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혼전(混戰) (4)
휘이이이잉!
소림 무공의 신묘함이야 천하가 다 아는 것이지만, 막상 그 무공이 구현되는 것을 실제로 보면 대다수의 무인들은 입을 떡 벌리고야 만다.
그것은 단순히 위력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소림의 무공은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의 이치를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뚜렷한 지침으로 삼는다.
특히 신법에서 그러한 특색이 도드라진다. 이철경의 신법만 봐도 그런 부분을 느낄 수 있었다.
후웅! 후우우웅!
주변 광경이 무서운 속도로 후방으로 밀려 나간다.
역동적인 움직임 없이, 뒷짐을 진 채 두 발을 번갈아 내디딜 뿐이었다. 힘차게 내딛는 것도 아니요,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가볍고 경쾌한 발놀림이었다.
그런데도 속도는 무서우리만치 빨랐다. 몸통은 단단하게 고정한 채, 두 다리의 가벼운 움직임만으로 상상 초월의 속도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림이 자랑하는 신법,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이었다. 그리고 이 신법을 대성하면 비로소 소림의 전설이라는 연대구품(蓮臺九品)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벼운 한걸음에 아홉 개의 잔상을 만든다는 신화적인 신법.
불과 삼십이 넘은 나이에, 이철경은 금강부동의 극의를 엿보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웅.
한참을 달리던 이철경은 문득 뒤를 바라보았다.
‘이상한데.’
범오를 보는 이철경의 얼굴에 의아함이 새겨졌다.
‘어째 사형의 신법이…….’
이철경의 무재(武才)는 지극히 뛰어났다.
소림은 재능과 성품이 되지 않는 자에게 본산의 비전절예를 전수하지 않는다. 하물며 속가임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선대의 인연 때문이 아니라, 소림이 요구하는 재능과 성품에서 이철경은 합격점을 받았다. 그래서 그가 소림의 절기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범오는 달랐다.
범오는 혈기 왕성한 열다섯 나이에 소림의 공적대사와 연을 맺고 소림에 적을 두게 된 본산의 무승이었다.
그 나이에 무공을 수련하여 현재 차기 나한당주로 언급될 정도라면, 범오의 재능 역시 이철경에 비해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특히나 범오의 호승심은 그 자신을 무공에 미치게 만들었고, 덕분에 현재의 경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경지만 두고 봤을 땐 이철경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왜 진기가 자꾸 흔들리시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사형의 신법이 묘했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금강부동의 묘리를 제대로 좇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금강부동신법에 나름대로 통달했는데도 억지로 움직임과 진기를 뒤틀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형의 실력이라면, 제아무리 한동안 수련을 쉬었다 해도 자신보다 모자랄 리가 없었다. 한데 자꾸 신법을 괴상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철경은 굳이 의문을 묻어 두지 않았다.
“사형.”
그리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도 이철경의 목소리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범오가 의아한 눈으로 이철경을 보았다.
이철경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깃들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신법도 자꾸만 흔들리고요. 그렇다고 내외상의 징후가 보이진 않는데, 혹시 일부러 그러시는……?”
“나는 괜찮네.”
범오의 목소리는 이철경의 그것과 달리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네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계속 달리시게.”
“아, 예.”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이철경은 풀지 못한 의문을 가슴에 묻어 두고 다시 달려 나갔다.
순간 범오의 눈이 빛났다.
‘저것이다.’
이철경의 멋들어진 신법을 보는 범오의 눈은, 놀랍게도 감탄이 아닌 신중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제의 신법은 실로 모범적이야. 금강부동의 묘리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 앞으로도 저와 같은 성취 속도를 유지한다면, 십 년 내에 연대구품의 경지에 진입할 수도 있을 거야.’
범오는 이철경의 신법이 완벽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데 의문이 생겼다.
‘어찌하여 답답해 보이는가.’
이철경의 신법은 자신의 그것과 똑같았다. 같은 법문, 같은 구결을 똑같이 배웠다.
심지어 이철경과 범오는 체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신장과 팔다리의 길이는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체격이 더 큰 범오 쪽이 보다 단단한 인상을 주었지만, 신법을 구사하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똑같은 자세와 진기 운용을 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왜 나는 틀린 것 같지?’
범오 역시 금강부동신법을 이철경처럼 펼칠 수 있었다. 아니, 숙련도에 있어서만큼은 이철경 이상이었다.
한데 왜일까? 이철경과 함께 남부로 향하면서, 그는 문득 이철경의 자세가 어설퍼 보이는 것을 느꼈다.
‘아니, 사제의 신법은 어설프지 않아.’
범오의 눈이 깊어졌다.
‘사제의 움직임에 나를 대입하니 어설퍼 보이는 것뿐이다.’
그렇다.
이철경은 본인에게 맞는 형태의 신법을 익히고 있다. 금강부동신법의 모범적인 형태가 곧 이철경이 추구하는 신법에 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내 무공은, 아니 내 성격은 사제와 달라.’
비록 속을 모를 때가 많지만, 이철경은 본사 어른들 모두에게 합격점을 받을 만큼 성품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반면 범오 자신은 달랐다. 그는 소림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한당주가 될 수많은 재목 중 하나로 커 온, 진짜 무승 중의 무승이었다.
재능 이전에 성품이 승려답지 않았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기는 하되, 그보다 먼저 소림 무공의 화신(化神)이 되기 위해 성장했단 말이다.
