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91화 (391/963)

391화. 음신(陰神)의 그림자 (5)

“야주님, 급보입니다.”

급보라고 말하면서도 목소리는 차분했다. 음신 휘하의 암살자들은 다들 그처럼 무감각했다.

야율적이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보고하거라.”

“무림맹 소속으로 보이는 부대가 광동에 진입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수는 불명이나, 경갑주를 차고 말을 이끄는 것으로 보아 유군 부대 중 하나인 멸사군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멸사군이라.”

멸사군이라면 야율적도 들은 적이 있었다. 과거, 창설되자마자 악랄한 흑도 방파들을 휩쓴 소수 정예 부대라고 하였다.

“무림맹의 유군 부대는 둘이다. 탕마군도 함께 왔느냐?”

“현재 조사 중입니다만, 일단 암조단(暗鳥團)에서는 그럴 확률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겠지.”

야율적의 눈이 빛났다.

‘탕마멸사의 유군 부대라.’

삼교라면, 그중에서도 사음교라면 탕마멸사의 유군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 굶주린 늑대들을 물리친 것이 그들이라 하였지.’

굶주린 늑대란 회랑단을 뜻함이었다. 새외 최악의 마적단으로 악명을 떨친 그들은 파사륵이라는 걸출한 마인(魔人)의 진두지휘 아래 어지간한 대문파 수준의 무력을 갖춘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문파급의 세력을 분쇄해 버린 것이 바로 탕마군과 멸사군이었다.

소방이 말했다.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은 놈들이 왔군.”

“그렇군.”

“하지만 수장들은 애송이야.”

소방이 비릿하게 웃었다.

“연호정, 그리고 모용우였지? 호검쌍위(虎劍雙位)라 불리는 후기지수들 말이야.”

호검쌍위란 당대 강호 최강의 후기지수인 연호정과 모용우를 부르는 별호였다.

그중 이름을 더 높게 쳐주는 것은 단연 연호정이었다.

모용우는 그 나이가 이립에 달했고, 연호정은 약관이 조금 넘은 나이다. 더 어린데도 불구하고 모용우보다 먼저 무종지벽을 돌파했으니, 세간의 평가가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용우를 두 번째라고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만.

뭐가 되었든, 야율적이나 소방 입장에선 애송이들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야율적이 말했다.

“내게 방심하지 말라고 한 사람은 너였다.”

“알아.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방심하는 건 아니야. 아닌 말로 무림맹도 바보는 아닐 텐데, 중요 격전지라고 생각하는 곳에 진짜 애송이들을 보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렇겠지.”

“다만, 어떤 조직이라도 수장이 당하면 아랫것들의 사기가 떨어지게 마련이야.”

소방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니 수장부터 잡는 게 좋지 않을까?”

야율적 역시 소방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휘하 암살단을 더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장(長)이 죽어도 흔들리지 않도록, 감정을 극단적으로 마모시키는 훈련은 필수였다.

“일단은 신중히 보도록 하지.”

“물론 그게 좋겠지.”

소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네 식대로 해. 나는 내 식대로 할 테니까.”

야율적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체처럼 퍼런 안색으로 눈살을 찌푸리니 분위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방해할 셈이냐?”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내 식대로 하겠다니까.”

“광동은 내 영역이다.”

“아니, 본교에서 네 녀석에게 책임을 맡긴 구역일 뿐 너의 영역은 아니지.”

“뭐가 되었든 섣부른 행동은 허락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나는 네 부하가 아니야. 오히려 상부의 명을 받고 온 건 나다. 너야말로 내 명령에 따라야 하는 처지야. 하지만 난 네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잖아?”

야율적의 눈에 살기가 드리워졌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소방.”

소방이 미소가 서늘해졌다.

“일을 단순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야. 신중함이라는 변명으로 제 살이나 깎아 먹는 병신을 도와준다는데 왜 막는 거지?”

“…….”

“방해할 생각 따윈 조금도 없어. 연호정이나 모용우 중 하나만 잡고 올 테니까 나머지는 네가 처리해. 그 정도면 만족하지?”

