”
“…….”
“말해 보게. 자네가 아는 범오가 지금의 저 범오와 같은 사람인가?”
연호정은 감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탐경의 미소가 진해졌다.
“내가 본 신비인은 한눈에 소림 무공을 파훼한 걸 넘어서서, 무(武)의 이치조차 산산이 분해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네. 말하자면 반야대능력과 같았지. 실제로 손을 쓸 필요 없이, 상대가 알아서 물러나게끔 하는 방법을 알았어.”
“…….”
“한데 자네는 달라. 자네의 사신무는 반야보다 무상에 가까워. 한눈에 이치를 꿰뚫지는 못하지만 더 빠르고 강하며, 그 결과가 자신의 생존과 타인의 죽음으로 고정되어 있는 무공이라네.”
“사람이 다를 뿐이오.”
“사람이 다르니 무공도 다를 수밖에 없지. 자네 무공을 보니 알겠네. 사신무는 명확한 투로가 존재하나, 그 투로는 완벽에 가까운 예시일 뿐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신을 연성한 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무공을 구현하느냐지.”
사신무의 본질을 관통하는 대사였다.
이 사실을, 고작 한 차례 손속을 나눈 것만으로 꿰뚫어 본 자는 맹세컨대 존재하지 않았다. 탐경을 보는 연호정의 눈에 새삼스럽다는 빛이 어렸다.
“즉, 사신무는 형(形)과 식(式)보다 정신이 중요한 무공일세. 감각과 경험이야 혼자서도 쌓을 수 있지만, 어떤 식으로 전수하느냐에 따라 전승자의 성향과 무공 구현 방식이 달라지지.”
“나는…….”
“물론 나는 사신무에 대해 잘 모른다네. 내가 느낀 바대로 말할 뿐이야. 게다가 자네의 무공을 보니, 단순히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자기화(自己化)를 했군.”
“…….”
“다만, 자네가 지금의 형태를 얻는 데에 스승의 가르침이 큰 몫을 차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보네.”
가만히 탐경의 말을 듣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스승님이 어디 계시는지는 모른다고 하셨소?”
“모른다네. 말했듯, 알았다면 굳이 자네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진 않았을 것이네.”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남은 일은 하나요. 당신이 아는 사람이 내 스승과 같은 사람이든 아니든, 그건 나중에 알아보도록 합시다.”
“음.”
후우우웅! 탁!
허공섭물로 흑백쌍룡부를 쥔 연호정이 도끼를 허리춤에 걸었다.
“나의 사신(四神)으로 무엇을 보고 배우고 싶소?”
“거래를 마무리하자, 이것이로구먼.”
“그렇소.”
“좋네. 그럼 말하도록 하겠네.”
탐경이 나직이 숨을 들이쉬었다.
제법 긴장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지만, 오랫동안 매달려 온 일이 일부분이나마 해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앞에서는 나이도, 경험도, 지혜도 소용이 없었다.
“자네가 말했지? 원한다면 사신의 법문과 구결까지도 알려 줄 수 있다고?”
“해석을 과하게 하셨군.”
“허허,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사신무의 법문과 구결은 필요치 않으니.”
“그럼 뭐가 알고 싶소?”
“사신이 아니면서도 사신에 속해 있는 구결.”
“……?”
“명백한 사신무이나, 사신무에 얽혀 있지 않은 무공을 자네는 알고 있네. 정확히는 무공이라기보다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지만.”
“그게 무슨……?”
“우연히 알게 되었네. 사신이 극에 이르고, 사신무장(四神武將)의 혼(魂)이 만반의 준비가 되면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
“명백한 사신무이나, 사신무를 초월한 무공. 법문은 남았으되 구결은 남지 않은, 저 반야대능력처럼 오롯이 깨달음으로 올라서야 할 무적의 영역.”
“……!!”
연호정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탐경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알고 있군. 그렇다면 미안하네. 무리한 요구를 해서.”
“…….”
“그렇다네. 내가 자네에게 요구할 것은 단 하나, 바로 황룡(黃龍)에 관한 법문(法文)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