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23화 (422/963)

423화. 전설과 현실 (2)

“……!!”

연호정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런 순간에, 설마하니 자신의 사부와 사신무의 정체를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진지함으로 한껏 빛나던 탐경의 눈이 이내 특유의 담담한 눈으로 돌아왔다.

“역시 그랬구만. 사신을 연성했어.”

“당신…….”

너무 놀라서일까?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떠듬떠듬 말했다.

“어, 어떻게 사신을 알고 있는 거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신무는 역사에서 잊힌 무공이다. 정작 연호정조차도 회귀한 이후에야 이 무공의 연원이 삼백 년 전 전설의 고수인 사방무제(四方武帝)였다는 걸 알았을 정도니까.

물론 그런 방면에 있어서 연호정이 워낙 무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사방무제의 무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나마 지금은 멸문하고 없는 구주명가가 사신무를 기괴하게 개조하여 뒤끝이 안 좋은 마공(魔功)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그런 그들조차도 그것이 사신무였다는 사실은 몰랐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묵직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현무기였다. 그의 놀란 마음을 방어하고자 현무공이 저절로 발동된 것이다.

탐경의 눈이 번쩍였다.

“그것이 사신의 기운인가?”

“…….”

“허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무겁구먼. 수기(水氣)를 기반으로 한 것 같은데, 내가 보는 자네의 성격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

가만히 탐경을 보던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솔직히 말했다.

“사신의 일부일 뿐이오.”

“일부?”

“그렇소.”

“하면 사신의 무공은, 하나가 아니라 네 개란 말인가?”

사신(四神), 네 방위의 신이다. 그중 일부라는 대답에 진기(眞氣)도 네 가지 성향을 띈다는 걸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탐경의 말에서 유추 이상의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신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무공에 대해 자세히는 몰랐던 것 같았다.

‘대체 이 자는.’

독특한 자다.

자신과 스승밖에 모르는 사신무를 알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저 순진함이었다.

아무리 후배라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표정과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장난기는 덤이다. 전전대 인물이라면 못해도 백 세에 가까울 텐데,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뭐 하는 작자인가.’

탐경이라 하였다. 경전을 찾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체 어떤 경전을 찾고 있는 것이며, 사신에 대해서는 어찌 알고 있는 것일까?

설마하니, 그가 찾는 경전이 사신무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

“……됐소.”

연호정은 의문을 접었다.

자신의 무공을 아는 자, 그리고 스승이 누구냐고 묻는 자.

그런 질문을 했으니, 연호정으로서도 묻고 싶은 것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신에 대한 것이나 이 노인이 뭘 하는지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임무다.

이번 음신을 제거하는 작전에서 수많은 부하가 죽었다. 그게 최선이었다곤 하더라도, 수장인 자신의 책임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신무가 제아무리 대단한 무공이라 한들 부하들의 목숨보다도 귀할까.

연호정은 죽은 부하들을 위해서라도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책임이 있었다.

“대답은 했소. 이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으시오.”

탐경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자네는, 내가 자네의 무공에 대해 어찌 아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것인가?”

“궁금하오.”

“한데 어찌? 내가 알기로 사신의 무공은 맥이 끊어진 지 삼백 년이 되었네. 게다가 이 무공의 마지막 계승자는…….”

“이보시오, 노인.”

노인이라는 평범한 단어가 이렇게 무지막지한 칭호로 들릴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당신이 내 무공을 어찌 아는지, 내 스승을 묻는 저의가 무엇인지는 둘째요.”

“……?”

“난 부하를 잃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임무를 위해 이 자리에 왔소. 당신의 그 말 같지도 않은 장난질이 혹시라도 우리 임무에 영향을 줄까 싶어서.”

화르르르르륵!

연호정의 동공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작화기의 발현이었다. 그의 두 눈에 서린 불꽃 같은 살기가 탐경을 압박했다.

“말하시오. 당신, 관부와 연이 있소? 기분 나쁜 장난질이었지만, 단순히 장난처럼 들리진 않았소.”

“…….”

“연이 있다면 어디까지 선이 닿아 있는지, 이 일에 개입할 것인지, 우리를 방해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전부 말하시오.”

조금 전 연호정이 크게 놀랐다면, 이번에는 탐경이 경악할 차례였다.

‘이 녀석 봐라?’

궁금증이 말도 못 하게 클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신에 관한 사항을 한 귀로 넘겨 버렸다.

탐경은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자네의 무공이 어디서 왔는지, 내가 그 무공을 어찌 알고 있는지,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겐가?”

“내 분명히 말했소. 지금은 그따위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고.”

“그따위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사신의 무공은 삼백 년 전, 전설로 전해지는……!”

콰아아아아앙!

무지막지한 진각이 야산을 통째로 흔들었다.

범오는 흔들리는 눈으로 연호정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연호정이 밟은 땅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그 발 바로 아래서부터 시작된 거미줄 같은 금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땅에 퍼져 있었다.

‘무시무시한!’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었다. 불꽃처럼 사납고 태산처럼 묵직한 진각은 소림의 어떤 어른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 충격적인 힘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연호정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지금이라도 당장 도끼를 들으리까?”

“…….”

“나이를 얼마나 자셨는지도 모르겠고, 굴에 얼마나 처박혀 살았는지도 모르겠지만, 개소리를 지껄이려거든 사람이 아닌 하늘을 보고 짖으시오.”

범오가 외쳤다.

“연 대수! 한 번만 더 그런 망언을 뱉으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오!”

