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뒤흔들다 (7)
파라라락!
의복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빌어먹을!”
묵비가 그녀답지 않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광동성 전체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
두두두두두.
적풍을 타고 말을 모는 연호정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져 있었다.
“이놈 말에 의하면 놈은 이미 광동성 관부 핵심 인사들의 위치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어. 맞지?”
사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 기술을 배우면서 기마술도 함께 익혔던 것일까? 말을 모는 실력이 상당히 노련했다.
“급하게 출발해서 나도 자세한 건 듣지 못했어. 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거냐?”
“나도 모르오. 다만 내가 제자들 중에 두각을 드러내자, 차기 음신으로서 후계자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소. 그때부터 하나씩, 하나씩 정보를 건네주었소.”
사마현의 눈이 깊어졌다.
“적어도 선대부터 이어진 건 아니라고 확신하오. 음신은 천하 모든 암살자가 신처럼 떠받드는 최강자일 뿐 왕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현재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암살자가 인정하는 사실이오.”
“군림하되 지배하지는 않는다…….”
“정확하오. 음신이 전설로 숭배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소.”
존재감만으로 모든 암살자들의 경의를 받는 존재.
그러나 야율적은 아니었다. 그는 음신이 되자마자 선대의 목숨을 취했고, 동시에 주변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야율적의 장악력은 놀라웠다.
애초에 음신이라는 전설이 뒷세계의 황궁을 만들겠다고 하니, 무수히 많은 암살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암살자를 철저하게 관리한 것은 물론, 세력을 무섭게 확장한 것은 전부 야율적의 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야율적은 전설의 존재로 추앙받던 음신의 이름을 현실 세계로 끌어와 지배자로 바꿔 버린 사람이다.
거창하다면 거창한 말이지만, 결국은 또 하나의 세력으로서 중원 남부에 무시할 수 없는 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소수의 암살자들은 당대 음신을 몹시 안 좋게 보았다. 많은 암살자가 음신에게 경의를 보내면서도 그의 뒤를 쫓았던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로이 오가는 음신 특유의 어두운 낭만 덕분이었다.
비록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지만, 적어도 암살자들에겐 그것이 낭만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본디 거칠고 어두운 일일수록 확실한 규범을 세워야 하는 법이고, 또 그 규범을 지키면서 살아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당대 음신은 선대 음신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놀랍게도 홍관은, 아니 당신들이 야율적이라 부르는 그자는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암살자를 휘하에 둘 생각은 없는 듯했소.”
묵비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많은 암살자를 모아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자예요. 한데 그만한 야욕이 없을까요?”
“내가 보기에는 그랬소.”
“왜 그렇게 생각하죠?”
“비록 원수지만, 야율적의 조직 장악력은 대단했소. 솔직히 마음만 먹었으면 수년 전에 암살계를 통일했을 것이오. 그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고, 나아가 음신이라는 이름이 주는 힘도 있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동성을 벗어나지 않았소. 휘하 암살자들의 수준을 높였을 뿐, 그 이상을 넘보지 않았지. 그의 무대는 언제나 중원의 광동성이었소.”
“대체 왜……?”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놈은 사음교도니까.”
“네?”
“놈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어. 놈은 음신이기 전에 사음교에서 보낸 세작이다. 실제로 나와 싸울 때, 음신이라는 명성이 주는 우월감보다는 사음교도로서의 자부심이 더 커 보였지.”
“……!!”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결국 놈의 목적은……?”
“그래.”
치리리링!
주인의 마음을 아는지, 연호정의 상체를 휘감은 교룡쇄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사음교가 중원 진출을 꾀할 때, 남부를 장악하여 든든한 뒷배로서 머물기 위함이다. 만에 하나 사음교가 패배해 몰리게 되었을 때 퇴로를 열 수도 있고, 나아가 남부에서 북부로 치고 올라올 실질적인 전력이 될 수도 있지.”
“……!!”
“놈에게는 사음교가 전부야. 말 그대로 광신(狂信)이지. 야율적 그놈은 사음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놈이다.”
문득 묵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본 야율적은 강했다. 강해도 보통 강한 것이 아니라,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수장들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강했다.
성천의 강자들을 제한다면, 능히 천하를 다툴 만한 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한 강자가 하나의 단체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 강자라면 자신의 일파(一派)를 세우고 싶은 욕심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율적은 사음교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무섭구나.’
묵비는 새삼 삼교(三敎)라는 족속들이 무서워졌다.
그만한 고수에게도 한 점의 의심조차 없는 광적인 충성을 받을 수 있는 교리가, 그만한 고수를 믿고 파견할 수 있는 배포와 자신감이 무서웠다.
혹여 누군가 배신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 될 수도 있음에도 그리했다는 건, 그만큼 사음교의 교도 장악력이 엄청나다는 뜻이리라.
사마현이 말했다.
“말했듯, 야율적은 광동성 관부 주요 인사들의 위치를 전부 파악해 놓았소. 그리고 그들 곁에 암살자들을 심어 두었지.”
“…….”
“어떤 식으로 명령을 내릴지는 나조차 모르오. 다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소.”
