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음신(陰神)의 그림자 (2)
쿠구궁!
대전의 돌문은 예전 그대로였다. 다만 그전보다 훨씬 더 반듯하게 깎는 작업을 한 듯했다. 달리 보면 도적 소굴 같기도 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별유천지(別有天地)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때와는 많이 바뀌었군요.”
연호정의 담담한 말에 양천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참으로 뻔뻔한 놈이로구나.”
“뭐가 말이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한때나마 네놈이 몸을 담았던 곳이다. 정말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게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임무였을 뿐이오. 그런 것에 일일이 죄책감을 느끼면 이 짓도 못 해 먹지.”
“전문 세작 활동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군.”
“딱히 세작 훈련을 받은 적은 없소. 그럴 시간도 없고. 다만 상대를 속여야만 하는 상황이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외다.”
흑도라고 비열한 사람이나 악인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호협(豪俠)일수록 우대를 받는 것이 흑도였다.
즉, 투왕이라고까지 불리는 양천 앞에서 서슴없이 속인다는 말을 해 봤자 점수를 딸 수는 없었다. 오히려 경계심을 키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양천은 오히려 연호정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박하게 평가하는 자일수록 능력이 뛰어난 법이니까.
‘그걸 모르는 놈도 아닐 터. 이 또한 계산된 발언이라면 정말이지 뱀 같은 놈일 것이다.’
물론 양천은 연호정의 그 발언이 노림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본 연호정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되, 소인배는 아니었다.
쿠구궁!
대전의 문이 닫혔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백서 그 양반, 눈빛 한번 살벌하더이다.”
“그럴 수밖에. 백서는 십이지신의 좌장이자 나의 제일 심복이다. 너에 대한 배신감이 나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을 것이다.”
“왠지 그럴 것 같았지.”
양천이 의자에 앉았다. 태사의가 아니라 한옆에 비치해 둔 탁자 앞의 작은 의자였다.
“굳이 이곳에서 시간 끌 것 없겠지.”
“물론이오.”
“묻겠다. 음황신장을 어떻게 해독할 생각이냐? 아니 그전에, 이것이 정말 중독 증상이긴 한 것이냐?”
연호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가 정보부장으로 있을 때, 양 부주께서 돌연 의식을 잃지 않았소?”
“……그랬지.”
“그때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소?”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아무리 내부를 관조해도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이것은 오만이 아니다. 너 역시 무종지벽을 돌파했으니, 극한의 경지를 돌파한 연후에 신체와 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알고 있소.”
“세인들이 말하는 무극의 경지는 무종지벽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 경지에 오르면 모든 것이 바뀌지. 사람마다 다르지만, 집중하면 사물의 결까지도 투시(透視)할 수 있어.”
연호정 역시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그러한 경지에 진입했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 자신의 몸도 마찬가지다. 내 비록 의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몸을 보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천하의 어떤 의원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합당한 자부심이라고 생각하오.”
“한데도 내가 중독되었다고 확신하느냐?”
“확신하오. 다시 말하지만, 부주께서도 뭔가를 느끼셨을 거요.”
양천은 말없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양천은 진즉부터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말 그대로 의혹일 뿐, 확신하진 못했다.
“양 부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무극지경에 진입한 고수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오.”
“……마치 그 경지에 진입해 본 것처럼 말하는군.”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중요한 것은, 그 ‘눈’을 어떻게 얻었는가요.”
“무슨 소리냐?”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내가고수가 상승의 경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여러 요인이 필요한 법. 그러나 그 근본은 기(氣)요.”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게…….”
“양 부주의 가슴에 새겨진 황금빛 장인(掌印)은 중독을 유발하는 상처가 아니오. 그 장인은 그저 공장(工場)일 뿐이오.”
“공장?”
“그렇소.”
“무슨 공장 말이냐?”
“양 부주의 진기를 가공, 정제하여 끝내는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한 공장.”
“……?!”
양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양 부주께서 알아차리지 못하실 만도 하오. 흑도에서 첫손에 꼽히는 의원, 귀명신의(鬼命神醫)가 양 부주의 몸을 살폈다고 했지만, 의원이 그것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소.”
“…….”
“양 부주는 기(氣)로 세상을 보고 있소. 이룬 경지가 지고하여 무의식중에도 항상 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지.”
“……그렇다.”
“음황신장으로 중독시킨 건 양 부주의 신체, 즉 체조직이 아니오. 바로 진기(眞氣)요.”
“……!!”
양천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진기를 중독시켰다고?”
“그렇소.”
“기(氣)를, 기로써 오염시켰다는 말이냐?”
“그렇소.”
“……다시 묻겠다. 성천의 경지에 오른 나의 진기가, 사음교주의 음황신장으로 인해 오염되었다는 말이냐?”
“그렇소.”
양천이 버럭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도 모르게 일갈했지만, 양천은 연호정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극지경에 돌입한 고수가 아무런 이상 증세를 발견치 못한 상황에서 의식을 잃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데도 양천은 의식을 잃었다. 만약 전투 중이었다면, 그 길로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양천은 실로 오랜만에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연호정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소? 음황신장의 활용도에 대해 말이오.”
“……?!”
“음황신장은 무서운 무공이오. 암경의 일종으로 상대의 심맥을 폭발시키니, 동수(同手)의 고수라도 지극히 꺼릴 수밖에 없는 무공이지. 하지만 대응이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오. 음황신장의 특성만 알고 있다면 말이외다.”
