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01화 (401/963)

401화. 난장(亂場) (1)

콰르르릉!

연호정의 파괴 행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놀랍게도 묵비 일행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그였다. 평소의 그라면 아군부터 챙기고 적을 맞이할 텐데, 지금은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콰릉! 콰르르르릉!

그 와중에 돋보이는 것은 광룡부의 파괴력이었다. 양천과의 비무 때보다 한층 더 강력한 힘을 보여 주는 그였다.

그것은 양천이 준 목령단 때문이 아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양천과의 비무를 통해 그에게서 얻을 수 있었던 약간의 무리(武理)를 본인의 무공에 녹여 내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쾅! 쾅! 쾅!

광룡부의 창대가 휘어질 정도로 휘둘러 댄다.

벽라진결, 용포신공이 합일된 연가신단이 폭발적으로 회전하며 막대한 양의 진기를 방출했다. 그 방출된 진기가 백호기의 뒤를 받쳐 주니, 천하에 파괴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건물 벽이든 바위든, 모조리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찰나의 발경술에 있어선 나보다 떨어지지만, 지속적인 파괴력을 자아내는 데에는 양천의 발경술이 더 낫군.’

사신무는 형(形)과 식(式)에 있어선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제일이다. 그러한 초식을 뒷받침해 주는 사신의 진기는 공격, 방어, 회피, 반격 모든 부문에 있어 완벽에 가까운 위력을 발하게 만든다.

다른 무공처럼 필살기(必殺技)라고 할 만한 초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에 맞게 구현하는 사신의 자유분방한 초식들 자체가 필살기요, 최강의 무공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무공 구현의 근본과도 상통한다. 진기를 잔뜩 모아 파괴적인 힘을 내치는 것보다는, 상대의 공격에 따라 대응하며 최선의 일격을 먹이는 것이 바로 사신무이기 때문이다.

최선은 곧 최단이고, 최단은 곧 최강이다. 그래서 사신무는 전장의 무공이다. 빠르게 적을 처리하고 다음 적을 맞이해야 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분명 놓치는 것도 있다.’

사신무의 최종오의(最終奧義)라 불리는 황룡신왕공(黃龍神王功), 즉 황룡기(黃龍氣)에 이른다면 기공술만으로도 천하를 압도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즉, 현재의 사신무로 자신 이상의 강자들과 격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신무를 더 막강하게 만들어 줄 여러 활용법이 필요하다.

물론 기본은 언제나 사신무다. 핵심은 그것을 어떤 무리(武理)로 활용하느냐였다.

그리고 이번 양천과의 격전에서, 연호정은 그에게 큰 것을 배웠다.

‘언제나 새로워.’

연호정의 얼굴에 경이가 어렸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세상, 어떤 부분에선 통달했다고도 자부했던 세상은 자신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준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치를, 딱히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 없던 부문에서, 또 다른 고수에게 배운다.

‘세상은 넓고 배움에는 끝이 없구나.’

콰르르르릉!

마지막 바위를 날려 버리고 거대한 길을 뚫은 연호정이 비로소 멈추었다.

파아아악!

순식간에 따라붙은 사마현이 그의 옆에 섰다.

“어디로 가는 거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따라왔나?”

사마현이 차갑게 말했다.

“따라오라 하지 않았소?”

“너는 오늘 날 처음 봤다. 그런데도 서슴없이 따라붙어?”

“……!!”

“네 실력은 분명 뛰어나군. 그 나이대의 수준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사람을 보는 안목도 제법 뛰어나고.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가 돼.”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너에겐 분명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노력한다고 메워지는 것이 아니지.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해지기를 바란다.”

사마현을 향한 연호정의 말투가 어느새 하대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사마현은 연호정의 말투가 바뀐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연호정의 실력이, 기파가 그러한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끔 만든 것이다.

사마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은 날 가르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배움에는 때가 없는 법이야. 위기의 순간에서조차 적에게서 빼앗아 배울 게 생기지.”

“…….”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고 싶다면 배움을 게을리하지 마라. 어디에서도 못 듣는 강의지만, 수강료는 따로 받지 않겠다.”

“됐소. 그래서, 왜 여기까지 도망친 거요?”

사마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시무시한 파괴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건물의 외벽을 부숨과 동시에 온갖 바위와 돌벽을 깨부수며 전진해서 만든 이 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엄청나긴 엄청나군.’

벽산호장의 명성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후기지수에 불과할 뿐이다. 사마현은 물론 세상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경이로운 무력이다. 다른 건 몰라도 무공의 파괴력만큼은…… 그자에 필적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곧 암살자들이 들이닥칠 거다. 너도 알고 있지?”

“그렇소.”

폐건물을 덮쳤던 암살자들이 연호정과 사마현을 쫓지 못한 것은, 연호정의 뒤를 따른 사마현이 온갖 암기와 독무(毒霧)로 추격을 끊어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미봉책일 뿐이다. 사마현의 실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직접 독공을 연마했거나 기상천외한 암기, 폭약 등을 쓴 게 아닌 이상 무조건 따라붙게 되어 있다.

“설마 날 믿고 이곳까지 온 거요?”

“그럴 리가 있나. 처음 본 네 녀석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할 줄 알고 도박을 걸어? 난 그렇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야.”

“하면?”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와 만나기 전, 이 일대의 지형을 조사했다. 만에 하나 습격을 받으면 퇴로는 어디가 좋을까? 마땅한 퇴로가 없다면 어디로 만들어야 할까? 꽤 고민했었지.”

“……!”

“퇴로로 빠질 경우 내 수하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훗날 어디에서 접선해야 할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얘기도 전부 끝냈다.”

