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혼전(混戰) (5)
사마현의 눈이 깊어졌다.
연호정이 아차 하는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오. 지금은 음신이 아니지. 우리와 함께 당대 음신을 제거하면, 그때 당신이 음신이 되겠지.”
“대뜸 위험한 소릴 하시는군.”
“스승을 제거하자고 먼저 손을 뻗은 쪽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소.”
초면부터 꽤 날 선 대화가 오고 갔다. 적어도 사마현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달랐다.
‘그래, 네 녀석이었군.’
천재 암살자라 불리는 사람답지 않게 고풍스러운 백의를 입은 사마현의 자태는 그야말로 미공자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저 수려한 외모 속에 얼마나 흉흉한 칼날을 숨기고 있는지 연호정은 잘 알고 있었다.
‘전대 음신의 대제자라? 그렇다면 그 시절에도 네가 야율적을 죽이고 새로운 음신의 위(位)에 올랐다는 뜻인데.’
연호정의 얼굴이 묘해졌다.
‘확실히 걸물은 걸물이야.’
자신보다 약자를 짓밟는 건, 그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할 행위임을 떠나 몹시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강자를 누르고 새로운 왕좌를 차지하는 것은 지난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사마현은 그걸 해낸 위인이다. 연호정이 살았던 흑암제 시절에는.
‘어쩌면 그때도 지금처럼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을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반란에 성공해 새로운 음신으로서 중원 뒷세계를 거머쥔 사신이 되었다는 것.’
연호정 스스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그는 사마현을 상당히 좋게 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결론적으로는 사마현이 사음교의 간자를 제거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연호정에게 사음교는 어떤 식으로든 멸망시켜야 할 족속들이니까.
쿵.
연호정이 광룡부를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담이 꽤 큰 모양이오. 보통 이런 자리엔 병기를 들지 않고 참석하는 것이 예의이거늘,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는구려.”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주의라서.”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고깝다 생각지 말고 들으시오. 급하면 급할수록, 상황이 나쁘면 나쁠수록 더 철두철미하게 움직여야 하는 법이오. 앞으로 어떤 사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부분은 신경 쓰시는 게 좋소.”
목소리가 상당히 묵직했다. 누가 들어도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사마현은 연호정의 진심을 받아들이지도, 무시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 어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목적이 분명한 자리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맙시다. 놓치는 게 많을 것 같으니까.”
사마현은 묘하게 피곤한 것을 느꼈다.
“그쪽은 그쪽 마음대로 하시오. 이쪽은 알아서 서두를 테니.”
“뭐, 그렇게 합시다.”
이윽고 두 사람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고 싶소. 하나 그 전에, 이것 하나만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소.”
“말씀하시오.”
사마현의 눈이 깊어졌다.
“이곳 광동성은 수천 명의 암살자들에게 장악되었소. 이 넓은 지역을 고작 수천으로 장악했다고 하니 믿기진 않겠지만, 그 휘하에 상상도 못 할 흑도인들이 점조직 형태로 광동성을…….”
“믿소.”
“…….”
“그걸 해결하려고 무림맹에서 우리를 파견한 것이오.”
“믿는다니 얘기가 빠르겠군. 즉, 당신들의 움직임 일거수일투족이 우리 암살자들의 눈에 잡혔을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오.”
“그렇겠지.”
“실제로 본 암조단은 무림맹의 유군 부대가 언제 광동에 진입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훤히 보고 있었소.”
사마현의 눈이 번뜩였다.
“개방이 관여하기 전까지는.”
“능력 좋은 사람들이지.”
“개방의 정보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알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겠소. 이곳으로 오는 동안 당대 음신의 눈에 걸리지는 않았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알 길이 없소. 그저 우리를 돕는 개방의 정보원들을 믿을 뿐이오.”
“……역시, 서둘러야 할 것 같군.”
사마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대 음신을 제거하러 온 것을 알고 있소.”
“그런 것 같더군.”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음신도 알고 있소. 즉, 음신은 유군 부대의 공격에 대비해 만전을 기했소.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성벽을 쌓았지.”
“그래서?”
“나는 당대 음신의 대제자요. 그와 나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소. 그자의 거처로 가는 길과 비밀 통로 스물여섯 군데가 모두 내 머리에 있소.”
“…….”
“도와주겠소. 함께 음신을 잡읍시다.”
연호정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사마현이 말을 이었다.
“뜬금없이 대제자란 사람에게 연락이 와서 당황스러우리란 건 알고 있소. 이것이 함정은 아닐지 고민될 테고, 함정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지 알 수 없는 족속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오.”
“…….”
“나는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내 진심을 증명할 수 없소.”
“그게 문제요.”
“…….”
“제아무리 상황이 급했다 한들,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 날 설득시켜야 했소. 잠시뿐인 동맹이라도 어느 정도의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연수는 한낱 물거품에 불과할 뿐이오.”
사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지적은 타당하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졌소. 과거를 후회하는 것보다는, 이미 내린 선택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더 낫다고 보오.”
“그건 그쪽 사정이외다.”
“당신들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오. 조금 전,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했소. 당대 음신을 죽이면 내가 차기 음신이 될 거라고.”
“그랬지.”
“나는 세력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없소. 내 휘하의 정보 조직도 있고 전우(戰友)도 있지만, 그것은 암살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틀일 뿐이오.”
참으로 묘한 발언이었다.
암살자인데도 동료를 전우라 칭한다. 암살이라는 행위 자체의 부덕함을 떠나, 적어도 사마현이 무분별한 암살을 일삼는 마인(魔人)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라고, 연호정은 생각했다.
