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87화 (387/963)

387화. 음신(陰神)의 그림자 (1)

남자의 안색은 창백했다.

단순히 병자 같은 정도가 아니라, 마치 시체라도 된 양 창백했다. 너무나도 이질감이 드는 안색이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키는 훤칠했고 몸은 말랐다. 마치 한겨울에 눈을 맞은 고목과 비슷한 인상이었다.

다만, 그것만 제외하면 인상은 의외로 평범했다.

사람들은 대륙을 중원이라 부르지만, 이 중원 땅에도 무수히 많은 민족이 산다.

놀랍게도 사내의 얼굴은, 어떤 민족의 얼굴에서도 보일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서역인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길 가다가 한 번씩은 본 것 같은 외모랄까.

상의는 벗었지만, 하의는 화려한 비단으로 치장했다. 이름 모를 보석이 잔뜩 박힌 황금 목걸이를 둘렀으며, 열 손가락 전부 반지를 끼었다. 당연히 반지에도 제각기 보석이 잔뜩 박혀 있었다.

인상과는 달리 의복과 장신구만큼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괴상하리만치 창백한 피부색, 지극히 평범한 외모,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한 의복과 장신구.

그 기묘한 조합이 사내의 신비로운 기도와 묘하게 들어맞았다. 천하 어디에서도 이런 사람은 보기 힘들 것이다.

한참이나 창밖을 주시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쌍도문(雙刀門)의 주인은 아직 못 잡아들였느냐?”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사내의 질문에 이제 스물도 채 안 되어 보이는 미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추적 중입니다. 다만 위치가 포착되었으니, 오늘이 지나기 전에 추살할 수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

“음, 고생들 했군.”

사내가 몸을 돌렸다.

치리리링.

하의에 붙은 금실, 그리고 금실과 연결된 보석들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쌍도문까지 정리되면, 이후에는 은씨세가(銀氏世家)만 남은 건가?”

“그렇습니다.”

사내, 홍관이 희미하게 웃었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지만 안색이 창백해서 그런지 작은 미소에도 섬뜩함이 묻어 나왔다.

“거기까지 정리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무너지겠군. 그간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야주(夜主)께서 더 고생이 많으셨지요.”

야주.

야주란 곧 밤의 주인을 뜻한다. 암살자 세계에서는 그것이 최고의 살수에게 보내는 찬사로 통한다.

무림 최강의 살수. 무림사라는 양지(陽地)에 이름을 새긴 적은 없지만, 극소수의 뒷세계 거물들만이 그 존재를 아는 강호 최악의 사신(死神).

대대로 음신(陰神)에게 붙는 칭호가 바로 야주였다.

치리링! 치리링!

산뜻한 걸음으로 의자에 가서 앉은 홍관이 턱을 괴었다.

“고작 석 달을 보지 못했을 뿐인데, 그새 실력이 더 늘었구나.”

“감사합니다.”

“음한백류(陰寒白類)와 음화홍류(陰火紅類)의 균형이 잘 유지되고 있다. 이제 두 무공을 하나로 합쳐 음제경(陰帝境)에 이르면, 구파의 장문인이라도 너의 마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청년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홍관의 미소가 짙어졌다.

“불만스러우냐?”

“……아닙니다.”

“네 마음을 내가 모를까. 다만, 너의 성취는 스승인 나보다 십 년은 더 빠르다. 나 역시 전대(前代)에게 희대의 천재라 불렸던 걸 생각하면, 너는 음신의 역사에 있어 최고의 재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니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풀어 가도록 하라. 음제경에 오르기 직전이야말로 화한(火寒)의 기가 가장 요동치는 때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간 얻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목소리가 무척이나 따뜻했다. 암살계의 정점이라 불리는 거물도 사람은 사람인 것일까?

하지만 목소리와는 달리, 정작 청년을 보는 홍관의 눈빛은 지독하게 무심했다.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것처럼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쌍도문주만 잡으면 돌아와서 수련에 힘쓰도록 하라. 그간 고생이 많았다.”