연호정 역시 버럭 소리쳤다.

“용서하지 못할 자는 저자다!”

“뭐라?!”

“사람이 죽었다고 하였다! 내 부하도, 그리고 죄 없는 양민들도 목숨을 잃었어! 세상을 어지럽히는 망할 암살자 놈들 때문에!”

“……!!”

“제 놈의 호기심이 얼마나 깊은지는 그 자신의 문제야! 지금 이 순간에도 흔들리고 있는 민심을 생각한다면, 저 병신 같은 노인네의 개소리에 맞장구를 쳐 줄 여유 따위는 없다!”

연호정이 범오를 바라보았다.

순간 범오는 두 눈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진지하게 충고하지. 같은 사문이니 어른으로 대우하는 것까지야 말리지 않겠지만, 승려 이전에 사람으로서 저자에게 배우려 하지 마라. 저자는 속세를 떠났다는 변명하에 타인의 다급함을 조롱거리 삼는 치졸하기 그지없는 자다!”

“이익!”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였다! 그 꼴같잖은 무공을 연성할 시간에 너 자신부터 제대로 찾도록 해!”

순간 범오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거대한 범종이 댕댕 울리는 듯했다. 사문의 어르신들에게도 듣지 못한, 과격함으로 포장된 비수 같은 가르침이 그의 심혼을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충격에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린 범오.

연호정이 다시 탐경에게 눈을 돌렸다.

탐경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연호정의 폭언에 그도 꽤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스르릉.

광룡부를 들자 도끼날에서 소름 돋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연호정이 탐경에게 도끼를 겨누었다.

“관부의 어디까지 선이 닿아 있는지, 지난번 발언의 요지가 무엇인지 설명하라.”

“이보…….”

“분명히 말했다. 마지막이라고. 쓸데없는 말을 하면 그 즉시 도끼가 날아간다.”

압도적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보다 강한 상대, 중원의 예법을 생각하면 절대적으로 존중해야 마땅할 상대에게 그 흉흉한 도끼를 겨눈 채 살기를 뿜는다.

그 살기에서 진심을 읽었을까.

탐경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관부의 허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관인 중에도 불도를 따르는 자들은 많아. 고위 관리일수록 더더욱 그러하지.”

“말인즉, 고위 관리들과 선이 닿아 있다는 것이로군.”

연호정의 눈에 불이 붙었다.

“당신 하나가 아니라 그 굴속에 사는 여러 기인이 움직였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좌포정사의 관저에 왔어. 개방도에게 듣기론, 암살될 가능성이 큰 자들만 말해 주었을 뿐 누가 가장 중요한지, 그 범위가 어디인지까진 말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

“좌포정사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승선포정사사 측 고위 관리와 선이 닿아 있겠군. 아마 도지휘사사 측도 그럴 테지?”

“……놀랍군. 거기까지 유추가 되나?”

“그렇다면 되었다. 이제 남은 하나의 질문에 답하도록 해.”

“남은 하나의 질문이라?”

극도로 화가 났다곤 하지만 팔십 년 가까이 어린 청년의 반말에도 탐경은 일일이 대꾸해 주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넉넉한 성품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알아도 존중해 주지 아니하면 성질을 내는 사람들이 천지인 세상에서, 적어도 탐경은 상대의 감정을 받아 줄 줄 아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관부 측 일에 개입할 것인가?”

“허허허.”

탐경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 이미 사과는 했네만, 다시 한번 사과함세. 설마하니 내가 속세의 일에 관여할 줄 알았는가? 나는 평생 무언가를 찾는 일에 몰두한 사람이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일세.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런 일에 끼어들겠나?”

“결국, 장난에 불과했다는 것이군.”

“미안하네. 너무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 나도 모르게 들떴던 모양이야. 내 그 부분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사과하겠네.”

“그 정도로는 모자라.”

“음?”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사과는 내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음하는 광동의 민초들에게 해라.”

탐경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나를 어찌 생각하든, 나는 세상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네. 이번 일을 도운 것은 철저하게 우리 일에 마(魔)가 끼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야.”

“…….”

“우리는 불문도 잊고, 세상도 잊었네. 우리는 이미 그런 사람들이 되어 버렸어.”

“그렇다면 잠시나마 사람으로 되돌려 주지.”

“자네는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네.”

“관부로 가. 광동성의 안정을 위해, 나와 함께 관리들을 설득해 줘야겠어.”

“미안하지만, 거기까지는 손을 대고 싶지 않네.”

“사신무에 대해 알려 주지.”

“……?!”

탐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네, 방금 뭐라 하였는가?”

“내 어딜 보고 사신을 연상했는지, 사신이 당신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묻지 않겠다. 다만 내 짐작하기로, 당신들은 분명 내가 익힌 무공에 대해 제법 흥미가 있는 것 같군.”

“…….”

“알려 주마, 어떤 무공인지. 그러니 이쪽에 협조해.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광동을 안정시킬 수 있다.”

쾅!

연호정이 광룡부를 땅에 박았다.

“부탁이 아닌 거래다. 그리고 이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그때 다시 도끼를 들겠다.”

“……허허, 허허허허!”

“빨리 결정해. 시간이 없어.”

탐경이 눈을 빛냈다.

“그 거래에 응하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는가?”

“거래라고 하였다. 그 이상을 요구하지 마.”

연호정의 눈이 음침해졌다.

그가 도낏자루에 손을 올렸다.

“예, 아니오. 빨리 결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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