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사신(四神)으로 엮인 과거 (4)
“후우, 이제는 반나절도 들여다보지 못하겠구만. 나이야 먹을 만큼 먹었다지만, 그래도 체력이 떨어지는 꼴을 보니 영 착잡하이.”
이번이 허리를 두들기며 일어났다.
해문(解文)이 혀를 찼다.
“새삼스러울 게 있소? 당장 오늘 저녁에 부처님 곁으로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외다. 체력 떨어지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거늘.”
“이 사람아. 부처님 곁으로 가는 거야 축복이지. 다만, 뭐라도 이뤄 놔야 부처님 뵐 면목이라도 있는 게지.”
“부처님은 우리가 이 짓거리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실 거요.”
“사람이 말을 해도 꼭.”
“이럴 시간에 해탈의 길을 궁구하는 걸 훨씬 좋아하지 않으시겠소? 말이야 바른말이지, 영생(永生)에 무슨 윤회(輪廻)의 비밀이 있다고…….”
“또 시작이구먼. 어휴, 자네는 글자 해독한다는 사람이 말만 늘었어.”
“조잘거리기라도 해야 이 노동도 버틸 수 있지 않겠소?”
“됐네. 난 햇볕이나 쐬러 감세. 자네도 적당히 하다가 좀 쉬어.”
“싫소. 다 버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형님처럼 대충 대충은 안 살 거요.”
“자네도 삼 년만 더 지나 봐. 지루함이 말도 못 해.”
농담 같은 대화를 끝맺은 이번이 허리를 두들기며 굴을 나섰다.
굴은 길었다. 원체 길고 구불거려서 이 길을 외는 데만도 보름은 꼬박 걸리리라.
물론 이곳에 있는, 한때 승려였던 사람들은 눈 감고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내부 지리에 통달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최근에 들어온 막내만도 벌써 팔 년이 넘도록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후우.”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하는 이번의 얼굴에 상쾌함이 가득했다.
“역시 사람은 햇볕을 쐬어야 해.”
굴속은 생각보다 서늘하다. 야명주와 피습주가 같이 있어서 적당히 건조했고, 그래서 더더욱 서늘했다.
이번은 올해 백하고도 일곱 살을 더 먹었다.
평범한 사람은 한 갑자를 살기도 힘든 세상에 무려 백 살을 넘게 산 것이다. 심지어 백을 훌쩍 넘겼는데도 불구하고 일흔 정도로 보일 만큼 정정하기도 했다.
이번은 눈을 감고 진기를 운용했다.
우우우우웅.
단전에서 올라온 고즈넉한 기운이 전신을 돌며 체내에 침투한 냉기와 탁기를 몰아냈다.
이번이 입맛을 다셨다.
“내력의 움직임이 더 느려졌군.”
백 세가 넘도록 운공조식을 한 그의 내공은, 순후함으로 따지자면 가히 천하제일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깎고 또 깎아 내길 반복하며 몇 번의 완전(完全)을 거듭한 진기다. 그러한 진기가 없었다면 이 나이에 이만큼 정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내공에 한해 그렇다는 얘기였다. 강호의 혈풍에서 벗어난 지 삼십 년이 넘은 그는, 이제 여느 절정고수의 칼날을 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허, 나도 드디어 갈 때가 된 건가.’
내력의 움직임이 늦어졌다는 건 그만큼 머리가 느려졌다는 것을 뜻한다.
내공은 의념으로 움직인다. 하여 궁극의 경지에 달하면, 의지가 이는 순간 내력이 초식을 완전히 펼쳐 낼 만큼 빠르게 움직인다.
그 벼락과도 같은 수준에 이르진 못했지만, 이번 역시 한때나마 무극지경을 눈앞에 두었던 고수였다. 그러한 진기가, 이제는 의념이 집중되는 속도만큼이나 운행 속도도 느려진 것이다.
‘흐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이번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빙긋 웃었다.
“오래 살긴 했지.”