목덜미가 후끈해질 정도로 열 받는 언사였다. 야율적은 지금 이 자리에서 소방을 처단해 버릴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하긴, 네 말도 맞다. 설령 실패한다 한들, 적의 전력을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나? 네가 직접 나설 게 아니라면, 첨병으로 나만큼 활용도가 좋은 사람은 또 없지. 물론 내가 질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좋다. 한 놈은 너에게 맡기겠다.”

소방이 천천히 목을 돌렸다.

우두둑.

목에서 울려 퍼지는 살벌한 소리가 방 안의 분위기를 더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이봐, 꼬맹이.”

소방이 말을 건 대상은 야율적이 아니라 야율적 앞에 부복하고 있는 암살자였다.

암살자는 미동도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애초에 야주인 야율적이 아니면 누구의 명도 듣지 않고, 대꾸도 안 하는 그였다.

소방이 말을 이었다.

“탕마군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장 모습을 드러낸 쪽은 연호정이겠군.”

“…….”

“연호정은 어디에 있지?”

암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방의 얼굴에 가소롭다는 미소가 어렸다.

“이것 봐라?”

훅!

그녀의 몸에서 끔찍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잠잠하던 기도가 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변화가 어찌나 극적이던지, 암살자의 복면과 등판이 한순간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소방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지만, 고개를 조아린 암살자의 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야율적에게 철저하게 세뇌된 것이다.

소방이 뜻밖이란 눈으로 암살자를 보았다.

“상당한데? 야율적, 네가 제대로 훈련시켰구나?”

야율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에 있어 심동(心動)은 절대 금물이다. 저 정도는 당연하다.”

“……흐음.”

야율적이 말했다.

“암팔(暗八). 멸사군장 연호정의 위치를 보고하라.”

암살자, 암팔이 즉시 입을 열었다.

“현재 멸사군장 연호정은 양산(陽山)에서 관도를 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수장인 그가 선두에 섰으며, 휘하 군병들을 일정 거리마다 은신시켜 두면서 움직이는 중입니다.”

야율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술을 아는 놈이군. 무공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건 아니란 증거야.”

그가 소방에게 말했다.

“들었지?”

“잘 들었지.”

가만히 암팔을 보던 소방이 피식 웃으며 그의 옆을 지나쳤다.

스륵.

부복한 암팔 뒤에 선 소방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탐이 나는 인재로군. 이런 놈들이 몇이나 되지?”

“너에게 보고할 사항은 아니다.”

“뭐, 그렇긴 해.”

소방이 암팔의 어깨를 짚었다.

움찔!

암팔의 몸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소방이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너, 아주 괜찮은데? 나중에 저놈 밑에서 일하기 지겨워지면 언제든 나한테 와. 긴히 써 주지. 중원 놈들은 지역을 불문하고 하나같이 물러 터진 줄로만 알았더니, 너 같은 걸물도 있었구나?”

야율적이 도끼눈을 뜨고 소방을 보았다.

“소방.”

“응?”

“……하지 마라.”

“뭘?”

“하지 말라고 하였다.”

소방이 환하게 웃었다.

“뭘 하지 마? 네 부하 회유하지 말라는 뜻이야? 아니면…….”

“마지막으로 말한……!”

그때였다.

주르르륵.

암팔의 눈과 코, 입과 귀에서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부르르르르!

한 차례 경련하듯 몸을 떨던 암팔이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진 암팔의 눈은 어느새 썩은 생선의 눈알처럼 탁해져 있었다.

죽은 것이다.

“잡아먹지 말란 뜻이야?”

“……소방.”

화아아아악!

야율적의 몸에서 불꽃 같은 살기가 번져 나왔다.

그의 살기는 소방의 살기와는 사뭇 달랐다. 소방의 살기가 끈적끈적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했다면, 야율적의 살기는 불처럼 거세면서도 강렬한 피 냄새를 동반했다.

소방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부하 하나의 목숨으로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을 제거할 수 있다면 완전히 남는 장사 아니야?”

