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음신(陰神)의 그림자 (6)
광동성에 진입하기 전, 상대의 대응에 대한 연호정의 예측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지켜보는 것.
암살자 세계는 신중함이 미덕이다. 무림이라는 살얼음판 위를 살아가는 그 어떤 무림인들보다도 신중한 것이 바로 암살자들이었다.
끝까지 주시한다. 멱을 딸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이 생겨도 약점과 강점 등의 정보만 뽑아낼 뿐, 철저하게 숨어든다.
물론 통상의 경우 그렇다는 말이다. 광동성은 어느새 음신을 필두로 한 암살자들이 꽉 잡은 지역이 되어 버렸다. 하물며 음신의 능력은 구파 장문인급 이상이고, 심지어 당대 음신은 사음교 출신이기까지 했다.
신화교의 무장들이 섬멸되었단 소문을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 부대가 파견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저 지켜보고만 있진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가만히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암살자를 파견해 천라지망을 형성하는 것.
암살자는 존재 자체가 위협적이다. 절정고수 정도만 되어도 어지간한 일류 암살자들의 살기를 읽고 반응할 수 있다지만, 아차 하면 당하는 건 똑같다.
물론 환경을 타기야 할 것이다. 즉 암살자들을 몇 보내 유군 부대의 수준을 가늠해 보고, 유리한 장소로 유인하여 일거에 섬멸하는 작전을 쓸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연호정은 이 두 번째 경우에 가장 큰 가능성을 두었다. 이미 서로 알 것 다 아는 사이에 괜스레 시간 낭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자신들의 존재가 대외적으로 완전히 밝혀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대외비와 실제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는 것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바로 민심이 걸린 문제인데, 이런 상황에선 무림맹과 삼교 측 모두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될 수밖에 없다.
가능성은 가장 크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확률은 아니다. 연호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극강의 고수를 보내 이쪽 수장을 제거하는 것.
가장 암살자다운 처사이면서도 사음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지 않아도 되는 경우다. 이미 삼교에 대해 알고 있지만, 중원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삼교의 존재를 알리기 힘든 무림맹의 허점을 공략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하자면 가장 똑똑한 판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경우가 성립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을 갖춘 인물이, 지금 연호정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강하다!’
그렇다.
적측 수장을 처리하기 위해 음신이 직접 나설 수는 없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수장은 초전에 선봉을 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적의 수장을 해치울 만한 초고수가 존재해야만 했다. 그래야 세 번째 경우가 성립될 수 있다.
‘하지만 설마하니, 사음교에서 직접 파견한 고수일 줄이야!’
화르르르륵!
진흙처럼 텁텁하면서도 끈적끈적한 기도가 공기를 장악했다.
연호정의 백호기가 자아내는 매서운 투기(鬪氣)를 뭉근하게 밀어 내며 접근한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의 강을 파도치는 북해의 바닷물이 몰아붙이는 듯했다.
치이이이익!
연가신단이 회전하며 백호기에 힘을 실었다.
양천이 건네준 목령단의 효력 대부분은 강량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중 일부분은 연호정의 내력 증강에 보탬이 되었으며, 덕분에 그간 입은 내상을 모조리 회복함은 물론 이전보다 약간이나마 더 증폭된 내공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 연호정의 내공은 출처를 알 수 없는 묵비의 거대한 내공에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 정도 내공이라면, 적어도 진기 운용에 있어서 당대 연호정을 넘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는지는 전적으로 깨달음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푸스스스스!
돌풍을 일으키는 백호기의 호풍(虎風)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방대한 내공, 그리고 그 내공을 어떤 초절정고수보다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연호정의 기파가 밀리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내력의 힘에서 밀리는 것이었다. 연호정의 깨달음이 아무리 대단해도, 실질적인 힘의 밀도에서 뒤지면 내력 대결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번작 때처럼.
‘극한에 다다른 사음교의 강자. 게다가 이 사기(邪氣)는……?’