육십을 먹었을 때는 죽음이 두려웠다. 승려는 아니었지만, 불법을 믿고 따르는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주는 원초적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칠십을 먹었을 때, 공포에서는 벗어났지만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다. 결국 나라는 존재가 이승에서 사라진다는 게,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별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게 씁쓸했다.
그렇게 여든이 지나고 아흔이 지났을 때.
이번은 비로소 죽음을 온전하게,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축복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생물에게 있어 죽음은 예정된 휴식이다. 영원한 잠, 속세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더 열심히 활동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억겁의 세월을 쉬게 될 것 아닌가. 그 전에 고작 몇십 년을 바삐 움직일 뿐이었다.
불교 신자로서 어울리는 마음가짐은 아니었지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연의 장구한 흐름에 삶을 맡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번이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이, 허이. 나는 언제 죽을꼬오, 언제나 죽어 부처님을 뵐…… 응?”
이번이 눈을 끔뻑였다.
그가 보는 곳에는 덥수룩한 수염과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어느새 손톱 길이만큼 자란 모습이 인상적인 승려가 있었다.
바로 범오였다.
범오는 바위 밑에 앉아 반개한 눈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한 것인지, 그새 비쩍 말라 버린 모습이었다.
이번이 혀를 찼다.
“번뇌에 빠진 불쌍한 중생이 저기 또 있구먼.”
범오가 왜 저 지경이 되었는지는 탐경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연호정이란 아이도 보통은 아니지만, 가슴에 화(火)가 많이 쌓인 저 중놈도 보통 놈은 아니라고.
“제아무리 날카로운 비수라도 철 갑옷을 뚫지는 못하는 법이지. 연호정이란 아이의 독한 말에 충격을 받을 정도라면, 저 중놈도 나름대로 귀를 활짝 열고 살았다는 말이렷다?”
가만히 범오를 보던 이번의 얼굴에 일순 장난기가 일었다.
잠시 후.
촤아아아악!
“허어억!”
범오가 깜짝 놀라 후다닥 일어났다.
그 앞에는 바가지로 물을 끼얹은 이번이 껄껄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놈아. 그리 청승을 떤다고 없던 깨달음이 찾아오고, 쌓인 번뇌가 사그라진다더냐?”
“어, 어르신?”
“고민은 그만하면 되었으니 속이나 채우거라. 번뇌를 불사르려 해도 일단 살아 있어야 태우든 꺼트리든 할 것 아니더냐? 그러다 번뇌에 사로잡혀 죽겠다, 이놈아.”
범오의 표정은 얼떨떨함 그 자체였다. 너무 놀라기도 했고, 물을 끼얹은 사람이 까마득한 어른이라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번이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 말에 동의하는가?”
그러자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제의 생각도 같소이다. 일단은 살아야지요. 살아야 더 보고, 더 듣고, 더 느끼지요.”
“헐헐, 자네나 나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구먼. 당장 오늘 저녁에 숨이 넘어가도 아쉬울 게 하나 없는 나이인지라.”
“섭섭하긴 할 것 같소. 형님께서 가시면 말이오.”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오히려 축하를 해 줘야지. 지옥 같은 사바세계에서 이제야 벗어나셨다고 말이야.”
“허허허.”
이번이 웃음을 머금은 채 탐경 옆의 청년에게로 눈을 돌렸다.
“오호?”
연호정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던 이번이 돌연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그것참, 대단한 젊은이를 데려왔구만?”
느닷없는 웃음에 놀란 것은 비단 연호정과 범오뿐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호형호제해 왔던 탐경 역시 뜻밖이라는 눈으로 이번을 보았다. 데려온 청년이 누구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돌연 웃음을 터트리니 의아한 것이다.
이번이 웃음을 멈추고 연호정을 보았다.
“자네 이름이 연호정이라고 했던가?”
“……그렇소.”
“허! 대답 한번 가관이로다! 하지만 아우 말이 맞네. 거칠기는 한데, 오만하지는 않아.”
이번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물론 적에게는 달라지겠지. 아니 그런가?”
