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30화 (429/963)

430화. 사신(四神)으로 엮인 과거 (5)

연호정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뭐?’

사방무제에게 제자가 없었다고?

제자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공부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공부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건, 자신이 이룩한 공부가 후대에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이지?’

연호정은 이번과 탐경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적어도 방금 한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오만.”

“그렇지 않다, 아이야. 너는 이미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

연호정의 볼이 희미하게 떨렸다.

“노인장 말은 설마하니, 내 스승이 삼백 년 전 혈교지란을 제압했던 사방무제 본인이란 말이오?”

이번은 말없이 연호정을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노인답게 깊었고, 노인답지 않게 맑았다. 세상 어떤 이치라도 단숨에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지혜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푸하하하하!”

이번이 돌연 폭소를 터트렸다.

한없이 진지했던 분위기가 갑작스러운 웃음에 살랑살랑 가벼워졌다.

이번의 웃음은 지나치게 과장된 듯했지만, 달리 보면 진심으로 유쾌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연호정을 가리키며 범오의 어깨를 퍽퍽 두들겼다.

“저 멍청한 놈을 보라지! 이걸 진짜로 믿네! 크하하하!”

연호정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져 버렸다.

이번이 연신 킬킬거리며 말했다.

“이놈아, 그럴 리가 있겠느냐? 삼백 년 전의 사방무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누? 역사상 최강의 무인이랬지, 누가 그 양반더러 신선이래? 이야, 이놈 이거 생각보다 엄청 순진한데?”

죽일까.

연호정은 순간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자신의 사문에 얽힌 일, 그것도 스승에 관련된 일인데 다 장난이었단다. 열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다독였다. 사방무제에 관한 얘기는 장난이었다 치더라도, 이 노인네들이 하는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적어도 사신무와 깊은 연관이 있는 건 분명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연호정을 보며, 이번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확실히 난놈은 난놈이야. 순진해 빠지긴 했어도 상황을 읽는 능력만큼은 대단히 뛰어나. 제 놈이 분풀이할 때는 아니라는 걸 아는 게지.”

“칭찬 고맙소만, 인내심이 깊은 편은 아니오.”

“그래 뵌다, 이놈아. 한 번만 더 장난질 치면 손모가지라도 날려 버릴 기세로고. 넌 노인 공경이라는 말도 모르지?”

“내 사문이, 내 무공이 당신들이 하는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거요?”

이번이 피식 웃었다.

“깊은 관련이 있지.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려.”

“적어도 나는 그 설명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오만.”

“자격이라……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이번이 허리를 두들겼다.

“아이고, 죽을 때가 다 되니까 그거 좀 웃었다고 허리며 배며 뻐근하네. 이보게, 아우. 나머지는 자네가 설명해 주게.”

탐경이 입맛을 다셨다.

“젊은이 눈에 독기 심어 놓은 건 형님인데, 왜 그 뒤처리를 내가 해야 하오?”

“그렇게 치자면 자네가 데리고 온 아이잖아? 책임도 자네가 져야지.”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예전보다 뻔뻔해지셨소.”

“갈 때 되면 다 이래, 이 사람아.”

몸을 돌린 이번이 다시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

“한바탕하려거든 저 멀리 가서들 해. 저 아이 기도와 눈빛을 보니, 자칫 잘못하다간 공들여 만든 이곳 토굴이 다 무너지게 생겼어. 쯧, 사방무제 그 양반도 성미가 불같다고 하더니만, 어째 저 일맥(一脈)은 다 그런 모양이야.”

투덜거리던 이번이 어느새 동굴 속으로 쏙 들어갔다.

남은 세 사람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어렸다.

휘이이이잉.

그들 사이로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연호정이 탐경을 보았다.

탐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두와 만나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어째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네그려.”

“노인장들 면면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 내가 원하는 걸 말해야지. 정확히는 우리지만. 그게 거래 아니었나?”

“……그것도 그렇군.”

“다만 자네가 연성한 무공이 우리가 하는 일과 연관이 없지 않으니, 좋은 마음에 설명해 주겠다는 걸세. 거래만 생각하면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어.”

