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사신(四神)으로 엮인 과거 (3)
“음.”
모용우가 눈을 빛냈다.
“해서, 대수께서는 그분을 따라가셨다고?”
“그렇습니다. 내일 이맘때쯤 다시 돌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알겠네. 고생이 많았어.”
“그럼.”
윤호가 가고, 그 자리에는 모용우와 묵비, 그리고 소방과 사마현이 남았다.
모용우가 소방에게 말했다.
“여로에 고생이 많았다.”
소방이 코웃음을 쳤다.
“너희 부대는 속 편해서 좋겠군.”
“음?”
“수장이란 작자가 무공보다 말솜씨가 더 좋더군. 귀신도 홀리겠어.”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언변도 능력이지. 네 말마따나 그런 수장을 둔 덕분에 어디 가서 손해는 안 본다.”
“그 잘난 무공이 주둥이의 반도 못 따라가는 게 애석하겠어.”
“적어도 너보다는 강하니 다행 아니던가?”
화아악.
소방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내공이 봉쇄당했지만 그래도 특유의 살기는 어디 가지 않아, 순식간에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내공 풀고 제대로 붙게 하자고 건의해 보는 건 어때?”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투사가 아니라 전사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한번 잡은 먹잇감을 다시 풀어 주는 바보짓 따위, 절대 하지 않는다.”
“흥! 그렇다면 너희 수장은 바보가 분명하군. 날 놔주겠다고 공언했으니.”
“쓸모가 다할 때까지는 붙잡아 두겠다는 말은 생략했군. 그 문제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가만히 모용우를 노려보던 소방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자유를 얻는 즉시 너부터 상대해 주마.”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지.”
거칠게 내뱉곤, 소방이 몸을 홱 돌려 자기 거처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소방의 뒷모습을 보던 모용우가 사마현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사마현이오만.”
“자네 이름 말고, 자네가 제조한 독.”
사마현의 눈이 빛났다.
“적심산(積心散)이오.”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의외로 사마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초기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는 독이오. 애초에 들어가는 약재도 몸을 보하는 거라, 오히려 몸 상태가 더 좋아지고 기의 순환도 활발해지지.”
“한데?”
“좋은 것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 하물며 독으로 쓰는 물건이니 오죽하겠소? 적심산은 약력에 깃든 자연 독을 걸러 심맥에 쌓아 두는 독이오. 당장에는 이상이 없지만 한두 달이 지나면 가슴이 한 번씩 뻐근해지기 시작할 거요.”
“…….”
“그때 발견해도 치료는 어렵지 않소. 다만, 내공으로 치료하려면 압도적인 밀도의 내력이 필요하오. 그러나 그 시기를 넘겨 버리면 성천십삼좌 정도의 고수가 아닌 이상 자체적인 해독은 불가능하오.”
“확신하나?”
“나는 확신하오. 물론 항상 예외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정도로 말하는 걸 보니, 확실히 보통 독은 아닌 모양이었다.
“해독약은?”
“없소.”
“……없다고?”
“그렇소. 다만, 심맥이 썩어 들어가는 시기를 늦춰 주는 약이 있을 뿐이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하면, 그 적심산이라는 독을 해독하지 못하면 평생 그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길어야 십 년이오. 약으로 늦춰도 평생 장수를 누리진 못하오. 애초에 심맥을 썩게 하고 혈행에 이상을 주는 독인데 어찌 장수를 하겠소?”
“……지독하군.”
사마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지도 몰랐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암살자로서 살아온 그였다. 천성이 선하다 한들, 그러한 환경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 본 그는 이미 암살자 이외의 삶은 상상할 수도 없게 되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모용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축객령을 내렸다.
“자네도 이만 쉬게.”
“안 그래도 그러려 했소.”
“아, 그 전에 하나만 물어도 되겠나?”
“……?”
“자네는 어찌 이곳에 온 것인가?”
사마현이 다소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걸 내일 그자에게 물어볼 생각이오.”
어찌 되었든 연호정의 권유로 왔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사마현까지 거처로 돌아가자 모용우와 묵비만 남았다.
묵비가 말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요. 광동 민생 문제요.”
“그건 그렇네만.”
모용우가 입맛을 다셨다.
“듣자 하니, 상당히 강압적으로 해결한 모양이군.”
“평소 연 공자, 아니 대수님의 일 처리 방식을 생각하면 별로 놀랍지는 않네요.”
“맞네. 하지만 상대는 제국의 관리들이야. 지금 당장은 고개를 숙인다지만, 혹여라도 앙심을 품었다면 골치가 아플 수도 있어.”
“각 부의 최고 수장들이라고 들었어요. 그만한 자리에 앉은 자들인데, 설마하니 앙심까지 품으려고요?”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내 자네보다 세상을 더 안다고 감히 자부할 수는 없지만, 상계 일을 할 때도 그렇고 무림맹 때도 그렇고, 한 가지 배운 게 있네.”
“……?”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손해 보거나 억압당한 것을 절대로 잊지 않아.”
“……!”
“상대에게 고개를 한번 숙였으면, 훗날 반드시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지. 그걸 안 하면 권위가 서질 않는다고 생각하더군.”
“그런…….”
“노력과 성품으로 직책을 거머쥐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직책이 사람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네. 그런 사람들은 권위와 권력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으며, 대개가 책임지지 않는 권리에 익숙해져 있지.”
묵비의 얼굴에 미약한 걱정이 일었다.
“그럼 어쩌죠?”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대수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네. 아니, 애초에 옳고 그름을 논할 필요가 없지. 그저 떨어진 명령을 수행하면 그뿐이야. 다만…….”
“……?”
“대수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들의 공격을 받아 낼 만한 자신이 없으면서 그리 과격하게 나가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네.”
