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음신(陰神)의 그림자 (8)
“단장님.”
“…….”
“암팔이 죽었습니다.”
음신의 대제자, 사마현(司馬玄)의 눈이 서늘해졌다.
“누구에게?”
“야주님의 지인에게 죽었습니다.”
“…….”
“…….”
“야주께서는 별다른 말이 없으시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되었다. 맡은 바 임무에 집중하라.”
“명을 받듭니다.”
스르륵.
암사(暗四)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한참 동안 창밖을 주시하던 사마현이 눈을 감았다.
‘먼저 가게.’
그는 속으로 암팔의 극락왕생을 빌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야주의 거처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가서 놈을 기절시킨 뒤 단전을 폐하고, 기절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 석 달 열흘 간 온갖 끔찍한 고문을 가하고 싶었다.
물론 그것은 꼭 암팔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신 하나의 존재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어.’
사마현이 음신의 섭혼술을 풀어 버린 것은 무려 삼 년 전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사마현 스스로도 몰랐다. 갑자기 스승이 미워졌고, 그가 낯설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있음을 자각했다.
그렇게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다 보니 불현듯 섭혼술을 깰 수 있었다. 아마도 음화와 음한, 양종의 진기가 기이한 작용을 했을 거라 추측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믿고 따랐던 스승이 철천지원수였다는 것이고, 스승이자 원수인 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시시한 복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야율적은 모를 것이다. 지난 삼 년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 왔는지.
얼마나 많은 정보를 모으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회유했는지. 나아가 얼마나 많은 암살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는지도.
‘그리고 드디어.’
사마현이 품에서 작은 문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기회가 왔다.’
현재 광동성에는 무림맹의 유군 부대가 진입해 있었다.
유군 부대가 진입했다면, 마땅히 그를 보조할 정보 단체도 슬그머니 따라 들어올 것이다. 어떤 정보 조직이 오는지,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는지는 확인치 못했지만 올 것이란 사실은 명백했다.
‘아마도 개방일 확률이 높겠지.’
사마현이 입을 열었다.
“암장(暗將).”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암사처럼 홀연히 나타난 복면인이 사마현의 옆에 부복했다.
사마현이 그에게 문서를 건넸다.
“광동성 전 지역에 눈을 깔아 둬. 그리고 만약 무림맹 측 정보원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쪽에게 이 문서를 전달해라.”
암장의 눈이 퍼렇게 빛났다.
“시작되는 것입니까?”
“그래, 이제 시작이다.”
사마현이 눈을 감았다.
“무림맹이 돕지 않는다면, 그때는 내 목숨을 돌보지 않고 홍관의 목을 벨 것이다.”
* * *
“연 공자!”
다급한 마음에 대수라는 호칭도 빼먹었다.
묵비가 걱정 어린 얼굴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괜찮아.”
“방금 쓰러졌잖아요? 얼마나 큰 내상을 입었길래!”
“내상 안 입었다.”
“……네?”
연호정이 좌측 어깨를 빙빙 돌렸다.
“혈음장에 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어. 꽤 무서운 무공이지만, 침투 경로를 알면 암경을 막는 것쯤이야 장작 쪼개는 것만큼 쉬운 일이지.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음황무의 기본공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볼 수 있어.”
묵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옥청과 여국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지금 장난해요?”
“장난 아니다.”
“장난이 아니면요! 적을 왜 놔줬어요? 하물며 사음교 측 고수인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여우 한 마리 잡아 봤자 분풀이밖에 못 돼. 굴속에 숨어든 독사는 더 신중해질 거야.”
“……?”
“대충 씨앗은 던져 뒀으니, 일이 생각대로 흘러간다면 조만간 저쪽 진영도 제법 화려해질 거다.”
사음교 측 최강자 중 하나가 음신으로 파견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당연했다. 적어도 연호정이 아는 한, 삼교 측 초고수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개중에는 굳이 중원의 천한 땅을 노려야 되냐며 혀를 차는 보수주의자들도 많았다.
즉, 당대 음신은 그 밑 서열의 고수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니, 확실했다. 연호정이 흑암제 시절 만났던 음신은 사음교와 연이 없었으니, 아마도 모종의 사건으로 스승을 제치고 새로운 음신으로 등극했을 것이다.
만일 상대가 삼교 측 최정예 고수였다면 제아무리 천재라도 스승을 제치긴 힘들었을 터.
‘게다가 야율적은 대외적으로 양천의 제자 홍관이라는 인물로 탈바꿈했다. 반신사도급 강자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스스로를 양천의 제자라는 직책으로 알리지는 않았을 터.’
양천은 야율적에 대한 정보를 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얼마나 강한지, 사음교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는 몰랐다.
‘방금 그 망할 년의 무공은 능히 번작에 비견될 만했다. 번작은 반신사도, 즉 무극의 경지를 뚫지 못한 극한의 초절정고수다. 그렇다면 그 망할 년의 위세가 음신보다 못하지는 않겠지.’
연호정은 혈음장, 혈음사기에 관해서는 사음교 측보다도 더 빠삭했다.
당연히 파훼법도 알고 있었다. 흑암성의 고수 중 상당수가 사음교주의 피를 이은 반쪽짜리들에게 당한 탓에 이를 악물고 파헤쳤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분란’뿐이다.
‘무림맹 소속 부대장이 사음의 무공에 그렇게나 통달할 순 없어. 그렇지?’
연호정은 마음속으로 소방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 그 파훼법을 누가 알려 줬겠어? 가까이 있는, 너희 내부자의 소행일 확률이 높겠지?’
