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평화와 분란 사이 (2)
콰르릉! 콰르르르릉!
야성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성 곳곳으로 흩어진 탕마군병들이 온갖 병창과 기둥 등을 부수는 소리였다. 비록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모용우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힘을 합쳐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드니 순식간에 성내 건물의 이 할이 무너져 내렸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어서 저들의 파괴 행위를 중단시켜야 했다. 나아가, 화산대연이 있는 야정미궁(夜政迷宮)으로 들어가 격발추를 작동시켜 광동의 고위 관리들을 모조리 죽여야 했다.
하지만 야율적은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야율적의 눈이 모용우에 닿았다.
화르르르륵.
화염을 등지고 서서 자신에게 대검을 겨누고 있는 한 검사의 자태는 그야말로 잘 벼린 한 자루 신검이 따로 없었다.
‘이놈.’
야율적은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놈, 강하다.’
동이 트기 전, 어두운 새벽.
화염을 등지고 있는데도 서슬 퍼런 눈빛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눈빛은 천지가 뒤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검기(劍氣)는 가히 강철도 자를 것 같은데, 정작 기도는 묵직하면서 고요했다. 눈빛부터 자세까지, 일체의 미동도 없었다.
‘경지의 문제가 아니야. 이놈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연호정, 그 괴물과는 결이 달랐다. 연호정이 과격하고 파격적인 기도 아래 섬뜩하리만치 차갑고 무심한 안광을 보여 주었다면, 모용우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의 표면처럼 잠잠하면서도 그 안에는 폭발하는 화산에 비견될 만한 위압감을 감추고 있었다.
뭐가 되었든 범상치 않다. 본인의 실력 이상의 결과를 내는 진짜 강자로서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오히려 저 소림승보다도 위험하다.’
극강의 장법으로 소림 무공의 위대함을 보여 준 이름 모를 승려.
무공의 위력이나 위엄 넘치는 기파는 소림승이 모용우보다 한 수 위인 듯했다.
하지만 야율적은 시선을 소림승에게로 돌리지 않았다. 소림승이 다 크지 않은 호랑이라면, 눈앞의 모용우는 호랑이보다도 큰 늑대이면서도 등에 날개까지 달고 있었다.
“정말이었군.”
모용우의 차가운 목소리에 야율적은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음교의 주구, 동시에 중원 암살계의 신으로 추앙받는 당대 음신이라고 들었다. 사실일까 싶었는데, 그 기이한 기도를 보니 진짜라는 생각이 들어.”
“…….”
“도망칠 생각은 하지도 마라.”
야율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도 그따위 망언을 입에 담는구나. 그토록 부족한 실력으로 말이다.”
모용우의 기도는 실로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실력의 차이는 메우기 힘들다. 비록 본래의 실력을 찾지도, 내외상을 전부 치료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야율적은 음신이요, 사음교의 정예 고수였다.
이 정도 자신감은 당연히 보여 줘야 했다.
모용우는 대답 없이 야율적을 노려보다가 이내 죽은 군병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
모용우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부하의 죽음을 보는데도, 그 눈빛이 단단하고 투명하기만 했다. 야율적을 보던 눈빛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야율적의 예민한 감각은 포착할 수 있었다.
모용우의 가슴 안에 거대한 불꽃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불타오르는 무서운 분노를 차가운 이성과 절대적인 목적의식으로 다독이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스르륵.
야율적이 천천히 발을 떼었다.
순간 모용우의 검 끝에서 시퍼런 기운이 일었다.
펑!
번갯불처럼 튀어 오른 검기가 야율적의 왼발 한 치 앞에서 폭발했다. 야율적이 발을 다시 뒤로 빼지 않았다면 그 길로 발 하나가 날아갔을 것이다.
모용우는 여전히 죽은 부하들의 시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검력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검사로서의 능력이 출중한 만큼이나 실전 능력과 경험, 감각 또한 지극히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야율적이 입을 열었다.
