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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21화 (420/963)

421화. 평화와 분란 사이 (7)

음신 야율적의 상상을 초월하는 암살 계획은, 의정군과 개방의 노력,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의 등장으로 인해 최소 피해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관리가 목숨을 잃었다. 죽은 관리의 수는 무려 스물아홉 명으로, 그들 모두가 광동성 행정과 치안에 있어서 제법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었다.

다만, 진짜 중추라 할 만한 핵심 인사 열둘은 무사했다. 연호정과 불산의 은거 기인들의 빠른 조치 덕에 암살 시도를 직전에나마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광동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작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피해가 컸지만, 좌포정사 종명을 필두로 도지휘사사 측 인사들이 합심하여 움직인다면 근시일 내에 광동의 분위기를 본래대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는 광동성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의정군 소속 탕마군의 피해가 상당했다. 야성을 점거하며 적과 교전을 벌였던 탕마군은 절반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굉장한 피해였다. 적이 적인 만큼 애당초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한 출정이었지만, 모용우는 물론 연호정에게도 뼈아픈 경험이었다.

물론 암제단의 숫자와 실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 희생으로 끝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하물며 암제단은 야성의 지형에 통달한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그만한 피해로 막았으니,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렇다. 멋진 성과였다. 수치로만 보면 분명 그러했다. 하지만 군에 소속된 당사자들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큰 피해를 보고, 많은 상처를 받은 임무.

하지만, 사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 * *

“괜찮소?”

“괜찮소.”

가만히 모용우의 얼굴을 보던 가득상이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유감이오. 탕마군의 피해가 그만큼 커진 것에는 우리 정보조의 대처가 늦은 것도 한몫했소.”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시오. 후개는 할 만큼 하셨소. 후개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오. 이번 작전에서 누굴 탓할 수 있겠소? 모두가 열심히 했고, 모두가 목숨을 걸었소.”

“후우.”

어지간하면 통통 튀는 분위기를 만들려 애쓸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가득상이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탕마군의 분위기는 어떻소?”

모용우는 솔직하게 말했다.

“좋다고 보긴 어렵소.”

“……그럴 수밖에.”

“난 우리 탕마군이 충분히 단련된 조직이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경험이 적은 것은 어쩔 수 없소. 그 경험에는, 전우를 잃은 경험 역시 포함되오.”

“…….”

“항상 생각했지. 나를 포함, 내 부하들도 언젠가는 적의 칼날에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그래서 한때는 정을 주지 않으려고도 했소.”

모용우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하늘이 어두웠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이 어찌 그럴 수 있겠소? 언제 잃을지 모를 사람들이니 더 아껴 주고, 더 다가가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줘야지.”

“맞는 말씀이오.”

“출정 전, 우리 모두 서로에게 유언을 건넸소.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그것이 무림맹 유군 부대에 속한 무사들의 업이자, 전투 조직에 속한 모든 무림인의 숙명일 것이오.”

혼란의 시기, 모두가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

그러나 조직에 속한 자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명령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진다. 그것이 대의(大義)든 뭐든,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더 슬프고, 더 마음이 아프다.

“개방의 피해도 크다고 들었소.”

“모용 군장의 말마따나 숙명이지.”

그런 면에 있어서는 가득상이 모용우보다 아득한 선배일 것이다.

개방도는 하루하루가 임무의 연속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죽는 경우도 허다하며, 와중에 자신의 수련 시간을 챙기기도 힘들다.

가득상은 그 많은 죽음을 겪고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시선은 어떻소?”

“무슨 말씀이신지?”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의정군이 창설된 직후 받은 임무였소. 아직 탕마멸사가 제대로 하나가 되지도 않은 판국에, 멸사군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탕마군은…….”

모용우가 피식 웃었다.

“모두의 마음을 알 길이 없으니, 나도 확답을 드리긴 힘들겠소.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오.”

“……?”

“나는 내가 지휘하는 탕마군에, 본인의 피해로 인한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바보는 없다고 보오.”

가득상이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는 다를 수도 있소. 머리로는 알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소이까?”

“그 정도도 안 되는 군병이라면, 유군 부대 일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거요.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진 부대원이 있다면 진지하게 전역을 요구할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용우 역시 휘하 군병 중 연호정을 원망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 확신할 순 없었다.

가득상 말마따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그렇다. 설마설마하면서도 자신이 피해자가 되면 이성적인 생각을 못 하게 마련이다.

‘이겨 내야지.’

연호정의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상대의 속셈을 낱낱이 간파할 수는 없는 법이다.

대국을 보는 눈은 중원 정점에 이르러 있지만, 실제 전투에 들어가면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변수에 칼같이 대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연호정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든, 이걸로 광동의 상황은 일단락이 된 것이오?”

“반만.”

“반?”

“연 대수가 받은 임무는 단순히 음신 야율적을 제거하는 데에서 끝이 아니오. 광동성 전체를 안정시키는 것까지가 상부에서 받은 명령이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나는 대수께 그런 말을 듣지 못했소만.”