“예, 사부님.”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해라.”

“예.”

미청년이 절을 올리곤 방에서 나갔다.

“……흐음.”

방만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댄 홍관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기억하고 있군.”

홍관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대제자가, 자신이 직접 건 섭혼(攝魂)의 비술을 깨 버렸다는 것을.

섭혼술에도 여러 가지 비술이 있다. 단순하게는 사람을 백치로 만들거나 미치게 만드는 것도 있지만, 고등의 섭혼술은 시전자가 원하는 기억만 골라서 제거해 버릴 수 있다.

홍관이 제자에게 가한 섭혼술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참으로 탐나는 인재였거늘.’

대제자의 가족을 죽인 것은 자신이었다.

본래 홍관은 대제자도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대제자의 근골과 재능이 그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걸 깨닫곤 그대로 납치하여 섭혼술을 건 후 제자로 삼아 버렸다.

훗날 중원의 사신(死神)으로 키워, 음종(淫宗)의 사왕(邪王) 중 하나로 만들 생각이었거늘.

“하기야, 세상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얼마나 있겠는가. 쯧, 녀석이 사음(邪淫)과 연이 닿지 않았던 것이겠지.”

홍관이 고개를 저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때였다.

‘…….’

홍관의 눈동자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모습을 드러내게.”

“…….”

“귀신 놀음을 하고 싶은가? 다름 아닌 내 앞에서?”

“……흐음.”

대체 어디로,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홍관의 등 뒤, 깊게 진 그림자 속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홍관의 창백한 피부와는 달리 적당히 그을린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홍관처럼 키가 훤칠했지만 몸매는 굴곡졌고, 차림새는 지극히 단출했다.

홍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안 본 새에 못된 버릇을 들였군.”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펄럭!

의복을 펄럭이며 홍관의 맞은편으로 간 여인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실력은 그대로인 것 같지만,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 생겼네. 중원 물이 좋기는 좋은가 봐? 예전처럼 날카롭지가 않아.”

“수천 리 길을 건너와서 그따위 헛소리나 지껄이고 싶나?”

“헛소리? 내 말을 헛소리로 들을 정도라면 정말 많이 무뎌졌네. 예전의 넌 그렇지 않았는데.”

여인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딱히 의도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기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행동이 몹시 요염해 보였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음신이니, 야주니 추켜세워 주니 근본을 잊었어?”

홍관, 아니 야율적의 눈에서 살기가 번들거렸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소방(蕭芳).”

“다행이네. 내 이름은 잊지 않았어.”

소방이 방을 둘러보았다.

“호오, 엄청 화려하네? 대륙의 황제 부럽지 않은 권세를 쥐고 흔든다더니, 방을 온통 금으로 치장했어.”

“…….”

“하지만 알고 있지? 이 방의 금은 물론 네가 걸친 보석들, 옷, 심지어 너의 생명까지도 사음의 것이라는 걸.”

야율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심(信心)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 먼 길을 온 건 아니겠지?”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문제기도 해. 네가 대륙의 잡것들에게 물들어서 본교를 잊으면 안 되잖아? 너만큼 오랫동안 대륙에 눌러앉은 놈은 없었어.”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다. 제아무리 네가 차기 사왕(邪王) 중 하나로 손꼽힌다지만, 대교전(大敎殿)에서 내려온 지시까지 넘볼 정도인가?”

소방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대교전은 곧 사음교 최고의 수뇌부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하달된 명령은 곧 신의 명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신의 명령은 곧 교주의 명령이기도 했다.

즉, 야율적은 소방에게 교주님의 명령에 관여할 정도로 네가 대단하냐고 물은 것이다.

자칫 잘못 발언했다가는 반역죄로 즉각 처형이 결정될 만한 사안.

소방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지.”