“……!!”
“사음교주는 강하오. 양 부주께서 패배할 정도로. 그만한 고수가, 위력은 강하나 소문이 나면 대응책이 들통나는 무공을 쓰고도 양 부주를 살려 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양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있기 때문이지. 내가 본인을 거스르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바로 그것이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사음교주라는 네 글자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묵룡부의 정보부장이었을 적, 나는 양 부주의 진기에서 이상함을 느꼈소. 엄청난 기파였으나 새어 나오는 진기에서 묘한 파탄을 느꼈지. 물론 기파 그 자체로 대단했지만, 투왕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기가 혼탁하다는 느낌을 받았소.”
“…….”
“당사자는 모를 거요. 이유인즉, 이미 오염된 진기로 세상을 보니까. 차라리 누군가와 생사결을 벌였다면 모를까, 제대로 된 싸움 없이 상처만 들여다봐서는 해답이 나올 수가 없지. 극한의 힘을 쥐어짜 보지도 않았으니 말이오.”
연호정이 검지로 양천의 가슴을 가리켰다.
꽤 도발적인 행위였지만, 양천은 연호정의 행동을 나무라지 못했다.
“종이가 물에 서서히 젖어 들 듯, 이미 양 부주의 진기는 음황장력의 사기(邪氣)에 조금씩 조금씩 침투당하고 있었던 것이오.”
“……믿을 수 없다. 제아무리 나보다 강자라 한들, 무극지경에 오른 자의 진기를 오염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그 불가능에 가까운 능력을 구사하는 것이 사음교주요. 사음교의 무공은 대대로 침투경에 능하지. 아마 암경 부문에 있어서는 중원의 어떤 이도 사음교주를 따라잡기 힘들 거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흑암제 시절 사음교주를 잡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생사결을 벌이면 그 즉시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공격을 허용하면, 훗날 사음교주의 사기에 중독된 채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연호정 역시 당시에는 음황무에 진기를 오염시키는 공능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다만 숱한 아수라장을 겪고 얻은 육감이 그에게 알려 주었다. 사음교주의 음황무를 일격이라도 허용하면 안 된다고. 일격을 허용했다면, 최소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연호정이 검신(劍神)으로 추앙받던 모용군과 함께 사음교주를 토벌하려 했던 이유였다. 무공의 경지를 떠나, 너무나도 위험한 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새 양천의 눈빛도 연호정의 그것과 같이 차가워졌다.
“그걸 알았다면, 왜 정보부장 시절에는 내게 알려 주지 않았던 게냐?”
“말이라고 하시오? 당신은 투왕이오. 그만한 거물이 소리소문도 없이 묵룡부란 단체를 세운 데다가, 심지어 적이었소. 적에게 좋을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 거요?”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양천으로서도 말문이 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때는 나도 잘 몰랐소. 다만 맹으로 복귀한 이후 고민해 봤지. 최고의 의원에게 자문도 구해 보았소.”
“의원?”
“있소, 그런 사람이. 나이는 젊은데 실력은 귀명신의 뺨치는 여자요.”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그 사람이 전해 준 해독 방법이 있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양 부주 정도의 실력이라면 이틀도 안 되어 오염된 진기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좋다.”
양천이 눈빛을 굳혔다.
“과거 얘기는 이대로 묻어 두겠다. 하면 이것을 어떻게 해독해야 하느냐?”
“해독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오. 다만, 돈이 조금 들 뿐이지.”
“돈?”
“그렇소. 하지만 묵룡부의 자금력이 원체 대단하다고 들었소. 그러니 어렵지는 않을 거요. 아! 혹시 모르니 귀명신의를 불러 함께 해독하는 게 좋을 거요.”
“대체 무슨 방법이기에?”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창고에 영약 있소? 소림의 대환단에 필적할 만한 약력(藥力)을 지닌 영약이?”
* * *
이틀 후.
“연……!”
저도 모르게 연제라고 부를 뻔한 모용우는 헛기침을 하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대수님.”
“어어. 기다리느라 고생들 했네. 강량한테 들었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믿기질 않는군요. 정말 묵룡부에 다녀오신 겁니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왜? 부하들 놔두고 어디 기방에라도 가서 놀다 왔을까 봐?”
모용우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런 생각은…….”
“하하, 알아.”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뭘 어떻게 돼. 멀쩡한 몸으로 돌아오는 거 다 보고 왔지.”
“……허허.”
멀리서 팔짱을 끼고 있던 강량이 투덜거렸다.
“무사히 돌아오신 건 다행입니다만, 어째 선물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눈치 하나는 귀신이구만. 그렇게 티가 나냐?”
“티가 날 수밖에 없지요. 천하의 투왕과 박 터지게 싸웠는데도 몸이 멀쩡한 걸 넘어서 기파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의정군의 군병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연호정이 투왕과 싸움을 벌였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렇군.”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선물로 좋은 약 하나 받았다. 이왕이면 아껴 두려고 했는데, 먹고 가라더군. 투왕의 목숨값이라던가? 그래서 먹었다.”
“어련하시겠어요.”
“진짜라니까, 인마.”
“믿어 드리겠습니다.”
“믿어 드리는 게 아니라 진짜라고!”
“알았다고요.”
그때, 모용우가 말했다.
“어찌 되었든,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그래. 슬슬 움직여야지.”
연호정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짓궂었던 그의 눈빛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목표물에 대한 정보도 하나 받았거든. 자질구레한 탐색은 생략해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