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전설과 현실 (3)
끼이이익!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소방은 있는 대로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창으로 빛이 들어오긴 했지만, 너무나도 미약한 양이라 독방 내부만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갑자기 환한 빛을 보자 너무 자극적이어서 눈물이 나왔다.
그때였다.
푸스스스.
소방의 몸이 덜컥 멎었다.
얼굴을 가린 손이 덜덜 떨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지독한 살기가 그녀의 심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욱신!
부러진 넓적다리에서 무서운 통증이 올라왔다.
어떻게든 뼈는 맞췄지만, 내공을 봉쇄당한 데다가 식사도 부실했고 환경도 좋지 않았다. 전신 가득 퍼져 있는 미약한 진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상처가 곪아서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뼈는 거의 다 붙었고 통증도 미약했다. 한데 남자의 살기를 대하는 순간 허벅다리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통증에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소방이라 했던가.”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숨도 못 쉴 것 같은 압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예상대로군. 내공을 봉쇄해도 회복이 빨라. 어중간하게 단련된 신체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끼이이이익! 쿵!
문이 닫혔다.
소방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 연호정이 소방의 맞은편에 앉더니, 작은 보따리 하나를 내려놓았다. 워낙 좁은 공간이라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일 장도 채 되지 않았다.
“먹어라.”
“…….”
“먹기 싫은가? 배가 많이 고플 텐데.”
“……무슨 수작이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둠을 불사를 듯 시뻘건 광채를 뿜는 두 눈, 그럼에도 표정은 어리둥절하다.
눈빛과 표정이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더더욱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수작?”
소방이 침을 삼키곤 말했다.
“음식에 독이라도 탔나? 죽일 거면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
“말 잘했다. 죽일 거면 진즉에 죽였어. 귀한 음식에 독이나 타는 짓거리, 나는 안 한다.”
“더 고통스럽게 죽일 의도일는지도 모르지.”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얕은 호선을 그리는 입가. 활화산처럼 뜨거운데도 묘하게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붉은 눈이 소방의 심박수를 두 배로 끌어 올렸다.
“일각이 일 년처럼 느껴질 고문 수법 따위,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기도 어렵다.”
“……!!”
“주는 호의는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여. 이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 아닌가?”
소방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누가 봐도 무리해서 짓는 표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 몰라서 살려 뒀는데 이제야 써먹을 구석이 생겼나 보지? 알뜰살뜰해서 좋군.”
“아껴야 잘 살지. 버린 물건에 미련을 갖진 않지만, 애써 손에 넣은 물건은 어떻게든 써먹는 주의라.”
“…….”
“네 말마따나 혹시 몰라서 살려 둔 거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어떻게든 써먹을 데가 생겼어. 그러니 치료 잘 받고, 먹을 것도 잘 먹어서 체력 관리에 힘쓰도록.”
“그냥 죽여.”
“죽기 싫어서 발악하던 년의 주둥이에서 나올 말이 아닌데.”
소방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반면 연호정의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그리고 미소가 짙어진 만큼 위압감도 짙어졌다.
“이 세상에 나만큼 사음교를 증오하는 사람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난 너를 살려 두었어. 사음교의 고위급 인사인 너를.”
“…….”
“살기가 충천하던 그 급박한 상황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건 내 취미가 아니야. 그런데도 널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뭐일 것 같으냐?”
“…….”
“넌 야율적, 그놈과 달라. 충성을 논하기 이전에, 삶에 대한 집착이 지독하리만치 강하더군.”
“닥쳐!”
소방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따위 모욕에 흔들릴 내가 아니야! 당장 죽여! 너 같은 놈에게 이용당하는 물건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삶이 보장되는데도?”
“말 같지도 않은……!”
“대충 다 써먹었다고 생각되면, 그땐 널 보내 줄 것이다. 네가 중원 어느 지역에서 살든, 다시 사음교로 돌아가든 막지 않겠어.”
“……!!”
소방은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이 자세를 편하게 했다.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반대쪽 무릎을 세워 앉는데, 그 자세가 마치 제 안방에 있는 것 같았다.
편안하고 개방적인 자세임과 동시에 은근히 상대를 압박하기도 좋은 자세다.
연호정은 이런 걸 잘했다. 상대의 심리에 따라 어떤 어조, 어떤 자세를 취해야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네년이 어떤 성격인지 더는 알 바 아니야.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해. 넌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필요하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을 배신해서라도 살고 싶어 하지.”
“입 닥쳐!”
“그게 아니라면 죽어라.”
“……뭐?”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주작화기 특유의 불꽃 같은 색에서, 점차 피처럼 끈적한 색으로 바뀐다. 살기만으로도 상대의 심맥을 터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자결하라고.”
“……!!”
“네년 목숨 하나 취하는 데에 굳이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자결해라.”
“이, 이놈!”
“그렇게나 죽음을 원하는데 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냐? 알아서 죽어라. 물론 정성스레 묻어 줄 의리는 없으니 어느 야산 들개들의 먹잇감이 되겠지만, 그 정도 각오는 했겠지?”
“…….”