“인정하오.”

“푸헐! 성격 한번 시원시원하니 좋구먼.”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던 탐경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 숲이 보이시는가? 저곳에 공터가 있네. 자네에게 설명해 주기 전에, 우선 자네가 진정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제자인지부터 제대로 확인해 보세.”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비무요?”

“비무라고 해도 좋고, 생사결이라고 해도 좋네.”

굉장한 자신감이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가십시다.”

“좋네.”

탐경이 범오를 힐끔거렸다.

“너는 어쩔 테냐?”

“……예?”

“계속 거기서 번뇌와 드잡이질을 하고 있을 게냐? 아니면 속부터 채울 것이냐? 그도 아니면, 우리 싸움 구경이라도 하겠느냐?”

범오는 선택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공터는 어지간한 문파의 연무장보다 서너 배는 넓었다.

범오는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기운도 없고 정신도 없었지만,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한번 깜빡이지도 않고 두 사람을 주시했다.

“자, 그럼.”

뒷짐을 진 탐경이 왼팔을 올려 중단장상(中段掌上)의 자세를 취했다.

“먼저 와 보시게.”

물끄러미 탐경을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 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음?”

“아까 그 노인장의 말을 들어 보니, 당신들은 내 무공과 사방무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했소.”

이번은 분명 ‘저 일맥’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사방무제도 성격이 불같다는 말까지 했다. 세상은 지금까지도 사방무제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성격이나 개인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지했다.

하지만 그 노인은 달랐다. 아마 눈앞의 이 노인장도 사방무제에 관해서는 자신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알지.”

“그리고 당신은 내 스승 되는 분과 만난 적이 있다고 하였지.”

“정정하지. 자네 사부로 ‘추측’되는 이를 만난 적이 있다네. 그것을 확인하려면 역시나 손을 섞어 보는 수밖에 없지.”

“……안 들어도 대답을 알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겠소.”

“말씀하시게.”

잠시 말이 없던 연호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들, 아니 당신은 내 스승이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소?”

“모르네.”

“…….”

“그걸 알았다면, 굳이 자네와 거래까지 해 가면서 이곳으로 데려오진 않았을 것이야. 우리가 먼저 그를 찾아갔겠지.”

“그렇군.”

“궁금증은 풀렸는가?”

“후우.”

깊게 숨을 내뱉은 연호정이 일순 눈을 치떴다.

번쩍!

벼락과도 같은 광채를 뿜어내는 연호정의 눈빛은 강렬함 그 자체였다.

“됐소. 괜히 시간을 낭비했소. 하려던 일이나 합시다.”

“좋네. 먼저 들어…….”

파아아아앙!

연호정이 탐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습적으로 돌진했다.

탐경의 눈이 번뜩였다.

아무런 기척도 없다가 갑작스레 폭발적인 진격을 보여 준다. 한데 그 속도와 위압감이 대단했다. 사전에 진기를 모아 준비한 것도 아니었거늘.

무서운 속도로 접근한 연호정이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쿠우우우웅!

공터를 넘어, 봉우리 전체가 흔들릴 듯 과격하기 그지없는 진각이었다.

힘의 진각, 백호군림보였다. 혈익휘천의 불꽃 같은 질주를 한순간 멈춘 것도 대단하지만, 속도에서 받은 힘을 그대로 진각으로 흘려보내 더 강한 탄력을 얻는 일련의 과정이 신기(神技)에 달해 있었다.

연호정이 주먹을 뻗었다.

백호공, 호왕구벽세였다.

부아아아앙! 콰앙!

공기를 찢고 나아간 주먹이 탐경의 손바닥과 충돌하며 거센 폭음을 터트렸다.

일대의 습한 공기가 한순간 모조리 증발할 것 같은 충격파가 퍼졌다. 무지막지한 진동에 공터 전체에 깔린 돌멩이들이 한 자나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흠.’

탐경은 자신의 발이 다섯 치나 밀린 것을 느꼈다.