‘암살자가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지.’
흑암제 시절에 만났던 사마현과 지금의 사마현은 같은 사람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다.
이름도, 본성도 같았지만 능력과 위치가 달랐다. 그리고 사람은 본인의 능력과 위치에 따라 상상도 못 할 만큼 바뀌기도 한다.
연호정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과거에 만나 본 적 있는 사람이라고 쉬이 넘겨짚다가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될 테니까.
“즉, 당대 음신을 죽이고 당신이 새로운 음신의 위(位)에 오르면 다시 어둠 속으로 숨겠다는 것이오?”
“그렇소. 그리고 그것이 본래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음신의 전통이었소. 내 스승이란 작자는 그것을 깨고 암살자들을 사병화(私兵化)시킨 장본인이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무분별한 살인을 일삼는 암살자보다 신념을 가진 암살자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것은 무림인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림인이 암살자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적어도 암살자는 의뢰를 받고 움직이지만, 무림인에게는 실질적인 규범이 희미했으니까.
그래서 백도 정파가 생겨난 것이다. 명백한 규칙과 규범을 토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결국, 무림인이나 암살자나 거기서 거기다. 다만 어떤 가치를 위해서 사는가, 어떤 미래를 꿈꾸며 사는가가 다를 뿐이다.
가만히 사마현을 주시하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소. 아, 다소 무례하게 들릴지라도 이해해 달라 감히 부탁해 보오.”
“말씀하시오.”
“당신은 암살자라는 직업이 좋소?”
“……?”
사마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리에서 내 직업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논할 생각이라면…….”
“그럴 생각이었으면 당신은 살아남지 못했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도끼부터 들었을 테니까.”
“…….”
“내 질문을 과대 해석하지 마시오. 난 정말 순수하게 묻고 있는 것이오.”
“모르겠소.”
“……모른다?”
“그렇소. 그 부분에 관해서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소.”
마음은 다급한 듯했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묻어났다. 적어도 연호정은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 음신의 직위를 과감하게 내던질 수 있겠소?”
“나는 당신의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오.”
사마현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번 연수 과정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하오?”
“그렇진 않소. 다만, 연수가 성사된다면 그 이후의 향방에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질문을 받자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오.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을 생각도, 당신에게 내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 생각도 없소.”
사마현이 깍지를 꼈다.
“내가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한 가지. 당신들이 나와 손을 잡고 음신을 처치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오. 괜한 질문으로 기분을 상케 했다면 내 사과하리다.”
연호정의 흔치 않은 사과였다.
하지만 사과를 받고도 사마현은 기분이 다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뭐지.’
사마현은 연호정의 눈을 바라보았다.
맑고 깊은 눈. 저리 지독한 피 냄새를 풍기는 도끼의 주인이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눈빛이 좋았다.
‘……나를 떠보려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나를 얕보는 것도 아니고.’
비록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나이지만, 사마현의 암살 경험은 중원의 모든 암살자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만큼 독하게 훈련을 받았고, 쉴 새 없이 암살 활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덕분에 사람의 감정을 읽는 능력 하나만큼은 도가 튼 그였다.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워.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물끄러미 연호정의 눈을 직시하던 사마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대답을 듣고 싶소. 우리와 함께할 것이오?”
“고민을 해 봅시다.”
“고민할 시간은 없소.”
“그렇다면 먼저 행동에 나서시오. 판단이 서면, 그때 우리가 뒤따르겠소.”
사마현의 눈이 다시 차가워졌다.
“우리를 화살받이로 쓰시겠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믿을 수 없는 동지와 위험천만한 일을 진행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손해를 보는지 아닌지 유심히 지켜보는 쪽이 만 배는 낫소.”
“유감이…….”
“분명히 말하건대, 처음에도 말했다시피 당신은 우리에게 신뢰를 줄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했소. 그건 그쪽 잘못이고, 고로 우리는 쓸데없는 위험에 발을 들일 생각이 없소.”
“…….”
“거래를 하고 싶었다면 그 거래가 성사될 만한 최소한의 준비는 해 뒀어야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라운 대응이었다. 사마현보다 먼저 일어나 등을 돌리는데, 한 치의 아쉬움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후웅.
광룡부를 어깨에 걸친 연호정이 사마현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하던 대로 일을 진행하겠소. 그쪽도 그쪽이 본래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시오.”
사마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에 하나 우리의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주저 없이 공격할 것이오. 그것은 알아 두길 바라오.”
“…….”
“얘기는 끝났소. 이만 가시오.”
“…….”
“더 할 말이 남았소?”
“……하나 물어봅시다.”
그러라고 대답하려던 사마현은 순간 흠칫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눈이 이전과 달리 살벌한 위압감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당신, 음신 몰래 이 자리를 마련했던 것 맞소?”
“쓸데없는 질문이오. 당연히…….”
“하면, 사방에서 몰려오는 이 짐승 냄새는 어찌 설명하겠소?”
“뭐?”
그때였다.
피유우우웅! 퍼억!
밖에서 날카로운 화살 소리와 함께 끔찍한 파육음이 들렸다.
곧이어 묵비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연 공자!”
연호정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네놈, 꼬리를 달고 왔군.”
“……!”
사마현이 벌떡 일어났다.
그때, 묵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수가 많아요! 조심해요! 곧 들이닥쳐요!”
콰앙!
건물 천장이 무너지며 수십 명의 암살자들이 몰려들었다.
연호정이 이를 갈았다.
“앞으로도 일 처리 이따위로 하면 죽는다, 너!”
부우우우웅!
광룡부가 공기를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