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전설과 현실 (4)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소.”
“굉장한 배포로구만.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 앞에서 그런 폭언을?”
탐경이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정도 폭언을 들을 만했소이다. 그처럼 뛰어난 후배를 너무 오랜만에 보는지라,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동했소.”
이번(李幡)이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 놈보다 칠십 년은 더 산 선배에게 그런 폭언을 가하다니. 이걸 배포가 좋다고 해야 할지, 버릇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허허허, 소제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지요.”
“으응?”
탐경이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불문과의 연도 끊었고, 속세와의 연도 끊었소이다. 남은 생을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며, 우리에게 가족은 이곳에 남은 사람들뿐이오.”
“음.”
“세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세상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한 주제에 후배는 뭐고 존중은 또 뭐요? 그런 걸 따지려거든 우리 역시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소?”
“…….”
“결국 다 돌고 도는 게 아닌가 싶소. 규율과 법도를 논하려거든 그 속에 속해 있어야 마땅하지. 남에게 우리가 좋을 대로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우리 편한 대로 살겠다고 떵떵거리면, 저 흑도의 무뢰배들과 다를 게 무어요?”
이번이 헛기침을 했다.
“사람 참,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뭐가 되나.”
“그냥 그렇다는 말이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녀석의 반응도 이해가 가더이다.”
“어찌 되었든, 자네가 녀석의 거래에 응한 것이로구만?”
“어쩌겠소? 거절하면 진짜로 도끼를 들고 덤벼들 기세더구만. 이 나이 먹고 새파랗게 어린 후배와 드잡이질을 할 수도 없고.”
“쯧, 차라리 도망이라도 쳐 버리지 그랬나.”
“그게 낫겠다, 싶었는데 또 내놓은 게 사신(四神)이라 도망도 못 쳤소이다. 궁금한 걸 어쩌오?”
비록 세상과 연을 끊었다지만, 그래도 두 사람 모두 백도 정파의 협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고수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도망이란 말이 이리 쉽게 나온다.
과연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다. 단어 선택만 봐도 속세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고 있었다.
이번의 눈이 빛났다.
“그 아이, 이름이 뭐라고?”
“연호정이라 하더이다. 저 강동 벽산연가의 큰아들이라던데.”
“벽산연가라…… 허허, 그 무가(武家)가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이 현역으로 활동할 때만 해도 벽산연가는 신생 무가였다.
물론 연가 자체는 오랫동안 그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지닌 강력한 무력을 뽐내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 알기로 연가는 중원 정통의 검학을 쓴다던데, 사신을 연성했다니? 사신과 이어진 가문이었던가?”
“그건 알 수 없소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사신은 결코 한 집단의 무공이 될 수 없소. 아마 그 아이에게 일인전승이 되었을 확률이 높소이다.”
“음, 그도 그렇지만.”
이번의 눈이 빛났다.
“자네가 봐서 다행이군. 자네가 아닌 우리 중 누구도 사신의 흔적을 살필 순 없었을 터이니.”
“……사실, 많이 놀랐소. 놀랐고, 믿기지도 않았지. 내 일생을 불산에서 보낼 결심을 하게 만든 사람, 그 사람의 진전을 이은 청년이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소이다.”
“흠.”
탐경이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보는 곳은 천장이되, 그의 눈은 과거를 좇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소. 소림의 온갖 기예가 손짓 몇 번에 파훼당하는 광경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지.”
“…….”
“그렇다고 그 사람이 본격적으로 진기를 드러내거나 기파로 날 짓누른 것도 아니오. 말 그대로 파훼였소. 한데 소림 무공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도 않았소.”
탐경이 눈을 감았다.
“그자는 내가 무공을 구현하는 순간부터 나의 모든 약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거요.”
이번이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들은 얘기지만, 정말이지 믿기지가 않는구만. 소림의 무공을, 그것도 자네만 한 인물이 직접 구사하는 절정의 무공을 보는 즉시 파훼하는 것이 정녕 가능한 일인가?”
“모르겠소. 확실한 것은, 적어도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는 것뿐이오.”
“허.”
“약점을 보는 눈이라……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진지하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능력이오. 제아무리 복잡한 무공도 한 번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천재가 왕왕 태어나기도 하지만, 그 무공의 파훼법을 즉각적으로 그려 내는 사람은 가히 백년지재(百年之才)라 할 만하오. 하물며 떠올린 파훼법을 곧장 구현해 낸다는 것은 종사급의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외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시오.”
“대체 그 녀석의 어떤 부분에서 사신을 떠올렸나? 자네는 ‘그’ 신비인의 진기 한 올도 느껴 본 적이 없다고 하였거늘.”
“눈과 기질이오.”
“으응?”
탐경이 입맛을 다셨다.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소이다. 다만 그 후배의 형형한 안광이 과거 그 신비인과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것, 그리고 독특한 기질 역시 갈무리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극히 유사했던 것.”
“……음.”
“다 떠나서, 딱 보는 순간 알겠더이다. 녀석이 그자의 후인이라는 걸. 그런 것은 내공이나 초식을 본다고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외다.”
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인연은 인연인 게로구먼.”
“그러게나 말이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이곳 불산에 처박혀서 옛 전설의 일막을 찾으려 드는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소이다.”
“이 사람아.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야 쓰겠는가. 자네가 그리 말하면, 지난 세월 이곳에 틀어박혀 생을 마감한 선사들이 뭐가 되겠나.”
“허허허.”
