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89화 (389/963)

389화. 음신(陰神)의 그림자 (3)

“연통이 왔습니다.”

제갈문호의 얼굴은 유독 밝았다.

“연 대수가 양 부주와의 거래를 성사시켰다고 합니다.”

연위의 눈에 격동이 어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양천을 다시 봐야겠군. 그 싸가지의 혓바닥에도 열을 내지 않았다면 성인군자라 봐도 무방해.”

연위의 긴장이 풀리자 연호정을 향한 당관의 호칭이 다시 달라졌다. 당관은 보이는 것답지 않게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언제 틀어질지 모르는 관계라지만, 적어도 이번 임무엔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만약 양천의 제자로 알려진 그 홍관이라는 자가 삼교의 끄나풀이라면, 양천 역시 아군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양천은 그냥 적으로 삼기에 너무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삼교 측에서도 한 번은 회유하려 들 것입니다.”

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가지한테 듣기로, 삼교에는 성천의 강자와 박빙의 승부를 겨룰 만한 고수도 꽤 있다고 하던데?”

“물론 전면전을 벌일 각오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고래로, 전쟁은 최소 피해로 최대 효과를 얻는 것이 정석입니다. 삼교라고 그걸 모를 리는 없습니다.”

“흐음.”

“게다가 삼교는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본토에서 싸움을 벌이는 중이지요.”

“개도 자기 앞마당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 이건가?”

“……비유상 우리가 개가 되는군요?”

“뭐가 됐든, 우리에게 유리하단 말 아니오?”

“그렇습니다. 일전에 신화교의 십팔무장들을 잡으러 갈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연 대수의 기지와 작전 덕에 상당히 쉽게 물리쳤지만, 지형적 이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삼교는 중원의 지형지물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대다수는 어디가 어디인지도 잘 모를 테니까요.”

“설마 그 정도 준비도 없이 전쟁을 벌이려 했을까?”

“중원전도(中原全圖) 정도는 구비해 두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투전을 벌이기까지 했지요. 중원 땅에서의 싸움이 본인들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구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에서 심리적인 이점이 주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오.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십팔무장과의 싸움에서, 그들은 많이 당황했을 것이오.”

“연가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이 아니라 안도의 기색이 비치는 한숨이었다.

“어찌 되었건 큰 산 하나는 넘었습니다. 남은 건 이번 작전이 성공한 후에 논의토록 하시지요.”

“그럽시다.”

“이번 작전에서 남은 문제는 하나입니다. 바로 그 홍관이라는 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때였다.

“안에 계시오?”

순간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군사부 부원들이 바빠서 사람을 세워 두지도 않았기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갈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십시오.”

“그럼 실례하겠소.”

드르륵.

문이 열리고 한 승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공대사였다.

* * *

두두두두.

의정군이 모는 전마들의 말발굽 소리는 실로 자신감이 넘쳤다.

군병 대다수는 수장인 연호정이 정확히 무슨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는지 몰랐다. 연호정도 그렇지만, 모용우 역시 부하들에게 정도 이상의 정보를 전하지 않는 편이 이롭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의 수장, 벽산호장 연호정이 묵룡부의 주인이자 성천십삼좌의 일인인 투왕 양천과 싸웠다는 것.

그 사실은 군병들이 연호정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이번 임무에 임하는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연호정이 양천을 이겼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성천의 강자 모두가 신(神)과 같은 무위를 뽐내는 무적의 괴수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연호정이 천하의 투왕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병들의 사기는 끝 간 데 모르고 치솟았다.

그들의 수장은 단순한 강자가 아닌, 성천의 고수에게 싸움을 걸 만큼 화끈한 배포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군병들의 사기가 더 오르기도 힘들 만큼 오른 때에.

정작 선두에서 적풍을 몰고 달리는 연호정은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고 있었다.

‘뭐야, 이거.’

연호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분명 적당한 거라고 들었는데? 뭐 이런 걸 다 줬어?’

우우웅. 우우우우웅.

연가신단이 무섭게 회전하고 있었다.

싸움이 벌어진 것도 아니요, 의식적으로 내단을 회전시키는 것도 아닌데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해 내력을 끌어 올렸을 때처럼 연가신단이 고속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빨아들인다.’

하단전에 가득 찬 영약(靈藥)의 약력이 빠르게 정제되며 연가신단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단전이 뻐근할 만큼의 약력이 남았다.

무극지경에 도달해 본 연호정의 하단전은 같은 초절정고수들보다 더 넓고 깊이가 있었다.

그 큰 단전에 아직도 약력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말이지.’

연호정은 양천의 배포에 혀를 내둘렀다.

‘화끈한 것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는 모든 치료를 마친 후 피로에 절어 버린 양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도.

‘네 말이 맞았다. 내 진기는 사음교주, 그 빌어먹을 놈의 사기에 오염되어 있었어. 덕분에 놈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 이는 실로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감사 인사는 따로 하지 않겠다. 네놈은 여전히 묵룡부의 적이야. 그렇다고 그냥 보내기에는 내 체면이 서지 않지. 투왕의 목숨을 살린 자라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목령단(木靈丹)이라는 것이다. 어디 가져가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섭취토록 하라.’

