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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20화 (419/963)

420화. 평화와 분란 사이 (6)

그 시각.

카아아아아앙!

종명의 목을 향해 휘둘러지던 상각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추었다.

주르륵.

예리한 칼날이 종명의 목젖에 닿아 생채기를 냈다. 찢어진 피부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렀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칼끝이 목젖부터 경동맥을 완전히 끊어 놓았을 것이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

종명은 너무 놀라서 무슨 사태가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상각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익!”

부르르르!

쇠사슬에 묶인 그의 팔이 무섭게 떨려 왔다.

하지만 그 정도 힘으로는 연호정의 완력을 당해 낼 수 없다. 더하여 내력이 주입된 교룡쇄는 강철임에도 불구하고 피에 젖은 천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어 상각의 팔을 조이고 있었다.

순간 종명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자, 자네!”

그때, 상각이 남은 손을 휘둘렀다. 예리하게 세워진 손끝이 당장에라도 종명의 흉골을 부술 듯했다.

연호정이 힘차게 교룡쇄를 당겼다.

찌이익! 부웅! 콰앙!

상각의 수도는 종명의 옷깃만 찢었을 뿐이었다. 교룡쇄에 묶인 채 휘둘러진 상각은 벽에 처박혀 정신을 잃었다.

푸스스스.

자욱한 연기가 일었다.

느닷없는 사태에 놀란 것은 종명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호위대장이 서둘러 검을 뽑았다.

차아아아앙!

“이놈! 예가 어디라고 감히……!”

“멈춰라!”

종명의 매서운 호통에 호위대장이 찔끔해서 한 걸음 물러났다.

종명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서늘한 눈으로 상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차갑고 무심한지, 보는 것만으로도 뼛골이 시려 오는 듯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연호정은 종명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연호정이라 하오.”

“연호정?”

“그렇소.”

연호정……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긴가민가한 기억을 들쑤실 때가 아니었다.

종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지 않겠나?”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제법이군.’

자칫 잘못했으면 목이 달아날 뻔한 상황이었다. 한데도 종명은 자신에게 침착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야.’

과연 좌포정사, 맨손으로 시작해 광동성의 행정을 담당하는 최고위직에 오른 남자다웠다. 이만한 배포는 무림인이라도 쉽게 보여 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광동성 최대의 암살자 집단이 붕괴 직전이오. 그리고 그들은…….”

그는 일련의 사태를 짧게 전달했다. 물론 중요한 내용은 전부 들어 있어서, 종명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즉, 그 암살자 집단의 대장이란 작자가 수년 전부터 광동성 고위 관리들 곁에 수하를 붙여 두었단 말인가?”

“그런 모양이오.”

종명의 눈이 깊어졌다.

상각이 자신의 부관이 된 것은 칠 년 전이었다.

상각 역시 별다른 연줄은 없었지만 지닌 바 능력이 출중하였다. 게다가 맺고 끊음이 분명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여, 제 부관으로 삼기에 제격인 인물이라 생각했다.

한데 설마, 상각이 암살자였다니?

“믿을 수 없군. 무려 칠 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 곁에서 오만 일을 처리했던 사람인데.”

“무려 칠 년이 아니라, 고작 칠 년이오.”

“뭐라?”

“원수를 갚기 위해 인생을 바치는 사람은 수두룩하오. 하물며 고작 칠 년임에야.”

“……!”

“광동성의 행정을 담당하는 최고 권위자를 죽이는 일이오. 아마 오랜 세월 공을 들였을 것이고, 당신에 대한 정보도 샅샅이 파헤쳤을 것이오.”

종명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광동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 위해, 주요 관리들을 암살키로 했단 말인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제국의 고위 관리를,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수십을 죽이려 했단다.

이것은 명백한 반역이자 제국을 향한 도전이었다. 제아무리 제국의 국력이 약해졌다 한들, 이런 무리가 코앞에서 판을 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무엄한……!”

“그나마 당신이라서 목숨이나마 건진 줄 아시오.”

“뭐?!”

“당신이 죽으면, 현재 독자적으로 자생하면서도 제국 휘하에서 치세를 받는 광동성은 극단적인 혼란 속에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오.”

“…….”

“사람의 목숨은 다 똑같소. 다만, 나는 당신의 인품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과 위치를 보고 왔다는 걸 알아 두시오. 최우선시되는 것은 결국 민초들의 삶이니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어둡기 짝이 없는 그 눈빛에, 종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오. 우리가 막지 못한 암살 사건이 못해도 수십 개가 터졌을 것이오. 그 많은 관리가 일시에 죽었으니, 당분간 광동성의 행정이 모조리 마비될 터.”

“이럴 수가…….”

“한시라도 빨리 어지러워진 광동의 분위기를 바로잡으시오. 그걸 못하면, 당신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외다.”

치리리리링!

교룡쇄를 다시 상체에 묶은 연호정이 상각의 마혈을 짚곤 그를 둘러업었다.

종명이 물었다.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당신이 알 바 아니오.”

“그놈은 제국의 관리를 살해하려 한 범죄자일세. 두고 가게.”

“당신들의 능력으로는 이놈을 어찌할 수 없소.”

“그것은 자네가 고려할 사항이 아니야! 그자는……!”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소?”

연호정이 종명을 바라보았다.

순간 종명은 오금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의 눈빛에서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빛 한 번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이런 경험은, 수십 년간 살얼음판 같은 정쟁(政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그조차도 처음이었다.

“마땅한 권리를 내세우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능력과 힘부터 갖추시오. 나 역시 이 땅에 사는 사람이니 국력이 강성하길 바라지만, 당신처럼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자가 좌포정사로 있어서야 나라 꼴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잖소.”