아는 무공이었다. 익숙한 진기였다.
‘……혈음(血飮)!’
순간 연호정의 눈빛이 폭발했다.
콰아앙! 화르르르륵!
연호정이 내친 쌍장(雙掌)에 무시무시한 주작기가 깃들었다.
그 주작기가 좌우로 길게 뻗은 나무들을 부수며 거대한 화염의 벽을 형성했다. 작정이라도 한 듯 퍼부은 화력이기에, 부서진 나무 네다섯 그루가 순식간에 관도로 쓰러지며 불의 벽을 만들었다.
그때, 사기의 폭풍을 일으키며 다가오던 고수가 주먹을 내질렀다.
퍼어어엉!
엄청난 위력의 권풍이 불이 붙은 나무들을 산산이 박살 냈다.
퍼퍼퍼펑!
연호정의 대응은 신속했다. 좌장(左掌)의 북천십이벽으로 터져 나오는 나뭇조각들을 막아 내고, 우장(右掌)의 홍염육살공으로 비산하는 불꽃의 농도를 더욱 끌어올린 것이다.
수기(水氣)인 현무기와 화기(火氣)인 주작기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동시에 구현한다. 음양이기(陰陽異氣)를 동시에 구현하면서도 내력에 파탄이 나지 않는다.
다가오던 고수, 소방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콰아앙!
소방이 불의 벽을 뚫지 못하고 그 앞에 내려섰다.
그렇게 불의 벽을 가운데 두고,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연신 일렁이는 불꽃에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서로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내 소방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연호정?”
“…….”
“흐음, 그 무지막지한 도끼와 쇠사슬을 보니 멸사군장 연호정이 맞는 모양이군.”
연호정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무감한 눈으로 소방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방은 상대의 눈빛을 무시했다. 애초에 상대의 기분이나 생각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이따위 장난질은 왜 하는 거지? 너 정도면 대략이나마 내 힘을 유추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건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건가? 아니면 겁에 질려서 얼어 버리기라도 한 거야?”
소방이 차갑게 웃었다.
“제법 쓸 만한 아이들을 끌고 왔군. 그 뒤에 궁사(弓師) 계집, 꽤 위협적으로 보여. 거기에 도가 무공을 익힌 꼬마들까지? 제법인데.”
묵비까지는 그럴 수 있어도 꽤 멀리 떨어진 곳의 숲에서 대기하고 있는 옥청과 여국의 존재까지 알아챘다. 소방의 감각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가만히 연호정의 얼굴을 살피던 소방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충격이라도 받았나 보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오만해질 자격이 있어. 그렇게 한창 세상을 오만하게 볼 나이에 나만 한 강자가 떡 하니 나타났으니. 와중에 자존심이라도 부리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콰르르르릉!
그때, 연호정의 쌍장이 다시 한번 소방의 좌우 숲에 불바다를 만들었다.
이번엔 소방조차 반응하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였다. 백호기를 전면에 내세운 채, 폭발하는 살기를 주작기로 제어하다가 일거에 터트려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화아아아아아악!
전방, 그리고 좌우.
후방을 제외한 모든 방위에서 뜨거운 화기가 넘실거렸다.
소방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 하자는 거야?”
연호정이 외쳤다.
“묵비! 빈틈이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쏴라! 접근은 절대 금물이야!”
파아아아앙!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호정이 불의 벽을 뚫고 소방에게 접근했다.
찰나지간 펼친 혈익휘천이다. 당연히 그 속도는 형언 불가였다. 소방조차도 연호정의 폭발적인 이동 속도에 한순간 얼굴을 굳힐 정도였다.
화르르르륵!
불꽃이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주작화기가 넘실거리는 좌수가 소방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괴력보다는 속도를 중시한 일격, 뾰족하게 세운 손끝이 소방의 목젖을 노렸다.
소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면 승부를 택한다고?’