“할 필요가 없었겠지. 알아도 상관없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니까.”

“하긴, 그도 그렇소.”

“짐작기로, 당분간 탕마군은 재정비에 들어가도록 놔둘 것 같소. 남은 일은 연 대수와 멸사군이 어떻게든 알아서 하겠지.”

모용우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한데, 대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오? 어제부터 통 보이지 않더이다.”

“아, 그게 말이오.”

가득상이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서 말이외다.”

* * *

“연 공자.”

“어, 왔냐.”

쿵!

광룡부를 내려놓은 연호정이 땀으로 가득한 이마를 훔쳤다.

“수련 중이에요?”

“조금 거슬리는 게 있어서. 지금이 아니면 못 하겠다 싶어서 말이지.”

묵비의 눈이 깊어졌다.

그녀는 연호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가 부하들의 죽음에 충분히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련이라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않나?

묵비가 솔직하게 말했다.

“하나의 임무가 끝나긴 했지만, 그다음 임무가 남았다면서요.”

“안다.”

말없이 연호정을 주시하던 묵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직 탕마군에 들르지도 않았죠?”

“그런데?”

“…….”

“모용 군장이 잘 다독이고 있겠지.”

“그래도 가 봐야 하지 않아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

연호정의 표정은 상당히 담담했다. 부하를 잃은 상관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살피던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다음 임무를 정해 주세요.”

“때가 되면 전달할 테니, 그전까지 몸부터 추스르고 있어. 너도 내외상이 다 낫지 않았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게 제일 중요하다.”

“뭐라고요?”

연호정이 묵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의 행보가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설령 임무가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판국이다.”

“…….”

“조직에 속한 자로서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제 몫을 하려거든 너 자신의 전투력부터 제대로 보존할 생각을 해. 그게 우선이다.”

“연 공자.”

“죽음은 언제, 어디에서나 찾아온다. 당장 내일 멸사군이 모조리 증발할 수도 있어. 무림이 그렇고, 세상이 그래.”

연호정이 광룡부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가서 몸을 정비하도록 해. 명령 하달은 오늘 밤에 따로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멀어지는 연호정의 등을 보며, 묵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연 공자. 나는 당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하나도 모르겠어요.”

예비 거처에서 나온 연호정이 향한 곳은 인적이 드문 야산이었다.

후우우우웅.

정하지 않은 길을 가듯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걷던 연호정은 일순 한 줄기 웅혼한 기운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부르는 기운이었다. 연호정은 즉시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잠시 후.

“오셨는가?”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곳에는 공손하게 서 있는 범오와, 그 옆에서 한가롭게 앉아 있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의 인상은 실로 묘했다.

나이부터가 가늠키 어렵다. 대충 봐도 여든은 훌쩍 넘었을 듯한데, 하얀 치아와 익살맞은 표정을 보면 그보다 사십 년은 더 젊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사자의 갈퀴처럼 뻗쳐 있었고, 의복은 너무 더러워서 본래의 색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언뜻 보면 승복이었던 것 같지만,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노인이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허어, 내 평생 남에게 존중받을 생각은 한 적이 없다만, 그래도 나이 지긋한 선배에게 인사도 할 줄 모르는 겐가?”

“누가 선배란 말이오?”

“으음?”

“난 당신의 정체를 모르오. 하물며 임무에 느닷없이 끼어들어 제멋대로 사람을 협박하고 줄행랑친 기인(奇人)에게 선배 대접을 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소.”

범오가 소리쳤다.

“연 대수! 말을 조심히 하시오! 이분께서는……!”

“되었다.”

노인이 손을 올려 범오를 막았다.

“허허, 여러모로 오해가 있긴 했지. 그렇다고 협박이라니? 그건 너무 갔구먼.”

“그게 협박이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아닌데?”

뭐지, 이 어린애 같은 대응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오늘 이 시간에 당신에게 오지 않으면 광동성의 관부가 쑥대밭이 될 거라고 말했소. 그게 협박이 아니면 무엇이오?”

“허허허.”

“당신이 알 필요는 없지만, 터놓고 말해 드리리다. 나는 지금 많이 참고 있소. 만일 범오 스님이 당신에게 깍듯하지 않았다면, 진즉 도끼를 들어 당신의 머리통을 쪼개려 했을 것이오.”

범오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연 대수. 이분께서는 대수는 물론 무림맹의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번 작전에서 이백이 넘는 부하들이 죽었소.”

“……!”

“죽은 부하들에게 미안하다, 날 원망하라는 말도 못 하고 왔소. 이유를 아시오?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 때문이오. 당신의 존재 때문에, 그리고 남은 임무가 더 힘들 거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노인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그저 심유한 눈으로 연호정을 주시할 뿐이었다.

연호정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말장난은 사양하겠소. 선배 대접도 바라지 마시오. 나를 부른 이유를, 그 발언을 하고 줄행랑친 이유를 설명하시오. 제대로 된 해명 없이 시간 죽이기를 하려 들었다간 당신을 필두로 범오 스님까지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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