사마현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사마현을 보며 말했다.

“개인의 무력이 제아무리 강하다 한들 집단의 힘을 이길 수 없고, 집단이라 한들 작전 없이 싸우다간 소수의 병력에도 속절없이 당할 수 있지. 그건 기본이야.”

“…….”

“해볼 만큼 해봐도 어쩔 수 없는 경우. 나 자신의 실력만으로 비벼 봐야 할 때는 바로 그러한 경우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무림의 제일 가치가 힘이라고 말하지만, 진짜들은 달라. 그들은 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눈치와 머리라는 것을 안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새겨듣도록 해. 무림에서 강제로 퇴장당하고 싶지 않다면.”

무림에서의 퇴장.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가만히 연호정의 등을 보던 사마현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왜 그러는 거요?”

“뭐가.”

상황이 이 정도가 되니, 사마현으로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내게 그런 말을 해 주는 거요?”

“언제는 듣고 싶지 않다더니 대뜸 질문이네? 하지만 뭐, 좋아. 마냥 긴장해 있는 것보다는 잠시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도 좋지.”

“…….”

“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말이오? 당신은 나에 대해 모르잖소?”

그럴 리가.

“모르지. 모르지만 느낌이라는 건 있잖아.”

사마현이 서늘하게 웃었다.

“모순이로군. 지금껏 당신이 한 말에 따르면, 고작 느낌이 좋다고 그런 말을 해 주는 것 역시…….”

“두뇌만큼 중요한 것이 눈치라고 말했다. 그리고 눈치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야. 오랜 경험으로 생긴 육감 역시 중요한 법이다.”

“…….”

“어차피 네놈의 반역은 음신에게 들켰어. 말하자면, 우리의 연수는 이미 강제적으로 이뤄졌단 뜻이지.”

촤르르르륵!

연호정이 상체에서 교룡쇄를 풀었다.

“일시적 동맹이라도 동료는 동료인데, 이 정도 베풂이야 어렵지 않지.”

철컹!

광룡부의 창대 끝 고리에 교룡쇄를 건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마현의 눈이 깊어졌다.

갑자기 도끼에 쇠사슬을 연결하는 연호정의 모습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뭐 하는 것이오?”

촤르륵. 촤르륵.

교룡쇄를 광룡부의 창대 전체에 돌돌 매며, 연호정이 대답했다.

“또한, 무림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만 보고 달려서는 안 돼. 이곳은 개방과 함께 고심해서 선택한 가장 안정적인 퇴로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지.”

“문제?”

“습격자가 존재할 경우, 우리가 이곳으로 길을 잡을 걸 상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

“……!!”

“내가 아는 건 적도 알아. 그래서 이중, 삼중의 작전이 필요한 것이다. 그마저도 통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인사대천명이라는 고루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현이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화홍류, 음한백류의 두 진기가 합쳐지며 감각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의 감각에는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가벼이 부는 바람 소리 외에는 어떠한 잡음이나 기척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쓸모없는 짓이다.”

“뭐라고?”

“네놈은 음신의 무공을 배웠어. 대저 암살자의 무공이란, 그 수준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동종(同種)의 공부를 연성한 고수에겐 통하지 않아. 철저하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지.”

“……?!”

“네놈이 천재라도 지금의 실력으로는 스승을 이길 수 없어.”

연호정이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콰아아앙!

느닷없이 폭발한 진각은 그 위세가 실로 엄청났다. 반경 이십여 장이 뒤흔들릴 정도로 압도적인 진동을 발하고 있었다.

순간 사마현은 자신의 기감에 미세하게 포착되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느낀 순간, 사마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암살자의 무공이 극의에 이르면 살의(殺意)만으로도 목표물의 감각을 흐트러트릴 수 있다. 하물며 동종의 무공을 익힌 하수라면 더 쉽지. 진기를 교란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바보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정도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천천히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도끼날의 움직임에 따라 보이지 않는 바람이 흐름을 바꾸는 듯했다.

그때였다.

퍼어어어어어엉!

연호정이 깨부순 통로 저 멀리서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그 폭음을 낸 것은 암살자들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암살자들의 공격을 흘려 내고 방어하며 되갚아 주는 도가 무공의 맑은 충격파가 내는 소리였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쯧, 하여튼 늦단 말이지.”

잠시 후.

파아아아아악!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옥청이 순식간에 연호정 옆으로 다가왔다.

“대수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너는?”

“괜찮습니다. 아직 팔팔해요.”

“그럼 이 바보를 부탁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놈은 절대 죽어선 안 돼. 목숨을 걸고 지켜라.”

옥청이 포권을 취했다.

“대수의 명을 받듭니다.”

사마현은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지키라니? 나를 말이오?”

“그래, 인마. 네 스승이 나타난 지금, 넌 걸리적거리는 돌멩이만도 못해.”

스르륵.

연호정이 백룡부를 꺼내 들었다.

오른손에는 교룡쇄가 칭칭 감긴 광룡부가, 왼손에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손도끼 백룡부가 들렸다.

우우우우우웅!

백호기가 연호정의 전신을 휘감으며 무서운 투기를 발산해 냈다.

연호정이 버럭 소리쳤다.

“나와라!!”

쩌어어어어어엉!

무시무시한 백호후(白虎吼)가 산천초목을 떨게 했다.

“……이거야, 원.”

후웅.

일행의 전면 십오 장 앞.

한 줄기 바람과 함께 두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야율적과 소방이었다.

야율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존재를 알아챘나?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남자였군.”

화아아악!

연호정의 두 눈에 끔찍한 살기가 담겼다.

“왔나, 대가리?”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