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뒤흔들다 (2)
“허억! 허억!”
얼마나 달렸을까.
정신없이 달려서 거리도, 시간도 잊었다. 광동성의 지리는 거의 전부 외우고 있었지만, 다급함에 이곳이 어딘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쿨럭!”
이제는 조금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개울가 앞에 쓰러진 야율적이 바닥에 피를 토했다.
피 색깔이 검붉었다. 짙은 피비린내에 역한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이……!’
야율적의 눈이 흔들렸다.
치이이이익!
핏물에 젖은 땅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피에 독이 섞여 있는 것이다.
혈관을 수왕사기로 보호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소홀했으면 독이 온몸으로 퍼져 죽었을 것이다.
특히나 이 독이라면!
‘사화문(死花紋)!!’
광동 서부에서만 나는 희귀한 독초로 만드는 사화문은 가히 극독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독에 내성이 있는 야율적조차도 쉽게 다루지 못하는 독이다. 가슴에 찔린 비수에는 바로 그 사화문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이놈이……!’
와중에 다행이라면 완벽하게 제조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음신으로서 제자에게 전수하지 않은 몇 가지 비술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사화문이었다.
가르쳐 주지도 않은 독을 제조하여 써먹다니, 확실히 대단한 놈이긴 하다.
후욱!
수왕사기를 거둔 그가 곧바로 음신지기를 끌어 올렸다. 독에 대해서는 수왕의 진기보다 음신의 기가 훨씬 더 안전했다.
“으윽!”
혈관 곳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음신지기가 사화문을 몰아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치이이이익!
야율적의 몸에서 진녹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후욱!”
비로소 야율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화문을 몽땅 뽑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희생된 게 너무 컸다. 사화문과 묶어서 뽑아내느라 기존의 음신지기 중 삼 할을 잃은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공과 함께 뽑아내지 않았다면 해독도 못 하고 죽었을 테니까.
“빌어먹을!”
쾅!
야율적의 주먹이 땅을 파고들었다.
‘놈들을 죽이지 못하다니.’
죽이지 못한 것도 기가 막히지만, 정말 오랜만에 죽을 뻔했다.
도주하지 않았다면 십 할 확률로 죽었을 것이다. 그는 연호정의 눈에서 절대 자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무서운 의지를 읽었다.
야율적의 눈이 깊어졌다.
수왕사기를 묻고 음신지기를 끌어 올려서 그럴까? 머리가 한층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놈은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소방에게 놈이 혈음장을 완벽하게 파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놈은 진기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그것이 수왕사기라는 것을 알았고, 수왕의 백타술을 반 박자 빠른 방어술로 모조리 막아 내기까지 했다.
생사결에서 경지가 오른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쪽의 무공을 철저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놀라웠다.
‘설마…… 본교에 세작이 있는 것인가?!’
야율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확률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만약 세작이 있다면 사음교가 오래전부터 중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을 텐데, 무림맹의 대응을 보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럼 뭐지? 도대체 놈의 정체가 뭐야? 뭔데 우리에 대해 이리 잘 알고 있는 것이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참 고민하던 야율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은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자신이 당했다는 것, 그리고 본진이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일단 그것부터 알아봐야 했다. 정말로 본진이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면, 일이 아주 복잡하게 돌아갈 것이다.
‘단순히 날 경동키 위해 꺼낸 말일 수도 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깔아 둔 함정으로 들어가 몰살당했을 확률이 높다.’
야율적은 품에서 작은 단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음정단 정도의 영약이라면 좋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내상을 빠르게 잡고 내공을 수복하는 데에 특효인 약이었다.
그렇게 야율적은 영단을 먹고 한나절 동안 운기를 했다. 마음이 급하다고 치료도 제때 안 하고 움직이는 것보다는 몸부터 치료하고 움직이는 게 낫다는 걸 아는 것이다.
다음 날.
광동 용문(龍門) 인근의 도시로 들어온 야율적은 곧장 정보원을 소환했다.
스르륵.
어두운 골목 안, 두건을 뒤집어쓴 청년이 야율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야주를 뵙습니다.”
야율적의 눈이 깊어졌다.
녀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간파한 그였다. 감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철저하게 단련된 암살자임에도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방증이리라.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하라.”
“예.”
잠시 후.
청년의 설명을 들은 야율적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야성(夜城)이 놈들의 손에 떨어졌다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곳에는 일천 명의 전력이 진을 치고 있다. 정예 중의 정예들만 모았거늘, 녀석들이 다 죽었단 말이냐?”
“그것은 아닙니다.”
“하면?”
“그중 구 할의 병력이 야주님을 찾으러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야율적은 기가 막혔다.
“나를 찾으러 내려왔다고? 대체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단 말이냐?!”
“……야주님이십니다.”
“뭐, 뭐라고?”
“정보망에 야주님의 지원 요청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나, 서북부에서 온 요청이라 최소 병력을 제외한 모든 암살자들이 출정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한 번도 지원 요청을 한 적이……!”
순간 야율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보 교란!!’
무림맹의 유군 부대가 광동에 진입했다면, 마땅히 그들을 지원할 정보 부대도 파견되었을 것이다.
