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난장(亂場) (4)
연호정에게 달려드는 야율적을 보며, 소방이 이를 갈았다.
‘병신 같은!’
전력을 다하라고? 진즉에 전력을 다했어야지!
‘여유 부릴 때부터 알아봤어, 개 같은 새끼!’
쾅! 쾅!
홧김에 발질 몇 번으로 땅을 깨부수던 소방은 순간 후방에서부터 쫙 조여 오는 막강한 기파에 반사적으로 살기를 뿌렸다.
‘이 기세, 분명 저놈이 그때 수작을 부렸던 그 진법이로군.’
연호정과 휘하 부하들의 진법으로 진기 반응이 줄어들고 체력까지 깎였다.
소방의 눈이 냉정해졌다.
‘이쪽은 놈에게 맡겨야겠군.’
화는 났지만, 이곳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 했다. 그 정도 머리는 있었다.
그렇다고 야율적을 도와 연호정부터 죽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돕겠답시고 함께 싸웠다간 저 연호정이란 놈에게 약점이나 잡히고 말 것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한다고 반드시 둘이 되는 건 아니다. 놈들의 진법처럼 셋, 넷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일 때만도 못해질 수도 있다.
소방과 야율적이 그러했다. 관계도 관계지만, 지닌 무공 특성이 워낙에 달라서 힘을 합쳐 봤자 적에게 빈틈이나 보일 것이다.
“……개자식들.”
점점 빠르게 달려오는 다섯 기도를 느끼며, 소방이 혈음사기를 불살랐다.
“잔챙이부터 처리해 주마!”
파아아앙!
소방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갔다.
야율적은 생각했다. 여러모로 이상했다고.
뭔가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듯한 기분이랄까. 아무리 봐도 자신이 유리한 상황인데, 연호정의 얼굴에선 어쩐지 여유가 느껴졌다.
물론 그 여유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었다.
연호정은 전투의 천재다. 소방의 무공 투로를 완전히 꿰고 있다곤 해도, 자신보다 강한 고수 둘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깨달음에서 오는 차이. 실질적인 무공의 격차를 메울 만큼의 전투 감각과 상위의 깨달음으로, 두 고수의 공격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연호정의 여유는 실전에서의 여유다. 수만 자루의 칼을 두들겨 온 장인이 새로운 병기를 만들 때 보여 줄 수 있는 능숙함이랄까.
그래도 야율적은 긴장했다. 연호정이 뭔가 노리는 게 있는지.
그래서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암살자 특유의 습관도 습관이지만, 상대가 어떤 걸 노리는지를 알아야 확실한 대응책을 구상할 수 있으니까.
다만, 그것이 너무나도 단순한 시간 끌기일 줄은 몰랐다는 게 실수였다.
훅!
교룡쇄를 단단히 잡아 쥔 야율적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접근했다. 신법으로는 야율적에 뒤지지 않는 연호정조차 순간 놀랄 만큼의 속도였다.
쩌어어어엉!
연호정이 재차 피를 토했다.
광룡부의 널찍한 부신(斧身)으로 막았지만, 그 충격파에 골수까지 뒤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 야율적의 무공은 충격적일 만큼 대단했다.
쩌저저정! 퍼어어엉!
맨손 백타의 강약 조절이 신기(神技)에 이르러 있었다.
상반신의 온갖 사혈을 노리는가 싶으면 어느새 하단으로 치고 내려오고, 하단인가 싶으면 눈 깜짝할 새에 목을 노리는 관수(貫手)와 평권(平拳)이 눈을 어지럽혔다.
단순히 변초에 능한 게 아니라 한 수, 한 수가 치명적인 살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공의 파괴력은 번작보다 한 수 아래지만, 속도와 기교에서는 오히려 번작 이상이었다. 파괴력 역시 번작에 비했을 때 한 수 아래라는 것이지, 어지간한 고수는 방어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발경의 폭발력이 대단했다.
퍼퍼퍼퍼퍼퍼펑!
무식할 정도로 빠른 속도전이었다.
힘도 힘이지만, 백타의 속도 역시 연호정보다도 한 수 위였다.
상대를 죽이고자 할 때 굳이 더 강한 힘으로 상대할 필요는 없다. 더 빠르고 날카로운 한 수면 족할 뿐이다.
야율적의 무공이 그와 같았다. 힘이 아닌 기교와 속도로 상대를 살해하는 데에 특화가 되어 있었다.