“이 대치 상태를 고수할 생각이냐?”
모용우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야율적이 대치 상태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현재 야율적이 서 있는 위치와 모용우, 범오가 서 있는 위치는 지극히 절묘하여 누구 하나가 움직이는 즉시 공격을 받게 된다.
당연히 공격을 당하는 쪽은 야율적일 것이다. 그러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더라도 야율적의 기도는 두 사람이 뿜는 기도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즉, 누가 움직이든 반드시 피를 본다. 지형과 기도, 치열하게 부딪치는 무형의 살기가 그것을 증명하였다.
야율적이 말을 이었다.
“정 그러고 싶다면 그러도록 해라.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야. 해가 뜨고 저 불길이 잡히면, 너희는 이 야성의 최고 전문가들 구백 명의 칼날 아래 철저히 짓밟힐 것이다.”
범오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분명한 도발이었다. 게다가 그냥 하는 말 같지도 않았다.
“모용 군장.”
범오의 말에도 모용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야율적이 재차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지.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은 없지만, 이쪽 역시 바쁘다. 시간이 지나면 분명 우리의 승리겠지만, 그것이 최선은 아니지.”
“…….”
“멀쩡히 살려 보내 주마. 지금이라도 부하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나가라. 내, 사음교도가 아닌 음신으로서 약속하마. 퇴각하는 너희를 건드리지 않겠다.”
범오가 버럭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중원을 전화(戰火)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려는 외세의 주구 따위가 교언(巧言)으로 누굴 가르치려 드는가!”
오만함을 버렸다 한들 특유의 불같은 성격은 그대로였다. 범오의 매서운 일갈은 또 다른 사자후가 되어 야율적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야율적은 내부가 흔들리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림승의 저 사자후에 이상할 정도로 반응하고 있지만, 지금은 약하게 보일 때가 아니었다.
“결정하라. 지금이 아니면, 너희는 반드시…….”
“열 명이로군.”
“뭐?”
스르륵.
부하들의 시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모용우가 야율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야율적은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런……!’
여전히 담백하고도 강인한 눈빛이었다.
한데 왜 이럴까? 그 변함이 없는 눈빛이 조금씩 부담스러워지려 했다.
그것은 야율적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연호정이야 자신보다 약해도 그 깨달음만큼은 자신을 초월하여 언제든 비상해도 이상할 것 없는 괴물이었으니 예외로 쳐도, 모용우는 그게 아니었다.
지닌바 깨달음은 그 자신이 이룩한 경지에 딱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놀라운 경지이나, 그렇다고 자신이 위축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야율적은, 모용우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지금에야 이곳을 부수는 것은 너희의 반응을 보고자 함이었다. 어딜 어떻게 파괴할지는 진즉에 고민을 끝냈어. 애초에 우리는 이곳, 너희가 야성이라 부르는 곳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
“내 예상대로더군. 성문 밖의 암살자들은 미끼일 뿐, 분명 누군가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올 거라 생각했지. 그리고 그 누군가는 십중팔구 이 야성을 다스렸던 자일 테고.”
모용우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 서늘한 미소에 야율적의 기도가 한 차례 출렁거렸다.
“바로 너다. 너는 철저하게 이쪽이 생각한 대로 움직여 주었어.”
“…….”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았다손 치더라도 고작 십수 년 만에 이 정도 왕국을 세운 걸 보면 너의 수완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너보다 못한 나의 계략에 걸려들 정도라면, 우리 대수께 어지간히 당했던 모양이군.”
“…….”
“안타깝구나. 몰리고 또 몰려서 상대의 계략도 읽지 못하는 지금의 널 보면서도 웃을 수 없는 나의 처지가 참으로 안타깝다.”
지이이이이잉!
탕마대검이 거세게 울었다.