“대답하지 않는군. 다시 묻겠다. 네가 대교전에서 떨어진 명령마저 넘볼 만큼 대단한 존재냐고 물었어.”

“일이 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대답지 아니하면 반역죄로 상부에 신고하겠다.”

“신화교가 당했어.”

“……?!”

야율적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라고?”

“하남성 군정을 장악했던 신화교 측 고수들이 무림맹의 고수들에게 쓸려 나갔다. 신화교 측에서 제대로 발표하진 않았지만, 무장급만 해도 최소 다섯 이상이 죽은 모양이야. 그중에는 상위 무장도 둘 이상 끼어 있다고 추측 중이야.”

“……!!”

야율적의 얼굴이 더더욱 굳어졌다.

신화교의 십팔무장은 그 무공이 실로 만만치 않은 놈들이었다. 대놓고 말하자면 사음교의 무장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강자들이며, 특히 일호무장은 반신사도(半神使徒)의 경지를 눈앞에 둔 진짜 고수였다.

“……하남 침투는 일호무장 번작이 수장으로 직접 참여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맞다고? 내 말을 제대로 들었나? 나는 번작이라고 말했다. 너나 나와 붙어도 승패를 논하기 힘든, 그 번작이 수장으로 함께했단 말이다.”

“알아.”

“한데 당했다고?”

“번작은 살아남았어. 휘하 무장들이 죽은 거지.”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번작은 강하다. 지휘 능력에 있어서도 큰 부족함이 없어. 한데 어찌 무림맹, 그 잡것들에게 당할 수가 있지?”

“그 건에 관해서는 신화교 측에서 함구하고 있으니 알 수가 없어. 중요한 건 무장 중 번작만이 살아남았다는 거야.”

“……!”

“다만, 묘한 게 있다.”

“묘한 것?”

“신화교가 모든 정보를 제공하진 않았지만…… 그다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뭐?”

“…….”

“십팔무장 중 최소 다섯 이상이 죽었다고 했어. 한데 큰 문제가 아니라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 나만이 아니야. 내 사부님께서도 그렇게 느꼈다고 하셨어.”

야율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소방이 말했다.

“됐어. 중요한 건 신화교가 아니야. 우리지.”

“…….”

“근래 이곳 남부의 백도 문파들을 이간질해서 정파의 힘을 빼고 있었지?”

“상부의 명령이었으니까.”

“그래. 문제는, 신화교의 무장들을 죽인 무림맹이 과연 이쪽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이냐야.”

“……!!”

“신화교가 하남에 완전히 자리 잡은 이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위험해. 무림맹에서 정보원을 파견할 거야. 최악의 경우, 진짜 실력자를 보낼 수도 있어.”

“실력자라.”

“아! 신화교가 이건 말해 주더군.”

소방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무장들과 싸운 이들 중 성천의 강자는 없었어.”

야율적은 크게 놀랐다.

무장들의 죽음에, 그는 무조건 성천의 강자가 투입된 줄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 강자가 아니고서야 번작이 지휘하는 무장들을 때려잡을 수 없었을 테니까.

한데 아니라니?

“그래서 더 위험한 거야. 성천급의 강자가 아닌데도 당했으니까. 그 말인즉슨…….”

“놈들이,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뜻이냐?”

“상부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어.”

“…….”

말없이 눈만 부릅뜬 야율적을 주시하던 소방이 자세를 편히 했다.

“석 달 정도 이곳에 머무를 거야. 혹시 무림맹의 떨거지들이 냄새를 맡고 올 수도 있으니까. 만약 무시하기 힘든 고수가 오면, 그때는 너 하나로 부족할 수도 있잖아?”

야율적은 그 말을 단호하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십팔무장도 그렇게 당했을 테니까.

다만, 중원의 음신이자 야주로서 이 말은 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뚜두두둑!

강하게 쥔 주먹에 열 개의 반지가 모조리 끊어졌다.

“내가 부리는 쥐들이 남부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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