상대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통성명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냅다 살기 넘치는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자신과 상대의 격차였다.
소방은 자신할 수 있었다. 연호정이 셋이 있어도 자신을 잡기 힘들 거라고.
자신과 상대의 격차는 그렇게나 컸다.
‘생각보다 무모한 놈이로군. 하긴, 나이가 어리니.’
속도도 빠르고 좌수의 날카로움도 일품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은 그저 뜻밖의 움직임에 놀랐을 뿐이었다.
금세 차분함을 되찾은 소방은 여유로운 손동작으로 연호정의 좌수를 막아 갔다.
그때였다.
‘……?!’
소방의 눈빛이 돌변했다.
‘뭐야?’
찰나에 찰나를 쪼갠 그 순간.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연호정의 좌수 투로가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소방의 실제 기량이 연호정보다 위였기에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휘감아?’
스르륵!
연호정의 홍염육살수(紅焰六殺手)가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소방의 손목을 휘감았다.
소방은 다급히 진기를 터트렸다.
퍼어어엉!
연호정의 좌수가 튕기듯 뒤로 밀려났다.
진기 집결, 진기 운행, 발경 진행, 경력 변화에 이어 마지막 폭경(爆勁)까지 터트린 일련의 내공 운용이 그야말로 신기(神技)에 다다라 있었다.
찰나의 시간만 있어도 내공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며 발경의 성질까지 바꿀 수 있는 무서운 고수였다. 연호정이라고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시간 대비 소방만큼 위력적인 발경술을 구사할 순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연호정이 자신보다 몇 수 위의 고수인 소방을 상대로 불의 벽을 치고, 정면 대결을 감행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부우우웅!
광룡부의 거대한 도끼날이 좌측 하단에서 사선으로 올라갔다.
순간 소방은 광룡부에서 뿜어지는 기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뭐지? 뭐야?’
쐐애애애애액!
도끼의 무게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휘둘러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소방에겐 그 속도에 충분히 대응할 만한 실력이 있었다.
한데도 소방은 순간적으로나마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광룡부에서 뿜어지는 살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
‘어째서 이 방위에서……?’
이제는 지체할 새가 없었다. 소방은 재빨리 각법을 구사해 광룡부의 도끼날을 쳐올렸다.
쩌어어어엉!
묵직하다.
혈음사기(血飮邪氣)를 풍부하게 담아 내친 각법인데도 발등과 정강이에 상당한 통증이 느껴졌다. 도끼가 보기보다 더 무거웠고, 도끼에 담긴 진기도 예상 이상이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쉬이이이익!
몸을 회전시킨 연호정이 휘감아 올리는 듯한 각법으로 소방의 턱을 노렸다.
곧장 후속타를 날리려던 소방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파아아아앙!
탄력을 줘서 후려친 각법이 아니라 묵직하게 올려 친 각법이었다. 그런데도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났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훅!
소방의 몸이 후방으로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오 장에 가까운 거리를 이동한 신법이 눈부셨다.
연호정은 담담한 얼굴로 다리를 내렸다.
소방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너, 뭐야?”
좌수로 펼친 수공, 도끼로 올려 친 참격, 턱을 노린 승천각까지.
그 급작스러운 접근전에, 구사하려던 혈음장의 투로가 시작부터 턱턱 막혔다. 손 한번 제대로 쓰기 어려울 정도였다.
파훼(破毁)다.
혈음장에 대한 신기(神技)의 파훼법이 거기에 있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연호정이 외쳤다.
“진을 형성해!”
번쩍!
좌측 불바다를 헤치고 이동한 옥청과 여국이, 소방의 후방 오 장 밖에서 진기를 불사른 채 검을 겨누었다.
멸사삼살진(滅邪三殺陣), 삼살소진(三殺小陣) 발동이다.
그제야 연호정이 소방을 보며 말했다.
“잘 왔다, 반쪽짜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