탐경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제 슬슬 일어나 봐야겠소이다. 지금 가야 약속 시간에 안 늦을 듯싶소.”
“이번에 가면 버릇을 고쳐 놓게나. 내 증손주 말을 들어 보니, 그 녀석의 명성이 당대 강호를 진동시킨다고 하더구먼. 그 연배에 그 정도 무공이면 충분히 오만해질 만하네.”
“녀석은 거칠지언정 오만한 놈은 아니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오.”
“그런가? 뭐,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여하간 다녀오겠소. 형님도, 그리고 다른 형제들도 사나흘쯤 쉬시오. 간만에 몸 쓴다고 피곤했을 텐데.”
“어련히 알아서 할 터이니, 자네나 몸 성히 다녀오게.”
탐경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가만히 그의 등을 보던 이번이 한마디 던졌다.
“아직 그 신비인에게 사로잡혀 있는가?”
탐경이 걸음을 멈추었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동굴 밖을 보던 탐경이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사로잡혀 있다는 말은 좀 그렇지만, 앞으로도 잊기는 힘들겠소이다. 형님이라도 그랬을 것이오.”
이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쉽게 잊기 힘든 경험이었을 것이다. 천하무적이라고 자신했던 소림의 무공이 조각조각 파훼당하는 충격을 어디서 느끼겠는가.
하물며 그 신비인은, 패배한 탐경을 앉혀 두고 수준을 달리하는 새로운 무리(武理)와 기존 무공에서 보완할 점을 무려 이틀이 넘는 시간에 걸쳐 전해 주었다고 하였다.
바로 그때의 경험, 그때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탐경은 소림 역사상 최강의 나한당주(羅漢堂主)라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탐경이 현역이었던 시절, 그의 명성은 사해를 뒤덮고 있었다. 당시 소림의 방장보다도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오죽했을까.
그 이면에는 사신(四神)의 전승자인 신비인이 있었다.
“인연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소. 훗날 제자를 키우게 되면, 그 제자를 세상에 보내게 되면 저절로 알 수 있을 거라 하더니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신(四神)의 전승자임을 깨닫게 될 거라고 하더니만…….”
* * *
“연 공자.”
“알아.”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거지꼴을 한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탐경이었다.
탐경이 빙긋 웃었다.
“기다렸는가?”
“늦지 않게 오셨군.”
“물론이지. 도끼 들고 협박하는 살벌한 후배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약속은 지켜야지.”
“반 각 후 출발할 것이오.”
“허허, 그때와는 달리 말투가 제법 들어 줄 만하구만?”
“거래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사소하다…… 그래, 이건 사소한 것이지.”
그때 그 사람의 제자와 이런 식으로 만났는데, 그 말마따나 말투 따위야 아주 사소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탐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묵비가 있었다.
“허어, 이 아이는 또 누구인가?”
멍하니 탐경을 보던 묵비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후배 묵비가 강호의 노선배님을 뵙습니다.”
묵비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이리 가까이 다가오자 탐경의 몸에서 뿜어지는 농밀한 기도가 그녀를 압도한 것이다.
‘엄청난 강자!’
연호정보다도 강하다.
아니, 당대 무림맹에서 본 누구보다도 강했다. 적으로 마주했던 소방보다도 훨씬 더 강했다.
이것은 내공이나 초식의 차이를 떠난 문제였다. 눈앞의 이 노인은, 현재 연호정이 구축한 경지보다 한 단계 위에서 오랫동안 연마한 일세의 고수였다.
‘설마……!’
성천의 강자란 말인가?
그때였다.
“그건 아닐세.”
묵비의 표정과 기도에서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단숨에 알아챈 그였다.
“비록 후배들이지만, 성천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의 경지는 나와는 또 다르네. 그럴 수밖에 없지. 그들은 오랜 세월 무(武)를 좇았지만, 나는 이 경지에 진입한 이후로 무에 녹아든 시간이 별로 없었어.”
탐경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겸양이 아닌 분명한 사실일세. 내 비록 자네나 이 친구의 눈엔 뛰어나 보여도, 성천에는 이르지 못했네. 그리고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깊어지겠지.”
“……!”
“그나저나 자네도 놀랍구먼. 이 청년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데 그만한 무공이라…… 허허, 본사의 차기 나한당주라도 감당키 어렵겠어.”
묵비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한데 궁술을 쓰는가? 독특하구먼. 당대 중원에 자네만 한 걸물을 낼 궁술 문파가 존재했던가?”
사신의 이름은 알아도 관일의 이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때, 연호정이 손을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 합시다. 마지막 한 사람이 오고 있소.”
“음.”
탐경이 소로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사공(邪功)이라?!’
쿠르릉.
제법 큼직한 마차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마차를 모는 마부가 아닌, 마차 안의 누군가에게서 사기를 느낀 그였다. 비록 그 양이 극히 적어 신경 쓰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정도지만, 일단 느껴 보니 기의 농도만큼은 연호정 못지않았다.
탐경이 물었다.
“누구와 함께하는 것인가?”
“말 안 듣는 관리를 설득하는 데에 도움이 될 법한 망할 년이오.”
“……으응?”
쿠궁.
마차가 멈추었다.
마부를 자처한 멸사군의 윤호가 마부석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왔습니다, 대수님.”
“고생했다. 길은 외워 뒀지?”
“물론입니다.”
연호정이 탐경과 묵비에게 말했다.
“탑시다. 곧장 좌포정사의 관저로 갈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