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95화 (395/963)

395화. 혼전(混戰) (1)

“음?”

차를 마시던 승현진인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공대사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러시오?”

“…….”

“진인.”

“허어.”

승현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오. 이제는 환청 비슷한 것도 들리는 걸 보니.”

“환청이라니? 어떤?”

“허허, 예전에 대사의 부탁을 받고 연 군장, 아니 연 대수에게 자그마한 깨달음을 전해 준 적이 있소이다.”

“아, 기억이 나오.”

“연 대수의 과거와 현재는 피로 잔뜩 물들어 있었소. 솔직히 말하건대, 흘린 피의 양만 보면 희대의 마두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외다.”

공공대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피를 많이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그를 지탄할 수 있겠는가. 그의 삶이 피로 얼룩진 것은, 어쩌면 강호의 어른인 자신들의 잘못일는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그게 맞기도 맞겠지.’

연호정의 능력은 출중하다. 그것도 다방면에서.

낭중지추라 하였다. 그토록 뛰어난 인재를 무림맹이 어찌 가만히 두고만 보겠는가. 그가 흘린 피의 절반 이상은 무림맹의 명령 때문이기도 했다.

‘참으로 부끄럽도다.’

공공대사는 문득 탄식을 뱉었다.

연호정이 피를 많이 봤다는, 다 아는 말을 들은 건데도 새삼 젊은이의 손에 그리 피가 묻도록 놔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나마 승현진인은 마음의 평화를 위해 연호정에게 무당의 깨달음이라도 전수해 주지 않았나. 정작 자신은 그를 위해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공공대사의 기분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승현진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실, 어지간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도 감정이 많이 마모되었을 것이오. 살인이 쉬워지고, 피 냄새도 더 이상 역하지 않아졌을 것이오.”

“안타까운 일이오.”

“한데 연 대수는 달랐소. 분명 그러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으나, 연 대수의 눈빛은 많은 피를 본 전사답지 않게 무척이나 맑고 깊었소. 어떤 면에서는 본산의 말코들보다도 더.”

“허허.”

“휘청거리는 마음을 용케 잘 다잡고 있는 것 같았소. 물론 주변의 도움 덕이 컸겠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의 조언을 진지하게 들을 줄 아는 연 대수의 성품 또한 한몫했을 것이오.”

승현진인이 빙긋 웃었다.

“우연인지 뭔지, 방금 창밖에서 연 대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소. 빈도가 연 대수에게 전해 준 얼마 안 되는 깨달음의 법문 소리가 들렸소이다.”

공공대사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인의 깨달음은 빈승으로선 상상도 못 할 영역에 거하고 있소. 필시 연 대수를 향한 진인의 진심 어린 걱정이, 연 대수의 마음에 닿은 것이 분명하오.”

승현진인이 손사래를 쳤다.

“말코 얼굴에 금칠하지 마시구려. 깨달음? 말이 좋아 깨달음이지, 결국 돌고 돌아 도동(道童)들도 아는 가르침을 이제야 좇고 있소이다. 그런 주제에 무당의 장문인이라니. 하기야, 빈도의 스승 되는 분께서 괴짜시긴 했소.”

학식을 쌓는 것은 고된 수행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 지식을 참되게 이해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며, 참되게 이해한 것을 넘어 새로운 지혜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공공대사가 승현진인을 무림인이 아닌 도사로서 인정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승현진인은 모두가 아는 지식을, 그저 아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지혜로 승화시킨 사람이었다.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면 무엇이랴? 부끄럽지만, 공공대사는 자신이 승현진인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가, 공공대사를 진정 공공대사답게 만드는 것이리라. 물론 그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승현진인이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그나저나 하던 말이나 이어 하십시다. 하여, 광동에 범오와 권문주를 보내신 것이오?”

“정확히는, 권문주를 보냈으나 범오가 자발적으로 동행한 것이오.”