성품이 다르니, 같은 무공도 해석하는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철경이 소림 특유의 장중하고 강인한, 그러면서도 일말의 양보를 보여 주는 대협의 무(武)를 구사한다면, 범오는 더 공격적이고 더 파괴적인 성향의 무공을 구사했다.
‘이럴 수가.’
깊게 가라앉았던 범오의 눈이 점점 형형하게 빛났다.
‘이토록 당연한 이치를 지금에야 깨닫다니.’
성현의 말씀도 사람마다 해석이 천차만별이다. 하물며 무공이라고 다를까.
‘나는 지금껏 소림의 무공을 흉내만 내었지, 정작 내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구나.’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방장 사숙의 준엄한 질책이었다.
‘호승심이야 무공을 익혔다면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마음. 그러나 오만은 다른 법이지. 어쩌면 네 오 년간의 면벽이 성공이 아니라 실패였는지도 모르겠구나.’
호승심은 무공 성장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오만과 자만은 무공 정체의 주요 원인이다.
범오는 자만했다. 자신의 재능에, 사내(寺內) 누구보다도 빠른 성취에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오만은, 상상을 초월하는 실전(實戰)의 화신(化神)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고야 말았다.
‘연호정!’
그렇다.
연호정은, 단순히 무공 경지만 따져 봐도 자신보다 위였다.
범오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열다섯 가까이 어린 청년이 자신보다도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었고, 심지어 자신과의 대무에서는 본 실력의 절반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고도 자신을 압도했다. 애초에 싸움다운 싸움이 되지도 않았다.
또다시 방장 사숙의 말이 떠올랐다.
‘패배는 패배다. 그것이 생사결이었다면, 너는 지금처럼 내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죽었을 거란 말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주먹질만 한다고 어디 실력이 는다더냐? 무공의 이치에는 통달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이치를 육신으로 풀어 내지 못하는 무공은 반쪽짜리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네 무공은 그와 같다.’
범오가 탄식했다.
‘부끄럽구나.’
당시를 떠올리니, 정말이지 몸서리가 쳐질 만큼 부끄러웠다. 패배의 충격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말 같지도 않은 말로 사숙에게 떼를 쓴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오만이 극에 이르러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지극히 간단한 행위를 못 해서 사문의 어른을 실망케 하였고, 자신의 발전에도 제동을 걸어 버렸다.
‘소림의 무공은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소림 무공을 무적으로 만든 것은 무공 자체의 신묘함보다는 그 무공을 천하에 입증했던 선사(先師)들의 노고와 실력이다.’
그 순간이었다.
번쩍!
범오의 눈에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일었다.
‘패배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집착은 화를 부르고, 욕망은 편협함을 낳는다.
우우우웅!
그 순간 범오는 자신의 몸 안에서 무섭게 울려 퍼지는 범종(梵鐘) 소리를 들었다.
하남 숭산, 소실봉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종소리.
위엄이 넘치면서도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그 종소리가 범오의 아집을 뿌리부터 뽑아내고 있었다.
화아아아아악!
선두에서 달려 나가던 이철경은 문득 느껴지는 활화산 같은 기파에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헉! 사형?!”
범오의 전신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한 채 합장하며 눈을 반개한 상태로 금강부동신법을 펼치는 범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엄숙함마저 느끼게 하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은근하게 퍼져 나가는 범종 소리가 이철경의 내력을 뒤흔들었다.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이철경의 눈에 경이가 어렸다.
‘신공 발현! 그 잠깐 새에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을까?’
소림의 무공은 심신(心身)의 조화에 있어 타협이 없다.
오만에 찌들고 패배감에 눌어붙어 있던 범오의 정신이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맑게 꽃피었다. 그러자 오랜 운공 중단으로 시들어 있던 그의 육신이 뿌리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번쩍! 번쩍!
은은했던 황금빛 광채가 한순간 폭발적으로 진해졌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무종지벽의 돌파다. 육신은 무종의 벽을 넘었으나 정신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던 그 벽이, 허무하리만치 쉽게 부서지고 있었다.
소림의 절대무공, 대승범천신공(大乘梵天神功)의 진정한 개화.
훅!
황금빛 진기가 순식간에 체내로 응축되었다.
범오가 눈을 떴다.
순간 그와 눈을 마주친 이철경은 은근하게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이전과 달라진 범오의 사자 같은 안광은, 악을 짓밟고 정화한다는 전설 속 명왕(明王)의 그것과 같았다.
“사제.”
“예, 사형.”
“못난 사형 때문에 신경 쓰느라 고생이 많았네.”
파라라라락!
범오의 가사 자락이 매의 날개처럼 펄럭였다.
“빨리 가세. 남쪽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고 있어.”
이철경이 씨익 웃었다.
“본격적으로 달려 볼까요?”
파아아아앙!
두 사람이 한층 더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갔다.
소림의 내외(內外)를 든든하게 받쳐 줄, 진정한 신성(新星)들의 발걸음이었다.
* * *
“멸사군장이 직접 왔다고?”
“그렇습니다.”
사마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셔라.”
“예.”
잠시 후.
끼이이이익!
다 떨어져 가는 폐건물의 문이 열리고, 무지막지한 도끼를 든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사마현이 몸을 일으켰다.
“멸사군장 연호정 대협, 맞소?”
“…….”
“……?”
“……이거, 반갑구만.”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그렇소. 내가 연호정이오, 음신 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