“도대체 넌 무엇을 위해서 여태 살아 있는 거냐? 원한다면 진즉 자결할 수 있었을 텐데. 설마하니, 우리가 널 웃으며 반겨 주기라도 할 것 같았나? 사음교로 얌전히 돌려보내 줄 줄 알았어?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텐데?”
“…….”
“그도 아니면 설마, 도주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소방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 자신도 왜 자결하지 않았는지 몰랐다. 혈음사기는 무지막지한 내공 봉쇄로 인해 손톱만큼도 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봉쇄력은 강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직감할 수 있었다. 내공 봉쇄의 시전자가 직접 풀어 주지 않는 이상 평생 혈음사기를 운용할 수 없으리라는 걸.
말하자면 도주는 절대 불가능이다. 상대도 바보가 아니니, 당연히 자신의 내공을 풀어 줄 리도 없다.
그렇다면 상대가 자신을 이용하거나 고문하는 결과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방은 자결해야 했다. 교를 위해서 죽어야 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정보를 불면 안 되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결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자결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려 본 적조차 없었다.
소방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대체 왜?’
물끄러미 소방을 보던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져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자존심을 챙기기엔 너무 먼 길을 왔어.”
“……너는 몰라.”
소방의 눈에 핏발이 섰다.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듯 시뻘게진 눈에 은근한 공포와 혼란이 깃들었다.
“너희는 몰라. 본교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 바 아니다.”
“본교는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
“새삼스러울 것도 없군. 그건 너희 그 빌어먹을 사음교만의 특권이 아니야. 세상 어떤 조직이라도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정도가 아니야! 본교의 신(神)은……!”
“정말 사음교가 모시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분명 악신(惡神)일 것이다. 세상 어떤 신이 자신을 따르는 교도들에게 그리 박정하단 말이냐.”
“너는 교리에 대해 몰라!”
“그따위 교리 몰라도 사는 데 하등의 지장도 없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
“……!”
“신을 논함에 있어 경외보다 공포를 느낀다면, 애초에 그러한 신은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너희는 신을 존경과 경배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대상으로 보는 듯한데, 대체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소방의 눈이 커졌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삶에 대한 욕구가 ‘배신’을 떠올릴 정도로 강렬한 그녀였지만, 결국 그녀 역시 어릴 적부터 교리에 세뇌당한 평범한 교도일 뿐이었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보따리에 든 것은 약식(藥食)이다. 그 약식을 만들기 위해 내 부하들은 고기 한 점 더 먹을 걸 못 먹고 있어.”
“…….”
“먹고, 제대로 회복해라. 내일 다시 찾아올 테니, 그때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면 손수 죽여 주마.”
쾅!
문이 닫혔다.
작은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보따리를 비추었다. 그 보따리를 보는 소방의 얼굴은 엄청난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스르륵.
독방에 보자기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대수님.”
“말해라.”
“죄수가 식사를 끝냈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알겠다.”
여국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참, 옥청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회복세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습니다. 의원의 말로는 닷새쯤 지나면 신법을 펼치기에 무리가 없을 거라 합니다.”
“알겠다. 잘 보살펴 주도록.”
“예.”
그렇게 여국이 방을 나섰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연제.”
대수가 아닌 연제다. 공적인 얘기가 아닌 사적인 얘기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는가?”
“뭘?”
“소방이라는 사음교도 말일세.”
“음?”
모용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약식에 만성 독약을 넣지 않았는가.”
“그게 뭐 어때서?”
“…….”
“난 적을 믿지 않아. 저년이 언제, 어떻게 돌변할 줄 알고 얌전히 회복시키겠어?”
“하지만…….”
“말 머리를 돌리려면 고삐는 필수야. 깔끔히 죽일 게 아니라면, 뼈마디가 으스러질 때까지 써먹어야지.”
연호정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텁텁한 입 안이 시원해졌다.
“아직 광동의 분위기가 뒤숭숭해. 이 분위기를 서둘러 잡으려면 저 망할 년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이야.”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내, 연제에게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다만, 오늘 의원이 내게 와서 말하더군. 무림맹의 일 처리치고는 지나치게 사악한 것 아니냐고.”
“욕은 내게 하라고 해.”
“그게 문제가 아니잖나. 그 독약은 의원이 직접 처방한 약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모용우가 한옆에서 조용히 팔짱을 끼고 있는 사마현을 바라보았다.
“저 친구가 제조하긴 했지만 말일세.”
사마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그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내 정의(正義)에 적에 관한 포용 따위는 없어. 상대가 적이라면 천 번이라도 속이고 만 번이라도 이용할 거야.”
“…….”
“이 문제는 그만 얘기하는 게 좋겠어.”
“후우, 알겠네.”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네. 연제도 푹 쉬게나.”
방을 나서려는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불쑥 말했다.
“모용 군장.”
“말씀하십시오, 대수님.”
“이번 일이 끝나면, 그 즉시 탕마군에 갈 걸세.”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영광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모용우가 방을 나섰다.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던 연호정이 재차 물을 마셨다.
“……쓰군.”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