“허허, 일전에 대사께서 사질에게 호된 질책을 가하셨다고 들었소.”

공공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또 한 번 부끄럽소이다. 내 딴에는 사질의 미래를 생각해서였는데, 돌이켜보면 나 역시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오. 기대가 컸더라도 그에 이르지 못했을 때 실망할 필요는 없거늘, 수행자답지 않게 내 마음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소.”

실제로 공공대사는 범오를 질책했을 때처럼 누군가에게 독하게 조언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공공대사 역시 오랜만에 세상에 나와 각 방면에서 뛰어난 자들을 여럿 보고,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 둘 보기 시작해서일는지도 모른다.

굳이 연호정까지 갈 것도 없이, 모용우만 해도 범오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다. 하지만 모용우는 연호정과 함께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며 온갖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범오와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역시, 그러한 비교가 무의미한 것도 모자라 자라나는 새싹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깨닫곤 크게 반성하였다.

무림맹에 입성한 연후, 자기 자신을 참 많이 되돌아보게 되는 그였다.

승현진인이 고소를 지었다.

“나 역시 한때나마 그 비슷한 일로 연 대수를 찾아간 적이 있었소이다.”

“아, 옥청 말이오?”

“그렇소. 아무리 아끼는 사제라도 앞뒤 안 가리고 찾아가 따지려 들다니, 그간의 수행이 다 헛것이었나 보오.”

공공대사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얘기를 해 보니, 다 연 대수와 연관이 있소이다.”

“그러게나 말이외다. 천하가 드넓다 한들 한 세대에 진짜 영웅은 하나만 난다는 말이 있소. 그리고 그 영웅은 천도(天道)를 뒤흔들고 난세를 평정한다 하였소.”

승현진인이 입맛을 다셨다.

“어쩌면 연 대수가 다음 세대의 최고 주역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오.”

“나 역시 마찬가지요. 그만한 평가를 능히 받을 만한 인재이기도 하고.”

“아차차, 자꾸만 얘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 것 같소. 해서, 굳이 권문주를 파견한 것은 무슨 이유요? 금강권문의 이철경이라 하면 세상이 알아주는 강자라 하나, 소림에는 그 이상이라 할 만한 강자들이 수도 없이 많지 않소?”

“물론 그렇소.”

“따로 노리는 것이 있으시오?”

공공대사의 얼굴이 살짝 진지해졌다.

“광동성 불산(佛山)에, 소림과 연이 있는 불문의 선사들께서 은거하고 계시오.”

승현진인의 눈이 커졌다.

“불문의 선사분들이라 하면……?”

“음, 이것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얘기이니, 진인께서도 아무쪼록 홀로 알고 계셨으면 좋겠소.”

소림만 아는 이야기란 말이다.

그런 얘기를 담담한 어조로 말하니, 듣는 사람으로선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큰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승현진인은 내심 긴장했다.

소림밖에 모르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것은 큰 신뢰의 증표임과 동시에 무서운 제약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 이 얘기가 무당에서 나돌게 된다면, 승현진인은 앞으로 공공대사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소. 내 꼭 입을 봉하리다.”

“기실, 그분들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연 대수나 의정군이 알아차릴 수도 있소. 그분들께서 본사와 연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오.”

공공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걸 보면, 내가 연 대수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오.”

“허허.”

“광동성 불산에는 본사의 전대 어르신 몇 분과, 중원 각지에 퍼진 다른 불문의 어르신들이 모여 계시오.”

“……?”

“그리고 그분들이 불산에 계신 것은,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불문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요.”

“불문의 유지라 함은?”

“거기까지는 말씀드리기가 힘들겠소. 다만, 그 유지는 몹시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지킨 지가 벌써 삼백 년을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만 아시면 될 것 같소.”

“삼백 년……!”

말이 삼백 년이지, 정말이지 입이 떡 벌어지는 기간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삼백 년이면 강산이 서른 번도 넘게 변할 시간이다. 나라의 왕조가 바뀔 만한 세월인 것이다.