암살자의 무공이 극에 이르면 정면 승부에서도 극강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하는 그였다. 세상에는 이런 무공도 있는 것이다.
치리리리리링! 푸화악!
연호정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좌측 안면부로 들어오는 권격을 읽었지만, 완전히 피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먼저 고개를 돌려 흘려 냈으나 풍압만으로 입 안이 터져 버렸다.
촤르르르르륵!
한 번 더 음한백팔수(陰寒百八手)로 공격을 가하려던 야율적은 순간 움찔했다.
‘……?!’
철쇄가 그의 오른팔 팔꿈치를 칭칭 묶어 버렸다. 공격을 허용하는 그 순간에 철쇄를 휘둘러 묶은 것이다.
야율적은 깜짝 놀랐다.
번개 같은 대응 능력은 둘째였다.
‘늘어나?!’
그렇다.
그가 본 연호정의 철쇄는 길어 봤자 오 장이 채 되지 않았다. 충분히 길었지만, 한 발로 철쇄를 짓누르고 길이를 조절했기에 팔꿈치를 묶을 수는 없을 터였다.
한데도 묶였다. 철쇄가 늘어났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야율적의 눈이 번뜩였다.
퍼억!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다. 야율적이 이마가 연호정의 턱을 후려친 것이다.
순간적인 내공 방패로 충격을 해소했지만, 잔여 충격만으로도 뇌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연호정의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고수의 격전은 한순간의 실수로 승패가 갈린다. 하물며 찰나지간 정신이 날아간 상대를 요리하는 건 지나치게 쉬운 일이었다.
‘끝을 내 주마.’
야율적이 검지와 중지를 모아 연호정의 목젖을 향해 휘둘렀다. 질질 끌 것 없이 한 방에 멱을 따 버릴 속셈이었다.
그때였다.
‘……?!’
야율적은 자신의 두 발이 땅에서 붕 뜨는 것을 느꼈다.
‘뭐?’
치이이이잉! 쾅!
교룡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야율적의 몸이 반월을 그리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충격은 거의 없었다. 이 정도 공격에 다칠 만큼 단련을 게을리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은 상당했다.
‘엎어 쳤다고?’
촤르르르륵!
야율적이 재빨리 몸을 세웠다.
‘……저놈.’
연호정의 상태를 본 야율적은 기가 차는 걸 느꼈다.
‘눈을 감아?’
그렇다.
연호정은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방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신보다 강자를 앞에 두고 눈을 감다니?
치리리리링!!
상대가 어떤 상태든 그걸 봐줄 필요는 없다. 야율적은 교룡쇄를 힘껏 당겼다.
후우욱!
연호정이 힘없이 딸려 왔다.
교룡쇄를 놓아 버릴 줄 알았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딸려 온다. 근접전에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방금과 같진 않을 것이다.’
정신이 날아간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연은 한 번이면 족하다.
야율적이 손을 내뻗다가 번개처럼 각법을 날렸다. 위력적인 일격으로 상반신을 통째로 터트려 버릴 생각인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야율적은 연호정이 자신을 어떻게 휘둘렀는지 알 수 있었다.
휘리리리리릭!
화포의 화탄처럼 쏘아진 각법이 연호정의 몸을 통과했다.
아니, 통과한 것처럼 보였다. 정작 연호정의 몸은 떨어지는 낙엽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야율적의 눈이 번뜩였다.
‘유공(柔功)!!’
찰나지간 각법을 접은 야율적이 상반신을 말고 전진했다. 몸통 박치기, 그대로 들이받아 버리려는 것이다.
촤르르르르륵!
‘뭐지?’
교룡쇄가 다시금 늘어나며 야율적의 상반신을 휘감았다.
파아아악!
단숨에 자세를 낮춰 교룡쇄의 포박을 피한 야율적이 재빨리 오른팔을 흔들었다. 팔을 묶고 있는 교룡쇄를 풀려는 것이다.
하지만.
치이이이이익!
음한백류의 기운을 억압하는 살벌한 화기(火氣)가 있었다.
주작화기였다. 음한백류의 냉기를 화기로 제압하며 교룡쇄를 더 단단하게 묶어 버리는 것이다.
야율적의 눈이 흔들렸다.
‘이놈, 뭔가 이상하다.’
“후욱! 후욱!”
연호정의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다.
아예 망가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정적인 무공 구현이 가능할 정도도 아니었다. 내가고수가 저만치 호흡이 흐트러지면 진기 운용은 물론 발경술에도 빈틈이 생기게 마련이다.
