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평화와 분란 사이 (4)
“대사님.”
“허허,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괜스레 찾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리 앉으시지요.”
“그럼 실례하겠소.”
잠시 후, 공공대사와 제갈문호가 다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공공대사는 평소와 달리 직설적으로 물었다.
“현재 광동의 상황은 어떠하오?”
“지금까지 보고받은 대로만 보면, 썩 좋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제갈문호가 냉정한 얼굴로 문서 몇 장을 훑어보며 말했다.
“현재까지 올라온 보고를 토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제갈문호는 딱 정리된 만큼의 상황을 전달했다. 자신의 의견은 철저하게 배제한 채로.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구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음교의 상위 고수 하나를 포획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대단한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무림맹 뇌옥에 갇혀 있는 신화교의 이호무장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지요. 이런 상황에서 고위급 인사를 사로잡았다는 건 대단한 공(功)입니다.”
“문제는, 저쪽 상황이 어그러지면 그 대단한 공도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로구먼.”
“그렇습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와중에 또 다행인 것은, 정보 고문이 이번 작전에 직접 참여한 덕에 광동의 고위 관리들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구려.”
“만약 보고대로라면, 당대 음신이자 사음교의 주구인 야율적이란 인물이 필살(必殺)의 의지를 드러내는 쪽은 승선포정사사일 겁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오. 승선포정사사의 업무 체계가 무너지면 광동성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될 테니까. 지역 특성상 한번 무너진 민심을 복구하고 체제를 정비하기까지는, 다른 지역보다 몇 배나 더 오래 걸릴 게요.”
제갈문호의 얼굴에 뜻밖의 기색이 어렸다.
“굉장하시군요. 대사님께서는 광동성의 현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공공대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이라면 모르되, 광동성은 중원의 최남단이었다. 바다에 인접하여 무역이 활발했지만, 실질적으로 중원 경제에 강한 영향을 주지도 않고 독자적으로 발달한 광동성의 현주소를 알기란 경험 많은 노강호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쪽에 아시는 분들이 많아서 말이오. 군사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오.”
“대단하십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그래서 그러셨군요.”
“음?”
“그래서 금강권문의 문주에게 불산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셨군요.”
공공대사가 쓰게 웃었다.
“이미 알고 계셨구려.”
“아, 오해하실까 싶어 말씀드리는데 저는 전혀 섭섭하지 않습니다. 대사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물론 이유는 있소. 하지만 나 역시 홀로 고민이 많아 너무나도 당연한 절차를 잊었소이다.”
제갈문호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의도가 어떠했든 작전 책임자인 군사에게 말하지 않고 따로 아군을 보낸 것은 잘못이다.
보고 체계라는 것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설령 공공대사가 맹주였다 해도 이것은 잘못이었다.
공공대사가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이 부분에 관해서 지금이라도 말씀을 드리고자 왔소이다. 한데 이미 알고 계셨다니, 늙은이가 참으로 면목이 없소.”
“하하, 괜찮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당연히 그럴 것이며, 애초에 더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오.”
“한데 불산에는 어찌하여?”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무당의 장문진인에게도 얘기는 해 뒀소이다. 그곳에는 중원 불문의 큰 어른들이 계시오.”
짤막한 얘기를 들은 제갈문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아니, 각지의 고승들께서 그곳엔 어인 일로……?”
“미안하오. 이것은 중원 불문 전체에 관련된 일. 제아무리 군사라도 내 입으로 말하기가 어렵구려.”
“아, 그러십니까.”
“동시에, 무당의 장문진인이기에, 그리고 군사이기에 여기까지 말씀드릴 것이오. 두 분이라면 혹시라도 그곳을 건드리지 않으실 것 같아서 말이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이를 말입니까. 중원 무림 최고의 거두인 소림과 관련된 일입니다. 천하에서 가장 호기심이 강한 사람도 고개부터 저을 겁니다.”
제갈문호의 진심이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급의 대문파들은 저마다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비밀스러운 구석들이 있다.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일일 수도 있고, 문파의 사활이 걸린 일일 수도 있다. 혹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몹시 악랄한 비밀일 수도 있다.
문파 개인의 일이었다면 공공대사도 이 부분을 철저하게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중원 불문 전체가 연관되어 있다면, 제아무리 제갈문호라도 조사하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은 정말이지 놀랍군요. 그곳에 불문의 무공을 연성하신 전설적인 고승들께서 계신다는 게…….”
“정확히는, 무승(武僧) 출신보다는 학승(學僧) 출신이 훨씬 많소이다.”
“그렇군요.”
“깨달음의 길을 포기하고 불문을 위해 남은 삶을 불태우시는 분들이오. 그런 분들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는 내 심경도 참으로 복잡하외다. 하나, 어쩌겠소? 자칫 잘못하다간 외세의 침공에 민초들의 삶이 끝장날 판이니.”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이렇게 직접 말씀을 주실 거라면 작전을 짤 때 함께 고려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분들은 내 부탁에도 쉬이 움직이지 않으실 것이오. 반쯤 불도에서 떠나신 분들이고,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생을 불사르는 분들이외다.”
“……!”