연호정은 애가 닳도록 말을 걸었다.
‘그렇다고 말해 줘. 제발.’
연호정은 슬픔에 차서 말을 걸었다.
이제 보이지 않는 소방에게, 닿을 리 없는 소리로.
‘분란을 만들지 못하면, 오늘 널 놓아준 나 자신을 경멸하게 될 거야. 제발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 줘.’
묵비가 입을 열었다.
“뭔가 생각이 있다면, 앞으로는 미리 말을…….”
순간 묵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주르륵.
연호정의 입술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세게 씹었는지, 출혈량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묵비가 흔들리는 눈으로 연호정의 눈을 보았다.
‘…….’
묵비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옥청과 여국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연호정을 보았고, 그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연호정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눈으로 표현했고, 눈으로 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놀랍게도 거기엔 기쁨, 사랑, 재미 같은 감정도 엿보였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적인 감정들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악의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활활 타올라라.’
제멋대로 치솟는 감정들이 점차 하나로 귀결되며, 연호정에게 거대한 환상을 보여 주었다.
‘타오르고 또 타올라서, 너희 모두 하늘까지 치솟는 지옥의 불길을 피하지 못해 괴로워해라.’
진정한 원수를 만났다.
그 계집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그녀가 사음교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연호정에게는 만 갈래로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였다.
신화교? 광혈교? 물론 그들도 원수다. 어차피 중원을 불바다로 만들 놈들이며, 실제로 그러한 계획에 착수 중이니 가족을 위해서라도 놈들을 척살해야 했다. 그래야 후환이 없다.
하지만 사음교는 또 달랐다.
얼마나 많은 부하가 놈들의 손에 끔찍이 죽었던가. 가족을 잃고 인간성이 마모된 자신에게, 다시 한번 믿음과 사랑을 주었던 부하들을 잃게 한 저 사음교의 잔당들은 백만 번의 생을 반복해도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였다.
옛날 묵룡부에서 봤던 흑양? 물론 그놈도 사음교였다.
하지만 놈은 벌레였다. 사음교에서 보낸 벌레. 저 남서부에 서식한다는 고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방금 도주한 계집은 달랐다.
진짜 사음교다운 사음교와 접했다.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대체 몇 년 만에 맞붙게 된 원수인가.
그렇게 증오하고,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던 원수를 제 손으로 보내 준 것이다.
으드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활활 타오르는 불소리를 뚫고 사방으로 울렸다.
연호정의 눈에 점점 핏발이 섰다.
‘내가 네년을 살려 둔 이유를, 나의 자비와 계략을 망쳐서는 안 될 것이다. 만에 하나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적어도 네년만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무시무시한 저주였다.
한 인간의 증오가 오롯이 담긴 저주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법이다. 묵비와 옥청, 여국은 점점 깊어지는 연호정의 분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후우.”
가볍게 내쉬는 한숨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담아 보냈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진인.’
그는 무림맹 연무장에서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승현진인을 떠올렸다.
그의 인자한 표정과 걱정 어린 목소리, 그리고 선하디선한 눈빛까지.
‘힘이 있는 자, 그 무게가 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네. 그 책임을 잊는 순간 천하가 도탄에 빠질 테지. 한 사람의 광기로 그런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네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네. 그것이 무림이고 또한 세상일세.’
‘어떤 살업이 자네의 미래를 붉게 물들일는지 모르겠네만, 부디 그 지친 마음에 한 줄기 온기라도 심어 주고 싶네. 그저 그것이 전부야.’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승현진인이 그에게 건네준 깨달음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깎고 억눌러 다스리는 것이 아닌, 세상이 아름다운 근본적 이유와 그 속에서 사람이 어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현학적이고도 이해하기 쉬운 가르침이 깃들어 있었다.
승현진인이 전수한 깨달음을 읊자, 연가신단의 내공과 사신기로도 진정되지 않던 마음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물론 꼭 법문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연호정은 사적 복수심을 접어 두고 임무를 우선시했으며, 이제 슬슬 임무를 넘어 대의(大義)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그러한 변화가 승현진인이 전해 준 법문을 통로 삼아 연호정의 시야를 더 넓고, 맑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변화의 의지가 없으면 성현의 가르침도 한낱 불쏘시개에 불과한 법.
연호정은 어느새 그렇게 변해 있었다. 죽기 전의 흑암제와 점점 멀어지는 그였다.
번쩍!
연호정이 눈을 떴다.
“미안하다. 잠시 생각이 많았어.”
담담해진 목소리가 세 사람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마음을 다잡은 게 보이는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적진은 한 차례 큰 혼란에 빠질 거야. 아마 저 계집의 성격과 지위를 생각하면 잠시나마 음신의 사령부가 마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다음은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빈틈을 만들었으면, 자비 없이 쑤셔야지.”
치리리리링!
교룡쇄를 상체에 묶고 광룡부를 치켜든 연호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개방에 연락 넣어. 슬슬 움직이라고. 본판 들어가기 전에 낙엽 정리부터 해야겠다.”
연호정은 단순히 음신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작게는 사음교의 간자를 잡는 것이지만, 크게는 암살자 세계를 붕괴시키고 힘을 잃은 남부 무림에 활력을 되찾아 주기 위해 온 것이다.
조직을 죽이고 적의 수괴를 죽이는 걸 넘어, 광동성의 안정까지도 도모한다.
최강의 선봉장, 벽산호장 연호정.
이번 작전에서 그는 선봉장을 넘어 한 지역의 민생을 바로잡는 군주가 되어야만 했다.
아주 잠시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