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전설과 현실 (1)
“아, 묵 부장.”
“군장님.”
묵비가 고개를 숙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모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소. 그나저나 일전엔 고마웠소. 제때 와 주지 않았다면 정말 힘들 뻔했소이다.”
임무의 성공 여부를 떠나, 묵비와 사마현이 성벽을 뚫고 들어와 수많은 암살자를 처단하고 죽을 뻔했던 탕마군병들을 살렸다.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탕마군의 피해는 훨씬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역시 대수의 명령을 받고 간 것에 불과해요. 그런 걸 떠나서 한 식구인데, 돕는 건 당연하죠.”
혹시라도 섭섭해할까 싶어서, 혹시라도 연호정을 나쁘게 볼까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묵비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호정이 나쁘게 보이는 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소. 어찌 그걸 모르겠소? 다만 묵 부장 덕에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들이 살았으니, 탕마군의 수장으로서 응당 감사함을 표해야 마땅하오.”
“아…….”
혹시 모용우의 기분이 상했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그 걱정은 기우였다.
모용우는 연호정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이해했고, 묵비라는 원군을 보내 준 것 자체만으로도 크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묵비는 괜한 씁쓸함을 느꼈다.
‘믿고 있구나.’
연호정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가 모용우를 차기 무림맹주로 만들 생각이라는 걸.
모용우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부담을 얼마나 느끼느냐를 떠나, 그런 얘기가 오갈 정도라면 서로를 향한 신뢰가 대단할 것이다.
‘연 공자와 내가 신뢰로 엮였듯, 모용 군장 역시 연 공자와 신뢰로 엮인 거야.’
동시에, 자신이 멸사군과 우정을 나누었듯 모용우 역시 탕마군과 속 깊은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래서 놀라웠다. 자신이라면, 부하들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 모용우처럼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그릇의 차이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용우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야성에 통달한 구백 명의 암살자들을 오백의 탕마군으로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짧은 시간에 야성의 지리를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한 모용우 덕분이었다.
여러모로 저평가된 사람이다. 묵비는 그렇게 느꼈다. 연호정이 왜 모용우를 무림맹주로 세우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나 고른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있소.”
“편히 말씀하십시오. 저는 일개 부장입니다.”
“그럴 순 없지. 직책만 부장일 뿐 멸사군의 군장이나 다를 바 없는 분이니.”
“그래도 직책은 직책이니까요.”
가만히 묵비를 보던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편히 함세.”
“그러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대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잠시 볼일이 있다고 나가셨어요.”
“음.”
오해하지 말라고, 탕마군을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던 묵비는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모용우 역시 연호정을 믿고 있는데, 굳이 그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묵비의 생각대로였다.
“음신을 끝장내는 게 끝이 아니라고 들었네. 다음 임무가 있다고?”
“아, 네.”
“자네는 알고 있었는가?”
“그렇습니다.”
“그럼 설명해 주게. 내, 유군이 광동성의 치안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말은 얼핏 들었네만, 그것은 음신을 제거하는 것의 연장일 뿐 하나의 임무라는 형태로 내려온 건 줄은 몰랐다네.”
군장인 자신이 모르는 걸 부장이 안다.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모용우는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묵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광동성은 중원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해 온 지역입니다.”
“알고 있네.”
“그렇기 때문에 중앙 정부에서도 제대로 통제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실력 있는 관리들을 많이 보냈고요.”
“계속하게.”
“하지만 음신을 제거하면, 광동성의 뒷세계가 한 차례 요동을 치게 될 겁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요. 왕이 사라졌으니,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승냥이들이 달려들 테니까요.”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그들로 인해 민생 안전에 큰 피해가 생기겠군.”
과연 모용우의 눈치는 빨랐다.
“그렇습니다. 즉, 광동성을 안정시키려면 뒷세계를 정리하는 것이 필수지요.”
“어렵겠군.”
“대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어요. 차라리 세력이 큰 흑도 문파들이 각축장을 벌이면 모를까, 잔챙이들끼리 전쟁을 치르면 파고들기가 훨씬 어렵다고요.”
“그럴 수밖에. 힘이 약한 승냥이들은 민생 곳곳에 녹아 있어. 내세울 게 없으니, 보신을 위해서라도 그리할 수밖에 없지.”
“즉, 그들을 일일이 뽑아내 제거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일 수밖에 없어요. 유군 부대와 정보 조직의 힘만으로 해결하기도 난해하거니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일이죠.”
“그렇다면…….”
모용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광동의 백도 문파들…… 한발 더 나아간다면 관부와도 협력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순간 묵비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굉장하구나.’
듣는 것만으로도 최상의 해결책을 턱 하니 내놓는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를 떠나, 광동성이 자체적으로 안전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백도 문파와 관부가 힘을 합쳐 뒷세계를 제어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그렇다면 대수께서 무척 바쁘시겠군. 백도 문파야 무림맹의 이름값으로 어떻게든 조율할 수 있겠지만, 관부는…….”