연호정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을 보더니 대뜸 광소를 터트리고는 친근하게 눈까지 찡긋거리는데, 얼굴에 경련이라도 온 줄 알았다.
다른 걸 떠나서, 이번이라는 노인의 기묘한 분위기가 연호정조차 쉽사리 대할 수 없게끔 하는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맑고 깊은 진기. 지극히 둔탁하여 하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내공이지만, 그 밀집된 힘이 이번이라는 노인네의 목소리를 타고 흐르자 편안한 위엄이 되어 분위기를 장악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연호정은 천하의 투왕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는 성격이었다. 천성 자체가 타인의 분위기에 눌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이 탐경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다 말해 주었나?”
“그뿐 아니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다 말했소이다.”
“푸헐! 그걸 그리 쉽게 말해 주면 어떻게 해? 중원 모든 불문이 입을 닫고 있거늘.”
“봐서 알겠지만, 혓바닥이 가벼운 친구는 아니라오.”
“그거야 나도 알겠네만, 사람 일이라는 게 또 모르는 게지. 저 아이가 입을 봉해도 강호는 항상 진실이라는 미명하에 비밀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를 바라지.”
연호정이 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그를 사로잡고 강제로 정보를 끄집어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아무리 강해도 미래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연호정 역시 패배를 겪는 순간이 올 것이며, 그 패배가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강호에는, 일반인이 상상도 못 할 수법들이 많다. 섭혼술이나 이름 모를 마공(魔功)에 당하면 또 모를 일이지 않은가.
탐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신(四神)의 계승자인데,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그런 수법에 당하진 않을 것이외다. 하물며 중원의 불문이 비밀에 부치고 있는 이 일이, 언제까지 불산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이번의 눈이 빛났다.
“사신의 계승자라…… 확실한가?”
“확실하오.”
“벌써 손을 섞어 봤다고?”
탐경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직 아니오.”
“우리 중 무신(武神)의 시선 안에 든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하지만 자네도 늙었지. 직접 부딪쳐 보지 않는 이상, 자네가 그리 말하던 신비인의 제자라고 어찌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맞는 말이외다. 하나, 그 이전에 소개나 시켜 주고 싶었소.”
“사람 참.”
이번이 다시 연호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다 들었다고?”
“그렇소.”
이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치매 걸린 늙은이들끼리 모여서 궁상떠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노인장들께서 치매에 걸렸을지는 모르지만, 중원 불문 전체가 정신병자 집단이라고 생각하진 않소.”
“뭐라? 푸하하하하!”
또다시 웃음을 터트린 이번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 정말 걸물이구만? 마음에 들어. 자네 얘기만 들었을 때는 세상에 그런 망종이 다 있나 싶었는데, 직접 보니 아주 호탕한 녀석이 아닌가!”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노인장들께서 불사의 비밀을 파헤친다는 말만 들었지, 그것이 사신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듣지 못했소.”
“으잉?”
이번이 탐경을 돌아보았다.
“다 말했다며?”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다 말했소.”
“그런데 사신과 연관된 건 얘기를 안 했어?”
“그렇소. 말했잖소. 서로 이것저것 알아보기 전에 인사부터 시키고 싶었다고.”
“……그 말에 홀랑 낚여서 따라온 저 녀석도 저 녀석이구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이번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그래, 이왕 말했다고 하니 다 터놓고 얘기해 보도록 하지. 아이야, 너는 우리가 하는 일과 사신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른다고 했더냐?”
“그렇소.”
“혹시 이건 알고 있느냐? 네가 연성한 사신무가, 삼백 년 전 고금제일의 전설을 만들었던 사방무제의 절기라는 걸.”
“확신까진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었소.”
“유추라…… 그래, 좋다.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보자.”
이번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네 녀석은, 삼백 년 전의 인물인 사방무제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게 무슨……?”
“네게 사신무를 연성해 준 사람, 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천하 어떤 무림사서(武林史書)에도 사방무제에게 제자가 있었다는 소리는 없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