“실제로 가능할지를 확신할 수 없는 일로 작전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았소이다. 설령 도움이 된다고 한들, 이 일은 어디까지나 무림맹 책임이 아니오? 도와주신다면야 감사하겠지만,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그분들을 타박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갑니다.”
민초들의 삶이 결딴날 수도 있는 일이라 말하면서도 결국엔 무림맹의 일이라고 선을 긋는다.
얼핏 들으면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공공대사의 공사 구분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는 발언이었다.
민초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좌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일에 책임을 갖고 덤벼드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엔 어쩔 수 없는 구분을 두어야 한다.
비록 군사인 자신에게 미리 말해 주지 않았지만, 공공대사의 그러한 면모야말로 소림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일면이라 할 것이다.
“만약 그분들께서 움직여 주신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길 바랄 뿐이오.”
공공대사가 입맛을 다셨다.
“관부의 움직임에도 통달하신 분들이니, 음신의 노림수를 한 번이라도 막아 주신다면 좋으련만.”
“예? 관부의 움직임에 통달했다니요? 그분들이요?”
“물론이오. 불산은 대대적으로 관부의 통제를 강하게 받는 산이었소.”
“……!”
“관부와 나름의 관계를 쌓지 않았다면, 그분들이 불산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오.”
“그렇군요…….”
제갈문호는 불산에서 벌어지는 모종의 일이, 자신의 막연한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공대사가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상황이 그리되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연 대수가 어떻게든 잘해 주리라 믿지만…….”
“연 대수는 잘할 겁니다. 언제나처럼요. 하지만 사람인 이상 실수할 수도, 실패를 맞이할 수도 있는 법이지요. 개인의 역량이야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사람을 부림과 동시에 광동 정치에도 개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으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되든 안 되든, 이제는 믿고 기다리는 길밖에 없습니다.”
“허허, 이럴 때면 정말 나이를 핑계로 맹의 골방에 틀어박혀 떠다니는 구름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자세를 반성하게 되오.”
“그리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조직이라도 고위급 인사들이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대사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공공대사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차 한 모금으로 애써 답답함을 잊는 그였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제갈문호가 순간 탄성을 질렀다.
“아, 그리고 이 사안에 대해서는 봉공회의 때 발표하려고 했습니다만.”
“음?”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불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 보타암 쪽과도 연이 있으신지요?”
“검후전설의 그 보타암 말이오?”
“그렇습니다.”
“물론이오. 해마다 서신을 보내 교류를 나누고 있소만.”
“음…….”
“무슨 일이오?”
“보타암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공공대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상치가 않다니? 그게 무슨?”
“그간 보타암 내의 파벌 싸움이 제법 어지럽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확인되지는 않은 사항이라 놔두고 있었습니다만.”
“……?!”
“최근에 보타암 내 고위급 인사가 호남성에 들어왔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사가 향하는 목적지를 유추한 결과…….”
제갈문호가 헛기침을 했다.
“묵룡부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
* * *
뚝. 뚝.
이철경의 이마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흐음.”
나직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주는 위압감이 실로 대단했다.
“그렇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방장 대사도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아, 당대 방장이 공공이었던가?”
“예.”
“공공…… 공공은 예로부터 지닌바 능력이 출중하기로 이름이 높았지. 여러 방면에 재능이 많아 능히 소림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라는 평을 받았어.”
“…….”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세상을 보는 공공의 눈은 언제나 맑고도 깊었으나, 정작 공공이 지닌 가장 큰 재능은 바로 무재(武才)였다. 만일 그 무재에 목숨을 걸고 인생을 던졌다면, 아마 지금쯤 무극지경을 넘어 명왕(明王)으로서 불문의 위상을 만천하에 각인시켰을 것을.”
나직이 혀를 차는 노인의 목소리를 듣는 이철경의 이마에서 연신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공공대사의 연배가 얼마이던가? 하물며 당대 소림 방장이다. 연배도, 배분도 중원에서 알아주는 거인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을 마치 어린애 대하듯 말한다. 노인의 나이와 배분을 추측기가 어려웠다.
“네가 이(李) 형님의 핏줄이라 하였더냐?”
“그렇습니다.”
“안타깝구나. 형님께서는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시거늘.”
“혹, 몸이 안 좋으신……?”
“푸헐! 몸이 안 좋기는. 그 연배에 우리 중 가장 팔팔한 사람이 네 증조부다. 앞으로 이십 년은 더 살 것 같더구나.”
“아! 다행입니다.”
“어찌 되었든, 상황이 그리 흘러가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흐음, 그래도 소림의 방장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무리한 부탁인지 모르진 않을 터인데…….”
“…….”
“허! 별수 없지. 이곳을 파헤치려면 관리들의 힘이 필수이니.”
“도와주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불문에서 한 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다. 말인즉,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뜻이다.”
“……!”
“당대의 혼란은 현역들이 책임을 져야지. 다만 상황이 이러하니, 잠시나마 방패막이 정도는 되어 줘야겠구나.”
“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그나저나, 너와 함께 온 개방의 아해는 어디 있느냐? 자세한 얘기부터 들어 본 연후에 움직여야겠다.”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오냐.”
이철경이 동굴을 나섰다.
동굴 속에 앉은 노인이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던가. 참으로 퍽퍽한 말년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