“거기에는 무승 출신의 어르신들도 계시고, 학승 출신의 어르신들도 계시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영향력이 실로 막강하다는 것이오.”

“영향력이 막강하다니요?”

“삼백 년 동안, 은퇴한 노승들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소. 얼마나 많은 선사들께서 불산에서 왕생하셨을 것이오? 왕생하시기 전까지, 그 주변에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끼치셨을 게요?”

“……!”

“물론 그분들은 세상에 드러나길 바라지 않으시오. 실제로 무당의 장문진인께서도 그분들의 존재를 모르고 계셨으니.”

“허허.”

공공대사가 입맛을 다셨다.

“이철경, 권문주의 증조부님께서 현재 그곳의 가장 큰 어른이시오. 권문주를 소림의 속가로 받은 것도 그곳 가문과 선대부터 연이 있기 때문이었소. 하기야, 그걸 감안해도 철경의 재능이 워낙 뛰어나긴 했지만 말이오.”

승현진인이 다급히 물었다.

“하면, 방장 대사 말씀은 그 고인들께서 힘을 써 주신다면 무림맹에 큰 도움이 될 거란 뜻이오?”

공공대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무려 삼백 년간 불산에서 불문의 유지를 받들고 계신 분들이오. 소림의 전대 어르신 중에서도 불산행을 허락받은 분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오.”

“……으음.”

“아시겠소? 그분들은 어지간해선 움직이지 않는 분들이오.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조차 뒤로 미뤄 둔 채 삼백 년 전의 유지를 받들고 남은 생을 살아가시는 분들께, 과연 그 부탁이 효과를 낼지는 의문이오.”

승현진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소림의 힘을 동원해 비밀리 고수를 붙여 주시지 그랬소? 이 사람에게 말했다면 빈도 역시 힘을 보태…….”

“무림맹이 파견한 병력은 의정군에서 끝나야 하오. 그게 맞소.”

“음.”

“다만…… 어쩌면 그러한 판단은 연 대수와 모용 군장을 향한 강한 신뢰 때문일 수도 있소.”

공공대사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 자신은 수행자로서 승현진인보다 못하다고 했지만, 세상을 보는 그의 눈만큼은 승현진인을 한참이나 앞서고 있었다.

“빈승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소. 연 대수도 그러할 것이고, 권문주와 범오도 그러할 것이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그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길 간절히 바랄 뿐이외다.”

* * *

“연 공자, 아니 연 대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이 말이지?”

“그렇습니다.”

“좋아.”

가득상이 손을 비비며 히죽 웃었다.

“이거, 간만에 합동 작전이라 합이 잘 맞을는지 모르겠군. 한번 시원하게 뒤집어 볼까?”

그때였다.

“후, 후개!”

“엉?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큰일인지 말해야 내가 알아들을 거 아냐! 시간 아까우니까 빨랑빨랑 말해! 연 대수 시간 안 지키는 거 싫어한단 말이야!”

“지진이 났습니다!”

“……뭐?”

“호, 홍관이란 자가 숨어 있다고 보고받은 곳에서 지진과 산사태가 났다고 합니다! 일대가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는 급보예요!”

가득상이 멍하니 거지를 보았다.

“그게 뭔 소리여? 지진이라니? 산사태? 갑자기?”

“정확한 사정은 불명입니다! 조사를 하고 싶어도 사방에서 암살자들이 감시하고 있어서 접근할 수가……!”

그때, 또 다른 거지가 뛰어 들어왔다.

“에잇, 비켜! 후개! 급보예요!”

“넌 또 뭐야!!”

“서신이 왔어요!”

“시벌! 서신 오는 게 한두 번이야?! 누구한테 온 서신인데!”

“음신의 제자라고 하던데요?!”

“어?”

“음신의 제자요!”

가득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갑자기 뭐가 이렇게 개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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