“……네년.”

“좋게 생각해. 네가 훈련시킨 이상, 이 장난감도 결국 본교의 소유물이야. 본교의 물건 하나 부쉈다고 그렇게 각 세울 필요 있어?”

여기서 더 입씨름해 봤자 의미가 없다.

야율적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하나만 기억해라. 지금 이 시간 이후, 한 번만 더 내 심기를 거스르면 즉시 처단할 것이다.”

소방의 피식 웃었다.

“무섭네. 무서워.”

“거짓말 같으면 어디 한번 날뛰어 봐. 무림맹 떨거지들을 잡기 전에 네년의 사지를 찢어 개 먹이로 던져 주지.”

소방의 얼굴이 서서히 무표정하게 변했다. 야율적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 것이다.

“물건 하나 망가트렸다고 너무 화를 내는군. 너답지 않게 말이야.”

“내가 할 말은 다 전했다. 이제 연호정을 잡아 와.”

가만히 야율적을 보던 소방이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방문을 나서기 전, 소방이 싸늘한 한마디를 남겼다.

“난 예전부터 네놈이 마음에 안 들었어.”

쾅!

방문이 닫혔다.

매서운 살기를 터트리던 야율적의 기도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흐음.”

평소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야율적이 쓰러진 암팔의 시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우우우웅.

야율적의 손에서 회흑색 기묘한 진기가 연기처럼 일렁였다.

잠시 후.

“실력이 늘었군.”

야율적의 눈이 가늘어졌다.

“혈음장(血飮掌)을 대성했다라…… 이 기세로 가면, 정말 음황무(陰荒武)도 전수받겠어.”

확실히 재능 하나는 발군이다. 사음교 역사상 소방의 나이에 혈음장을 대성한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하긴, 반쪽짜리라도 ‘그분’의 핏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하지만 그 핏줄의 한계 역시 명확했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이었다 할지라도, 천한 피가 섞였으면 짐승으로 보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소방이 삐뚤어진 이유이자 야율적이 소방을 막 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야율적이 차갑게 웃었다.

“경쟁자는 미리미리 제거해 두는 편이 좋겠지.”

* * *

“대수님.”

묵비가 연호정의 옆에 따라붙었다.

“현재 옥청, 여국을 제외한 군병 대부분을 길목에 배치했습니다.”

“좋아.”

“옥청과 여국도 배치할까요?”

“아니.”

잠시 고민한 연호정이 말했다.

“둘은 데리고 간다.”

묵비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광동성으로 진입하기 전, 연호정이 한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적이 출현하나요?”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냄새가 나.”

“냄새요?”

“응.”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텁텁한 악취. 누군가가 이쪽으로 올 것 같아. 그것도…….”

후우웅. 후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허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전투적인 백호기가 무섭게 달아올랐다. 주작기는 심박수와 혈행을 제어하고 있었고, 현무기는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벼려 주었으며, 두 다리에 실린 청룡기는 언제라도 반응할 수 있도록 그의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강자다. 적어도 나보다 못하진 않는군.”

묵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벌써요?”

옥청과 여국이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연호정과 묵비를 포함, 총 세 명 이상이 있으면 살진(殺陣)을 개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율적인가? 누가 됐든 간에 현명한 판단이군.’

이것저것 재지 않고 곧바로 선봉장을 보내 기세를 꺾겠다는 의도다.

그리고 연호정은, 광동성에 진입하기 전에 적측의 반응 대부분을 떠올리며 대응책을 세웠다.

‘야율적이라면 암살을 시도했을 확률이 높다. 즉, 이렇게 직접적으로 살기를 드리우며 오는 상대라면…….’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쾅!

그의 발이 대지를 찍었다.

“초장부터 화끈하군.”

파아아아앙!

연호정, 묵비, 옥청, 여국 네 사람이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한 여인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의 나는 듯이 달려오는 그 모습은 귀신처럼 살벌했다.

연호정의 얼굴에 환희의 미소가 어렸다.

“……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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