연호정이 보여 준 검명은 아니었다. 그저 모용우의 감정에 따라 공명하던 건곤팔극진기가 살기가 되어 검에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곳에 통로가 있을 줄은 몰랐어. 예상했다면, 절대 신입들을 이곳에 배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야율적이 손수 목을 날려 버린 열 명의 군병들은 예전 싸움에서 죽은 인원을 보충한 탕마군의 신입들이었다.
말하자면 신입들에게는 첫 출정이었다. 한데 이리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이다.
“죽음이란 본디 허무한 것. 내 부하들은 알고 있었다. 첫 출정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사소한 실수 한 번으로도 죽을 수 있으며, 설령 실수치 아니하여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
화르르르륵.
모용우의 몸에서 하늘처럼 푸른 진기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우우우우우웅.
야율적의 몸에서 수왕사기가 피어올랐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상대를 교란해 틈을 만들고, 그 즉시 음한과 음화의 은신술을 펼쳐 시야에서 사라져야 했다. 그에게는 이럴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야율적은 모용우를 보며, 음신지기가 아닌 수왕사기를 피워 올렸다.
그것은 강제(强制)였다.
그러지 않을 수 있음에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데도 야율적은 모용우의 기도에 엄청난 자극을 받고 있었다.
마치 마약처럼.
이래선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모용우의 강력한 힘이 과거 사음교 시절 짐승 같은 투쟁술로 유명했던 야율적의 본성을 마구 자극하고 있었다.
“부하들의 죽음은 상관인 나의 책임이다. 네가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숨의 무게를 이고 있는 내 앞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시끄럽다!”
야율적은 저도 모르게 그리 외쳤다. 그리고 거칠게 갈려 나가는 목소리에 스스로 깜짝 놀랐다.
‘뭐지?’
이상하다. 이성과는 다른 반응이 자꾸만 튀어나오고 있었다.
‘음신지기를 익힌 이후, 난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본능밖에 몰랐던 짐승의 삶을 완전히 탈피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누구보다도 냉정한 판단력으로 광동성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지금에 와서 왜 다시 그때처럼!!’
모용우의 강인한 눈에 일순 살기가 번뜩였다.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사음의 주구.”
훅!
순간 모용우의 검기가 출렁이며 야율적의 미간을 향해 벼락처럼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야율적이 자세를 낮추며 땅을 박찼다. 쏘아진 검기가 그의 머리카락을 베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였다. 그리고 그 차이는, 지금의 모용우로서는 메울 수 없는 절대적 한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용우 역시 알고 있었다.
커허어어어어엉!!
눈 깜짝할 새에 모용우의 전권 안으로 들어와 주먹을 휘두르던 야율적은, 좌측 후방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사자후에 몸이 확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범오의 사자후였다. 사기(邪氣)에 상극이라는 불문의 사자후가 야율적의 평정심을 뒤흔들고 사기를 뒤틀어 버린 것이다.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촤아아아아악!
야율적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가슴에는 사선으로 기다란 검상이 나 있었다. 모용우의 탕마대검이 베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순간 야율적의 눈이 번쩍였다.
‘아차!’
한 번의 검격을 허용하니, 이제야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파아아악!
야율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십여 장 밖 계단으로 내달렸다.
그때였다.
퍼퍼퍼퍼퍼펑!
무수히 많은 불화살이 쏘아지며 야율적이 뚫고 가려던 계단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그곳에도 기름칠이 잔뜩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만한 고수가 불길을 못 뚫을 리는 없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주춤거리게 할 수는 있었고, 모용우와 범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퍼어어어억!
범오의 주먹이 야율적의 어깨를 강타했다.
비틀거리던 야율적, 그런 그의 등 뒤에서 모용우의 탕마대검이 무식한 속도로 휘둘러졌다.
퍼어어억!
거대한 검날이 야율적의 복부에 그대로 박혔다.
모용우의 입에서, 그제야 살기로 들끓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곱게는 못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