“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 때문에 많이 고민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렇구먼.”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하면, 언제 돌아온다고 하시던가?”
“아마 해가 넘어가면 돌아오지 않으실까 싶어요.”
“알았네. 그럼 그때 다시 오도록 하겠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멸사군의 군병 중 하나가 크게 다쳤다고 들었네. 듣기로 검선 어르신의 제자라고?”
“옥청이라고, 다행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직 움직이긴 힘들지만요.”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유증이 없게 잘 관리하도록 하시게. 저 검선 어르신의 제자이니 오죽 알아서 하겠느냐마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그 많은 부하가 죽었음에도 멸사군병 하나의 상태를 이렇게나 걱정해 준다.
이것은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었다. 모용우에게는 이미 멸사군과 탕마군이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만 다를 뿐.
“하면 이만 가도록 하겠네. 자네도 몸조리 잘하시게. 언제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묵비의 눈이 빛났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모용우가 돌아갔다.
사라지는 모용우를 보며, 묵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어설픈 건지, 저 양반들 그릇이 지나치게 큰 건지.”
* * *
범오가 눈을 부릅떴다.
“연 대수!!”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범오의 목소리는 가히 또 하나의 사자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범오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노인을 노려보는데, 그 눈빛에 광기마저 어리고 있었다.
노인이 말했다.
“범오라고 하였느냐?”
“예? 아, 예!”
“그만하거라.”
“하, 하지만 사조(師祖)님!”
순간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사조. 보통 사부의 사부에게 쓰는 말이지만, 그 윗세대의 큰 어른들에게도 다 사조라는 명칭이 붙는다.
말하자면 저 노인은 못 해도 소림의 전대 고승이며, 전전대 고승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전대일 확률이 높았다. 전전대의 경우는 그 어떤 문파에서도 보기가 힘든 존재다. 대부분 수명이 다해 죽었거나,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수양을 쌓는 게 보통이니까.
하지만 어쩐지 노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이한 현기(玄機)가 심상치 않았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저 독특한 분위기와 불문의 내공을 익혔음에도 어딘지 속가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을 보면, 오랜 시간 불경(佛經)을 손에서 놓은 듯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눈앞의 노인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연배라는 것이다.
노인이 자세를 바로 했다.
“자네 말이 맞네. 느닷없이 불쑥 나타난 것도 모자라, 나도 모르게 흥이 동해 몹쓸 장난을 쳤어. 그 부분, 분명히 사과하겠네.”
“…….”
“일단 내 소개부터 함세. 나는 탐경(探經)이라는 사람일세.”
탐경.
이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괴상한 한자였다. 뜻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경전을 찾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도통 사람의 이름으로 쓸 만한 글자가 아니었다.
“왜? 이름이 이상한가?”
“…….”
“허허허, 기실 나도 속세의 이름은 모른다네. 그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따와서 그리 지었을 뿐이야. 과거 불문에 적을 두었을 때의 법명은 각료(覺燎)라 하네.”
연호정의 동공이 은근히 확장되었다.
‘각료? 각자 배!’
당대 소림을 이끄는 방장 대의 배분은 공이다.
그 위가 소림의 전설이라는 무허(無虛) 대사의 무자 배이고, 무자 배의 위가 바로 전전대인 각자 배이다.
말하자면 노인, 탐경은 소림의 전전대 인물이란 뜻이다. 어떤 의미로는 성천의 강자들보다도 만나기 힘든 무림 최고의 어른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었다.
“이름은 알았소. 이제 관부 운운하며 날 협박한 것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
부르르르.
범오가 몸이 희미하게 떨렸다.
소림이라서가 아니라, 어떤 문파라도 전전대 어른이라면 그에 걸맞게 대우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무공의 강약을 떠나,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한데도 연호정은 사조님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었다. 범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반면 탐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 참으로 화통한 후배로구먼. 그래, 세상이 이렇게나 바뀌었어. 세월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굴속에 틀어박혀 속세와 연을 끊고 살았더니만, 천하는 또다시 놀라운 인물들을 이 땅 위에 내놓았구먼.”
“…….”
“좋네. 말해 주겠네. 다만, 그에 앞서 답변 하나만 해 주었으면 하네.”
“말씀하시오.”
“분명히 말하겠네. 이 질문은, 어찌 보면 자네에겐 숨기고 싶은 비밀일 수도 있네. 물론 내 짐작에 불과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자네는 정말 비범한 사람이야.”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 낭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소. 물을 게 있거든 어서 물으시오.”
“허허허! 알겠네, 알았어.”
그 순간 탐경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 변화가 어찌나 인상 깊었던지, 천하의 연호정조차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공의 수준이나 내공 따위로는 풍길 수 없는 분위기.
한 인간이 삶을 바쳐 찾고자 했던,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기인(奇人)이자 광인의 눈빛이었다.
“자네, 사부가 누구인가?”
“……?!”
“다소 어려운 질문인가?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하도록 하겠네.”
탐경의 눈이 태양 같은 빛을 발했다.
“자네, 사신(四神)을 연성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