“뭐죠?”
“그자의 어떤 행위로 인해, 주요 인사 곁에 머무는 암살자들이 일시에 그들을 죽일 거라는 것.”
“…….”
“황궁과 관부의 힘이 약해진 때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 민초들이 나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건 절반 이상이 관부 덕분이오. 그러한 관부의 고위 인사들이 모조리 살해당한다면, 그날부로 광동성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것이오.”
가만히 듣고 있던 연호정이 말을 더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광동성의 관부는 지역민들의 일상에 깊게 관여하여 어업과 무역업의 세부 관리까지 도맡아 한다. 그 세밀함과 철저함에 있어서 다른 지역은 비교조차 할 수 없지.”
“왜, 왜요?!”
“광동성은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곳이다. 그 말인즉 여러 문물을 접할 기회가 많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제국 치하 체제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
“하물며 황궁과도 거리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지.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약하다는 뜻이야. 실제로 광동성에 사는 사람들은 중부, 북부와는 확연히 다른 문화를 영위하고 있어.”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의 굳은 얼굴에도 서서히 급박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에 산동에서 회랑단을 물리쳤을 때 기억해? 그때 아연이가 말했지. 해룡상단 하나가 무너지면 산동성의 상계가 무너지고, 산동성 상계가 무너지면 민심이 혼란스러워지고, 결국 산동성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그랬지요.”
“야율적이 하려는 짓은 그보다 더한 짓이야. 놈은 한 단체를 건드리려는 정도가 아니라, 광동성의 관부 자체를 일거에 마비시킬 생각이다.”
연호정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관부가 마비되면 광동성이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중앙 정부는 혼란에 빠진 광동성을 바로잡기 위해 수많은 관리와 군대를 보낼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득을 보겠나?”
“……!”
“신화교다. 신화교의 끄나풀들은 아직도 황궁과 관부에 걸쳐 암약하고 있어.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신화교 놈들의 황궁 장악은 가속화될 것이고, 그리되면 사음교의 중원 진출도 한층 빨라지겠지.”
묵비가 입을 뻐끔거렸다.
세상을 배운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연호정을 대신해 멸사군의 전술 훈련을 도맡아 했을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역시, 세상 경험이 적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치적인 부분, 그리고 대국을 보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이런 얘기를 들으면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묵비의 눈앞에 한순간 지옥 같은 환상이 그려졌다.
민초가 도탄에 빠지고 천하가 불바다가 되는, 혼란하기 그지없는 중원의 지옥도가.
“무림이라는 세계가 중원에 자리 잡은 이후, 제국의 정치는 그전과 궤를 달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크고 세밀한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바다를 낀 지역의 강력한 통제야.”
“바다…….”
“무림처럼, 제국법에서 벗어난 세상이 또 한차례 등장하게 되면 제국의 기반은 풍전등화가 된다. 조금 전에 말했듯, 광동성은 해외 문물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야. 만에 하나라도 광동이 중앙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면, 제국의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다가 끝내는 중원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 것이다.”
사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략자의 눈으로 봤을 때, 그 혼란의 시기야말로 타격의 적기라고 할 수 있소. 말 그대로 먼저 천하를 손에 넣는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을 테니까.”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가 도래해서는 안 돼. 적어도 지금은. 그래서 놈들을 막는 것이야.”
묵비가 심호흡을 했다.
“즉, 간단히 말해서 반드시 야율적을 막아야 하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하지만…….”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저 멀리 오 리(五里) 앞,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늦었을 수도 있어.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노릇, 넌 사마현과 함께 야성으로 가라. 사마현이 길을 안내해 줄 거야.”
“대수는요?”
사마현이 말했다.
“성도로 갈 거요.”
“성도요?!”
“고위 관리 중 누가 죽어도 문제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성도에 몰려 있소. 그리고 그중에서도 절대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둘 있지.”
“그게 누구죠?”
“행정과 통치를 담당하는 승선포정사사의 좌우(左右) 포정사.”
“아!”
연호정이 묵비를 보았다.
“난 그들을 지키러 가겠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
“잘 부탁한다. 비록 치명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야율적은 고수야. 모용 군장과 함께 놈의 수작을 막아야 해. 사마현이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알겠어요.”
“죽지 마라.”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연 공자도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공자가 아니라 대수다.”
그렇게 대화가 끝났다. 연호정이 힘차게 적풍을 몰았다.
두두두두두두!
적풍의 속도는 놀라웠다.
광룡부의 무게까지도 넉넉하게 감당하는 천하의 신마(神馬)가 적풍이었다. 그런 적풍이 주인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전보다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절정고수의 신법보다도 빠른 속도. 극한의 근력과 한혈마 이상의 지구력을 가진 적풍의 질주가 연호정의 전의(戰意)를 들끓게 했다.
“이랴!”
쿠르르르릉!
갈림길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연호정.
묵비가 사마현을 보았다.
“신법은 쓸 만한가요?”
“걱정 마시오. 적어도 당신보다는 나을 테니.”
“그럼 우리는 달려가죠.”
파아아아악!
안장을 박차고 뛰어오른 두 남녀가 남쪽으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