“뭐, 뭐라!”

호위대장이 버럭 소리쳤다.

“무엄하다, 이놈!”

살벌한 광채를 띄었던 연호정의 눈빛이 조금씩 투명해졌다.

종명은 상대가 마치 자신의 속내를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하여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

“당신들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해 두긴 했지만, 굳이 조사할 필요도 없었군. 빤히 보여. 제국이니 뭐니 홀쭉해진 배를 내민 채 없는 위엄을 짜내면서, 정작 힘이 될 만한 자에게 손을 내밀 용기는 없는 자존심만 센 멍청이의 모습이.”

“이, 이놈.”

“당신이 무림인들을 억지로 배척하지만 않았어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소.”

“……!”

“웃으며 대할 용기가 없다면 이용해 먹을 생각이라도 했어야지. 결국 당신은 무림인을 이용할 머리도, 그들에게 웃으며 다가갈 배포도 없는 머저리에 불과하오.”

종명이 버럭 소리쳤다.

“이놈!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참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날 죽이기라도 할 셈이오? 홀로 호위대를 모조리 격파하고 생채기 하나 없이 이곳까지 뚫고 온 나를?”

“이익!”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관리는 황제를 받드는 자임과 동시에, 황제의 신민들을 보호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자요. 그것은 권리가 아닌 의무. 당신은 지금껏 그 의무 중 하나를 게을리하여 광동의 정세를 아슬아슬하게 만들었소. 죄인이란 말이오.”

“…….”

“철전 몇 닢만도 못한 그 자존심을 채우고 싶거든 차라리 개나 키우시오. 그리고 개를 키울 시간에, 이 지역의 치안과 민심을 바로잡을 생각부터 하시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언제라도 다시 올 것이오. 만에 하나 그때도 광동이 이 지경이면, 그때는 내가 당신의 목을 딸 것이오.”

무시무시한 언사였다.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다. 제국 휘하, 승선포정사사의 좌포정사의 목숨을 마치 주머니에 든 철전 몇 닢처럼 가벼이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종명은 연호정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극도로 당황했고, 화가 났으며, 동시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무서운!’

이립도 안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한데 그 청년의 눈빛은 수십 년간 아수라장을 거쳐 온 위엄 넘치는 정치가의 눈빛보다도 무서웠으며, 신기(神氣)로 빛나는 동공은 사람의 속내를 뿌리까지 들여다볼 만큼 깊었다.

무시무시한 무공, 그 무공 못지않은 배포는 물론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안목까지.

‘역시 무림인은 위험하다.’

저런 것은 사람이 아니다. 전설상의 관우운장이 적진을 돌파하며 적들의 목을 추풍낙엽처럼 쓸어 버렸다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다.

저 청년은, 그 전설 같은 일화를 언제든 현실에서 펼쳐 보일 능력이 되는 자였다. 종명에게도 그 정도 눈은 있었다.

연호정이 나간 문을 말없이 보던 종명은, 어느 순간 자신의 상의 앞섶이 축축해진 것을 느끼곤 고개를 내렸다.

‘…….’

목에서 난 피가 어느새 쇄골까지 내려와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피부만 살짝 찢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출혈량이 있었다.

탁자 위의 손수건으로 상처를 막은 종명이 호위대장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광동 고위 관료들의 생사를 파악하게. 특히 도지휘사사 쪽을 잘 조사해 보도록.”

* * *

“빌어먹을.”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별 의미도 없는 말이나 주절거리다니. 나도 아직 멀었어.”

그 지경이 되어서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종명을 보고 있노라니,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었다.

물론 종명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니, 제국을 존중한다면 그의 말마따나 상각을 맡기고 가야 한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고 있었다. 상각 하나를 맡기고 나면, 종명은 그 이상을 원하리라는 걸. 자신 역시 조사하려 들 것이 뻔하며, 현재 광동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사하는 시간이 점점 미뤄지리라는 것을.

종명은 무림인을 배척하는 자다. 개방의 조사로 알기 이전에, 실제 눈빛만 봐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무림인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싫어하면서도 무림인을 내치지 못한 무능함에, 그 무능에도 불구하고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한 어설픈 자존심에 화가 났다.

적어도 종명이 무림인과 어느 정도 연을 두고 있었다면, 이리도 무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 그래도 암살은 당했겠지만.’

칠 년 동안 부관으로 있던 자가 사실은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노릴 수 있는 암살자였단다.

종명이 아니라 자신이라도 그 무서운 칼날을 피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신뢰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니까.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나 역시 이럴 때가 아니지. 이미 대부분이 당했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움직여야 해.”

그때였다.

움찔!

땅을 박차고 나아가려던 연호정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은밀한 기세에 몸을 멈추었다.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이토록 은밀하면서도 밀도 높은 기운을, 설마 이런 자리에서 느낄 줄은 몰랐다.

그 기운의 농도는 실로 대단했다.

얼마나 대단했냐면, 지금의 자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세계를 거니는 자의 기운이었다.

‘무극지경!’

연호정이 등을 돌렸다.

그곳에, 사자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거지꼴의 노인 한 명이 있었다.

“굉장한 젊은이로고. 내가 한발 늦은 것인가?”

“……누구요?”

“음, 보아하니 좌포정사는 자네가 구했구만. 쯧, 혹시나 해서 와 봤는데, 괜한 걸음을 했군.”

노인이 씨익 웃었다.

얼굴에는 땟물이 줄줄 흐르고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걸레짝이 되었는데도, 드러난 치아만큼은 새하얬다.

“그나저나 자네, 정말 대단하구만. 그 연배에 그 무공…… 허허, 공공도 그 정도는 아니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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