모용우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뭐, 일단은 현재만 생각하세. 결과적으로 관리들의 마음을 돌렸으니, 근시일 내에 광동의 분위기가 바로잡히겠지.”
“아, 네.”
“자네도 여로에 고생이 많았네. 이만 들어가 쉬시게.”
“알겠습니다. 군장님도 쉬세요.”
“그럼세.”
모용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날이 어두웠다. 날은 슬슬 후덥지근해지는데, 왠지 모르게 으슬으슬해지는 기분이었다.
“별문제 없겠지, 아마도.”
* * *
산 밑에서 올려다본다면 어느 산이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불산 역시 크고 넓었다.
그리 크고 웅장한데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뽐낸다. 사방의 하늘이 어두운데도 불산의 하늘은 유독 맑게 갠 듯했다.
“보이는가? 저기, 저곳 말일세.”
“그렇소.”
“저 동혈(洞穴)이 바로 입구일세. 저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수많은 굴이 이어져 있지. 우리는 바로 저곳에서 살고 있다네.”
연호정이 눈을 가늘게 떴다.
후우우우우웅.
온도는 습했고 날은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연호정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 동혈에서부터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심상치 않은 곳이다. 감각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사마외도를 걷는 마인들이 거하는 곳도 아니고, 살기 짙은 살인마들이 거하는 곳도 아니다. 저곳에서 어떤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글거리는군.’
야율적과의 전투로 무공의 경지가 상승한 지금의 연호정은, 과거 흑암제 시절의 깨달음을 보다 많이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수준이라도 감각이 다르고 내기의 민감한 정도가 다르다. 본래라면 그냥 지나쳤을 길이지만, 탐경이 동혈을 지목하자마자 모든 감각이 그곳으로 집중되어 은근하게 흐르는 기(氣)의 밀도를 읽어 냈다.
‘강자들이 많아.’
숫자는 판단 불가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서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는지는 연호정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무디군.”
“음?”
연호정이 탐경을 힐끔거렸다.
“노인장도 노인장이지만, 저곳에 사는 고수들 대부분의 진기가 무디오.”
“허! 그게 느껴지나?”
“기로 느낀다기보다는 그저 감이오. 만약 지금까지 실전을 왕성하게 뛴 고수가 있었다면, 훨씬 더 위험하게 느꼈겠지.”
탐경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리가 얼마인데 그것을 느낀단 말인가. 자네는 참으로 날 놀라게 하는군.”
“별것 아니오.”
“별것일세. 지금 자네의 경지는, 못해도 구파 장문인급 이상일 거로 생각하네. 충분히 대단하지만, 그 경지에 자네처럼 감각이 날카로운 사람은 달리 없을 것이야.”
“그럼 그렇다고 생각하겠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탐경이 빙긋 웃었다.
“닮았구먼.”
“뭐가 말이오?”
“그 사람과 몹시 닮았어.”
“누굴 말하는 거요.”
“자네 사부로 추측되는 사람.”
“……!!”
연호정의 눈이 조금 커졌다.
탐경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림의 촉망받는 기재였을 시절의 일이네.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번민에 휩싸여 있었지. 무공의 정체기가 강하게 왔거든.”
“…….”
“그때, 우연히 그와 만났네. 문답무용이었어. 그는 날 보며 웃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부터 휘둘렀더랬지. 결과는 자네도 짐작하겠지?”
“…….”
“완벽한 패배였네. 차라리 양껏 두들겨 맞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내공을 쓰지도 않은 채 내가 구사하는 소림의 무공을 뿌리부터 파훼해 버리더군.”
“……설마.”
연호정이 떠듬떠듬 말했다.
“그분을 만나셨소?”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면, 자네가 사신을 연성한 줄은 절대 몰랐을 것이네.”
“……!”
“자네는 그와 몹시 닮았어. 생김새도 체격도 전부 다 다르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가히 판박이야. 한데 그간 자네를 겪어 보니, 눈빛만이 아니라 그 과격함으로 포장된 지혜마저도 닮았더군.”
물끄러미 탐경을 보던 연호정이 다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은, 어디로?”
“그 사람이 자네 사부라면, 자네가 더 잘 알 것 아닌가?”
모른다.
회귀한 이후엔 스승을 만난 적이 없어 몰랐고, 흑암제 시절에는 스승이 먼저 자신을 떠나 버렸다.
그분은 언제나 그러했다. 홀연히 자신의 앞에 나타나 무너져 버린 영혼을 보듬었고, 수년간 무공을 전수하시곤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하자 또 홀연히 사라지셨다.
놀랍게도 스승의 존재는 연호정에게 있어서도 신비로 점철되어 있었다.
정이 있는 분이셨으나 여느 사제지간만큼의 깊은 정을 주진 않으셨다.
그렇다고 가르침에 소홀했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엄격함에 있어서는 아버지인 연위 이상이었으며, 와중에 가르쳐 주신 삶의 지혜와 세상의 진리는 현자(賢者)가 품고 있는 보물과도 같았다.
지식, 무공은 물론 나아갈 길을 어떻게 만드는지까지도 가르쳐 주신 은인.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던, 참으로 어렵고도 보고 싶은 존재.
“그가 내게 그러더군. 언제고 연이 닿으면 자기 제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사신의 전승자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고 하였네.”
“…….”
“그게 자네였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어. 그의 제자라는 것을.”
가만히 하늘을 보던 탐경이 고개를 내려 연호정을 보았다.
“불문 전체가 입을 봉하고 있지만, 자네에게는 말해 줘도 될 것 같구먼. 한때 불문의 승려였던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무엇이오?”
“영원의 삶일세.”
“그게 무슨 말이오?”
탐경의 눈이 깊어졌다.
“죽지 않는 삶. 즉, 불사(不死)에 관해 조사하고 있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