아는 것 많은 연호정도 목령단이라는 영약은 처음 들었다. 물론 연단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았다. 오죽하면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가 보유하고 있는 영단의 이름도 잘 모를 정도였으니까.

다만, 목령단이 비범한 영약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적당한 약력만 느껴졌는데, 막상 섭취하니 이거 장난이 아니구만.’

우우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두 눈에서 은은한 녹청빛 광채가 새어 나왔다.

벽라진기와 용포기를 운용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청룡공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목령단은 목기(木氣)를 기반으로 한다. 청룡기는 목기의 화신, 이 영단의 힘을 빨아들이는 데에 최적화된 진기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목생화(木生火), 청룡기가 불타오르면 자연스레 화기(火氣)인 주작기가 힘을 받아 거세지고, 주작기가 강해지면 수기(水氣)인 현무기도 한층 더 깊이감 있는 힘을 자아낸다.

그렇게 삼신기(三神氣) 모두가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영기(靈氣)를 얻게 되면, 자연스레 백호기도 따라 올라와 사신기(四神氣) 전체가 더 강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제기랄.’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심보야? 나중에 천천히 먹겠다니까, 약력이 너무 강하잖아!’

약력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의 연호정으로서도 단기간에 모든 약력을 내공으로 치환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필시 양천이 보유한 영약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귀중한 물건이었으리라.

‘이거 처먹고 돌아와서, 또 시원하게 싸워 보자는 건가.’

양천의 성격이라면 정말 그걸 노리고 줬을 수도 있다. 하긴, 재미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겠지.

‘이러다가 임무에 지장이 가겠는데.’

그렇다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약력을 다 흡수할 자신도, 남은 약력을 버릴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면…….’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그에게 영약은 별 필요가 없었다. 먹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이미 정기신(精氣神)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채 발달한 덕에 영약을 먹어도 효율을 전부 끌어낼 수가 없다.

양천처럼 치료용으로 쓰는 게 아닌 이상, 굳이 영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나눠 주는 게 낫겠지.’

그가 묵비를 바라보았다.

묵비는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말을 모는 중이었다.

‘묵비에게는 크게 필요가 없을 거야.’

무종지벽을 돌파한 이상 영력의 효율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묵비는 내공에 한정해서는 연호정 이상이었다. 굳이 약력을 나눠 줄 이유가 없었다.

같은 맥락에서, 모용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렇다고 군병 모두에게 나눠 주자니, 그 정도로 약력이 강하진 않다. 설령 가능하다 한들 일일이 붙잡고 내공을 인도하다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될 것이다.

‘음.’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별수 없군.’

결국, 약력을 전해 줄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강량. 앞으로.]

연호정의 전음에 강량이 말을 더 빠르게 몰았다.

강량이 의아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형님?”

말발굽 소리가 그렇게 큰데도 강량의 목소리는 연호정의 귀에 제대로 꽂혀 들었다.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오직 목표한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내공으로 음을 조절한 것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군마 위에서도 상대에게 흔들림 없는 음색을 전달한다. 그것만 봐도 강량의 무공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너, 말을 몰면서 운공할 수 있냐?”

“그 정도는 우습죠. 절 뭘로 보시고.”

“그럼 내공 좀 나눠 줄 테니까 이틀 안에 네 것으로 만들어라.”

“……예?”

강량의 표정이 대번에 얼떨떨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연호정은 묵룡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전부 말해 주었다.

강량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걸 아직도 소화 못 하신 겁니까?”

“그렇다니까, 인마.”

“아니 그보다, 아깝게 그걸 저한테 주신다고요?”

“시간 없어. 사흘 안에 목적지에 도착할 거야. 칠 할 이상 넘겨줄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것으로 만들어라. 알겠냐?”

“아, 아니!”

강량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후방에 연지평이 있었다. 연지평은 아직도 검에 몰두했는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용케 말을 모는구나 싶었다. 검리(劍理)에 완전히 잡아먹히진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형님. 지평에게 주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지평은 안 돼.”

“예?”

“지금 지평에게 더 강한 내공을 전수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다. 지평은 차후에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이번 약력은 네가 받아라.”

“하, 하지만 형님!”

“설마하니.”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원수가 준 영약이라서 받기 싫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강량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제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반을 완전히 마무리 짓기에 충분할 거야. 이 약력을 받고 나면, 어디 가서 내공이 부족해서 졌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쪽팔리게, 그런 소리는 안 하지요.”

“그래, 잘 생각했다.”

연호정이 강량의 명문혈에 손을 얹었다.

“한 번에 옮길 거다. 정신 바짝 차려.”

“알겠…… 헉!”

우우우우우웅!

일대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무섭게 진동했다.

하단전을 꽉 채운 목기를 한계까지 응축시켜 단번에 전달한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기운 자체를 응축하고 전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기예였다.

후욱!

강량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이번 임무에서 제대로 써먹을 거야. 마음 단단히 잡아!”

사흘 후.

의정군이 중원 최남단 광동성에 진입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