‘개방이구나!’
휘하 암살자들이 속을 정도의 정보 교란은 개방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청년이 말을 이었다.
“다만 중간에서 연락이 끊겼기에, 현재 구백 명의 암살자들이 삼백 리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두 번이나 이쪽 정보망을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방이든 뭐든, 놈들은 단 한 번의 정보 교란으로 충분했을 터였다.
‘무혈입성. 본진의 병력 대부분을 빼내고 손쉽게 본진을 탈환한다…….’
야율적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완전히 당했구나.’
본진이 이리 허무하게 적의 손에 넘어갈 줄이야.
광동성의 왕으로 군림한 세월만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 세월 동안 세력을 공고히 하고 백도 무림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었거늘, 설마하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본진이 놈들 손에 들어갔다면…… 함정에도 걸리지 않았다는 소리.’
다 알고 있다.
놈들은, 이쪽에서 어떻게 움직일지를 전부 다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착착 맞아떨어지는 작전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놈이다.’
야율적이 떠올린 사람은 바로 연호정이었다.
‘이 일의 원흉은 무림맹의 봉공들도, 군사도 아니야. 현장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는 놈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야율적은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런 괴물 같은……!!”
“예?”
청년이 되물었지만, 야율적은 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완전히 미친놈이구나! 그 나이에 그만한 무공을 손에 넣은 것도 기가 막히거늘, 적의 움직임을 완전히 읽고 있다니?’
무섭다.
이쯤 되면, 무공보다도 놈의 머리와 눈치가 더 무서웠다.
무공은 아무리 강해도 선봉장의 위치에서 끝이다. 하지만 눈치가 좋고 지략이 뛰어나며, 사태의 흐름을 읽는 자는 그 이상을 넘볼 수 있다.
야율적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놈이 이 모든 사태를 꿰뚫고 대응한 것이라면, 놈은 군신(軍神)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천재가 간혹 나타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나? 어떻게 서른도 안 된 청년에게 이만한 능력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하지?’
본진이 점령당했다면, 그곳에 보관 중인 온갖 영약과 정보 문서들이 모조리 탈취당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본진, 야성에는 사음교와 주기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특제 전서응들을 키우고 있다. 그 전서응이 아니더라도 사음교에 연락할 방법은 많지만, 정보의 전달 속도가 지나치게 느리다.
야율적이 입술을 깨물었다.
‘별수 없다. 무조건 침투해야 해. 본교에 현재 상황을 모두 보고해야 한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참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은 별 게 아니었다. 이러다가 사음교 역사에 똥칠을 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하루…… 야성 곳곳을 뒤지고 다니겠지만, 고작 하루로는 비밀 통로를 다 꿰뚫지 못할 것이다.’
순간 야율적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사마현이었다.
‘놈이 무림맹과 손을 잡았다면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렸을 수 있다. 하지만 놈도 치명상을 입었어. 하루 이틀 안에 정신을 차리긴 어려울 터.’
말하자면 시간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한시라도 빨리 야성에 침투하여 사음교에 이 상황을 알려야만 했다.
야율적이 청년에게 말했다.
“그 외에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느냐?”
“있습니다.”
당연히 없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야율적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뭐냐? 또 무슨 일이 터진 거냐?”
“일이 터졌다기보다는, 심상치 않은 인물들이 광동에 진입했습니다.”
“누구?”
“소림 쪽 인물들입니다.”
“……!!”
야율적의 눈이 빛났다.
무림맹에서 유군 부대를 보냈으니, 소림승이 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은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소림의 이름은 그렇게나 무거웠다.
“그중 소림승은 야성으로 향했습니다. 유군과 함께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렇군.”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불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는 확실히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누구냐.”
“금강권문의 문주 이철경입니다.”
이철경은 소림의 속가제자로서는 드물게 본사의 비기를 전수한 천재 권법가였다.
물론 야율적의 눈에 찰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천재라고는 해도 연호정 같은 괴물은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이철경이 아니라 불산이었다.
‘불산이라면…… 설마?’
야율적의 눈이 희미하게 떨렸다.
‘정체불명의 고수들을 소환하려는 것인가?!’
불산에 불문의 고승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안 지는 불과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사음교에도 알렸다. 다만 그곳에 소림 출신도 있다기에 제대로 접근하질 못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큰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림의 이름은 그렇게나 무서웠다. 사음교의 힘을 광신하는 야율적조차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다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얘기가 달라졌다.
“내 휘하 정예들이 이곳에서 삼백 리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전부 소환하라. 단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두!”
“어디로 소환할까요?”
“야성으로 불러라. 빼앗긴 왕의 대지를 되찾을 것이다.”
청년이 눈을 빛냈다.
“야주의 명을 받듭니다.”
“최대한 은밀하게 이동하라고 전해라. 절대 적에게 들켜서는 안 돼. 암조단에도 따로 연락하여 적으로 추정되는 정보망을 찾고 완전히 마비시키라 명해라.”
“알겠습니다.”
스르륵.
청년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야율적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한 번은 당했지만 두 번은 어림없다. 이렇게 된 이상 전쟁을 시작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