‘엄청난 힘이로고.’

두 사람의 경지는 고작 한 계단 차이였지만, 그건 천양지차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차이였다.

그런 상대를,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주먹질 한 번으로 밀려나게 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완력이 강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야. 타점(打點)까지 힘을 전달하는 능력, 상황에 맞춰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이 지극히 뛰어나다.’

고작 한 번의 부딪침이었지만, 이 연호정이라는 청년이 얼마나 수준 높은 무(武)를 이루었는지 뿌리부터 체감할 수 있었다.

‘천재라.’

파아아앙!

일권으로 밀어붙인 연호정이 곧바로 몸을 회전하며 팔꿈치로 탐경의 옆구리를 노렸다.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는 중에도 허점은 없었다. 회전하며 자세를 낮추는 일련의 동작이 소름이 돋도록 깔끔했다.

탐경이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콰앙!

옆구리를 강타해야 할 팔꿈치가 탐경의 허벅다리를 후려쳤다.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한쪽 다리로만 중심을 잡는데도 탐경의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절륜한 내공력으로 신체 전반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호정의 두 주먹이 불을 뿜었다.

파파파파팡!

소나기처럼 쏟아 내는 연환쌍권에 탐경의 양손도 바쁘게 움직였다.

탐경의 방어는 자연스럽고도 완벽했다. 그 빠른 권격을 쳐 내면서도 여유가 있었고, 다음 공격을 막는 자세에도 빈틈이 없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방어 태세다. 주먹이 아니라 화포가 날아와도 그대로 받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순간 연호정의 주먹 끝에서 붉은 광채가 폭발했다.

펑! 퍼퍼펑! 펑!

탐경이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물러났다. 그저 한 발을 떼었을 뿐인데, 어느새 거리가 삼 장이나 벌어져 있었다.

‘허, 이 녀석 봐라?’

여유는 여유고, 놀라움은 놀라움이다.

‘이리 쉽게 초식의 방어술을 지워 버린단 말이지?’

주먹질이 통하지 않자, 주먹 끝에 폭경을 실어 자세가 흔들리게 만들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새로운 무공으로 대응하는 게 아니라 없는 빈틈을 억지로 만들어 버리는 투쟁술.

약점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만든다. 상대의 약점을 만든 이후에는 주저 없이 살수를 써서 전투 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살벌한 무공이었다.

‘과연.’

지금 연호정이 구사하는 무공이 그 신비인의 사신무(四神武)라고 단정 짓긴 어렵다. 그는 이 정도로 본실력을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점점 확신이 들었다.

‘그는 나의 무공을 보는 즉시 파훼하는 눈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파훼할 곳을 보는 걸 넘어 파훼당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어.’

경지의 차이를 생각하면, 연호정이 제아무리 천재라도 탐경의 약점을 공략하긴 힘들다.

그렇다면 약점을 만들어 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호정은 그 쉽지 않은 일을 숨 쉬듯 자연스레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남자였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확신할 수 없지.’

탐경의 눈에 결심이 깃들었다.

후웅.

한 줄기 바람이 이는 순간, 탐경의 신형이 연호정의 우측 후방에서 나타났다.

범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저 보법은?!’

절대로 막을 수 없는 방위, 사각으로 파고드는 무공이었다. 눈으로도, 감각으로도 좇을 수 없는 불문 최고의 보법이 기지개를 켠 것이다.

쿠웅!

연호정의 진각이 강렬했다면, 탐경의 진각은 몹시 깊었다.

진각으로 힘을 받은 탐경의 손이 연호정의 등판을 노렸다. 그 손에 실린 금광(金光)의 진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거웠다.

‘자, 어떻게 반응할 테냐.’

여전히 연호정은 등을 돌린 채 달려 나가고 있었다.

탐경의 눈이 빛났다.

‘이걸로 끝이냐?’

그때, 연호정의 손이 허리춤의 흑룡부를 쥐었다.

번쩍!

사선으로 올려 친 도끼날.

몇 방울의 피가 허공을 날았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