한데 팔을 묶은 철쇄로 전달되는 공력은 활화산처럼 거세기 그지없었다. 얼핏 희미한 목기(木氣)가 느껴지는 듯도 했지만, 그보다는 화기가 훨씬 거세어 오른팔 전체가 뜨거워졌다.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야율적은 음한의 냉기를 더 강하게 쏟아부었다.
치이이이이익!
화기와 냉기가 부딪치며 희뿌연 연기를 만들어 냈다.
‘……!!’
야율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이럴 수가? 이놈 내공이……?!’
화기의 농도가 실로 엄청나다.
불어난 목기의 힘을 받아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출력을 보여 주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음한백류의 냉기를 점차 증발시키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속도과 기교에서 어떻게든 대응하는 걸 보며 감탄했지만, 그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자신보다 못한 경지로 검명의 깨달음을 얻은 놈이다. 그 정도 안목이라면 한 수 앞, 두 수 앞의 공격을 읽고 대응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공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내공, 진기란 곧 무공의 경지를 나누는 주요 지표다. 깨달음으로 자신과 백타 대결을 할 수는 있지만, 내공의 질로 상대할 수는 없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 높은 경지를 이룬 자의 내공이 질적인 면에서 더 앞선다는 건 상식이었다.
한데도 밀리다니?
쿵!
어느새 광룡부에서 교룡쇄를 떼어 낸 연호정이 한쪽 팔에 교룡쇄를 묶은 후 크게 휘둘렀다.
원형의 동작. 너무나도 부드럽다. 줄곧 직선적이고 파괴적인 무공을 구현하던 연호정답지 않았다.
야율적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내공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콰드드드드득!
야율적의 두 발 밑으로 기다란 고랑이 생겼다.
철쇄에 음한백기를 퍼붓고, 양발에는 음화홍기를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음신의 음양이기를 동시에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도 벌써 일 장이나 끌려 들어갔다.
야율적은 기어이 노성을 터트렸다.
“뭐 하자는 것이냐, 이놈!!”
연호정은 말없이 교룡쇄를 당겼다.
콰드드드드득!
야율적이 또다시 일 장이나 끌려갔다. 압도적인 힘이었다.
‘이, 이게 대체?!’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무공에 제대로 대응도 못 하고 얻어맞던 놈이, 잠깐 정신이 날아간 뒤부턴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힘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게 뭐지? 갑자기 왜 사람이 변한 거지?
“……천하의 신검을 쥐고 있음에도, 그간 변변찮은 놈들에게 워낙 많이 당해 왔었다.”
연호정의 목소리는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아련하고 부드러웠다.
“어쩔 수 없지. 그 검을 쥐고 휘둘렀던 건 과거의 나니까. 흑암의 이름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그 검을, 벽산의 이름으로는 절반도 채 뽑지 못했다.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
연호정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야율적은 다르게 느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놈이 마치 자신을 훤히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싹!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화르르르르륵!
교룡쇄가 점차 빨갛게 달아올랐다. 주작화기가 음한백기를 거의 완벽하게 밀어 낸 것이다.
“투왕과 싸우면서 느꼈다. 뭔가가 왔다고. 뭔가가 달라지려 한다고.”
“……?!”
“그것은 그 길을 걸어 보지 못한 자는 절대 알 수 없는 숙명의 부름이었다. 나조차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며칠을 고민했었어.”
연호정이 힘차게 땅을 밟았다.
쿵!
순간 야율적의 몸이 두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연호정이 그대로 몸을 회전했다.
마치 새의 날개처럼 양팔을 쫙 편 채 제자리에서 도는데, 그 모습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고 권법을 시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속절없이 허공에서 돌던 야율적은, 그제야 연호정의 저 몸짓이 어떤 무공인지 깨달았다.
‘태극권(太極拳)?!’
교룡쇄에 묶인 야율적의 몸이 무기력하게 회전하다가 바위에 처박혔다.
콰아아앙!
야율적이 낭패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때, 연호정이 눈을 떴다.
번쩍!
그의 두 눈에 태양의 열기가 담겼다.
너무나도 밝게 빛나고 있어서, 그 주변을 흑암으로 물들이는 신광(神光)이었다.
“말했지. 계집은 보내 줄 수 있어도 넌 못 보낸다고.”
“……!!”
연호정의 얼굴에 한껏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흑암의 살기가 돌아왔다.
“우리 땅에서 이 개판을 치고도 멀쩡히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