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범과 사자는 다르다 (6)
“지금쯤 만났겠군.”
“그럴 겁니다.”
차를 마시는 연위의 얼굴은 지극히 무표정했다.
근래 유해진 면이 있지만, 본래부터 연위는 꽤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표정 없이 차를 마시니 방 안의 분위기가 엄청나게 무거워졌다.
천하의 당관조차도 연위의 얼굴을 보며 괜스레 헛기침할 정도였으니, 어지간한 사람은 숨도 못 쉬었을 것이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연 대수의 능력이 원체 출중한지라 전면에 나서는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람이 연가주께 하는 말이 있지요. 바로 걱정하지 말란 말이었습니다.”
“…….”
“그 말이, 부모인 연가주께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이번에도 연 대수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연가주께서도 아시다시피 연 대수는 승산이 없는 싸움엔 몸을 던지지 않습니다.”
연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제갈문호가 곤란하다는 눈으로 당관을 보았다. 옆에서 좀 거들어 달라는 뜻이었다.
당관이 입맛을 다셨다.
“부모가 자식 걱정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연 대수는 다 컸잖소? 그 나이에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할 만큼. 잘 키웠고 잘 컸으니, 이제는 그저 지켜보는 일밖에 할 수 없소이다.”
평소라면 연호정더러 싸가지니, 미친놈이니 별소리를 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위의 표정이 너무 심상치 않아서 당관조차 단어 선택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성격에 위로의 말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제갈문호의 표정이 대번에 떨떠름해졌다.
그때, 연위가 말했다.
“항상 각오하고 있었소.”
두 사람이 연위를 보았다.
끝까지 찻잔을 주시하며, 연위가 말했다.
“당가주 말씀대로, 호정은 다 컸소. 심지어 지평도 제 몫을 해내기 시작했지. 그것은 비단 내 자식들만이 아니오. 당가주와 제갈가주의 자식들도 제 몫을 다할 만큼 컸소.”
“…….”
“생각해 봤소. 이미 다 큰 자식들에게 부모로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더이다. 사소한 것들이야 챙겨 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부모의 욕심이지.”
“연가주.”
“하면 부모로서, 무림인으로서 자식에게 무엇을 더 해 줄 수 있는가?”
연위의 눈이 서늘해졌다.
“복수요.”
“……!”
“내 자식들은 무림인이오. 나 역시 그러하지. 그렇다면 나는, 어디선가 자식이 죽으면 복수를 해 주는 것 외에 더는 해 줄 만한 게 없소이다.”
제갈문호와 당관은 당황했다. 군자라고 칭송받는 연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연위가 차분하게 차를 마셨다.
그 한 모금 차에 복잡했던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새끼가 날갯짓을 하기 시작하면, 어미 새는 더 이상 먹이를 구해다 주지 않는 법이오. 사람도 같소. 그러나 사람과 짐승은 엄연히 다른 법. 내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소.”
“…….”
“괜스레 분위기를 망쳐 죄송하오. 말은 이리했지만, 제갈가주의 말마따나 걱정이 가시질 않소이다. 지금부터 이 걱정은 나만 안고 갈 테니, 굳이 내 눈치를 볼 필요는 없소.”
연위가 탄식했다.
“다만, 부모에게 남은 그 마지막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제갈문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가주에게 남은 마지막 권리를 사용할 일이 없도록, 이 사람이 최대한 돕겠습니다.”
“감사하오.”
당관이 입맛을 다셨다.
“하긴, 연가주의 말씀도 옳소. 무림인의 자식이 제 몫을 다할 만큼 컸다면, 남은 건 복수뿐이지.”
복수, 응징.
당가인에게 있어 이만큼 큰 울림은 주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연위의 말을 곱씹는 당관의 얼굴이 몹시 진지해졌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어찌 되었든, 연 대수가 본 양천의 성격이라면 절대 연 대수를 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럴 수가 없지요. 그는 투왕이지만, 또한 수만의 부하를 이끄는 흑도의 수장입니다. 섣불리 행동할 수 없는 위치입니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또한 그자는 투왕이오. 흑도인이라서가 아니라 투왕이기 때문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그럴 겁니다. 다만 연 대수가 양천과 거래할 것이 있다고 했으니, 거래가 성사되려면 연 대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음황신장에 관련된 사항이었다. 제갈문호와 당관은 그 내용을 자세히 모르지만, 연위는 이미 연호정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연 대수라면 분명, 최고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 * *
파파파팡! 퍼엉!
두 고수의 싸움은 점입가경의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굉장해.’
부선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싸움다운 싸움이 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스승님께서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스승께서 진지하게 승부에 임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이었지만, 그 당시의 실력만 다 꺼내도 저 연호정이란 청년은 진즉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허투루 싸우고 계신 것도 아니다.’
파바바박! 퍼억!
연호정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쾅!
연호정의 팔꿈치를 막은 양천의 팔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충격의 누적량이 달랐다. 양천의 공격을 방어하면 할수록 연호정의 기도는 무섭게 흔들렸고, 연호정의 공격을 방어하는 양천의 기도는 처음과 같이 몹시 안정적이었다.
그래도, 손속은 나눠진다.
양천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지만, 박투전(搏鬪戰)이라는 것이 이뤄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싸움이다. 생사를 다투는 전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아니라, 비무장 위에 올라선 투사들의 투쟁술이었다.
물론 비무라 해도 아차 하는 순간 죽는 건 변함이 없다. 하지만 생사결이라고 보기도 애매했다.
마치 어린 시절, 뒷골목 대장들이 대표로 나와 승패를 나누는 것처럼.
연호정과 양천의 싸움은 놀랍도록 박진감이 넘쳤다.
“……대단하다.”
부선은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분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실제 기량은 자신보다 높은 천하제일 후기지수와 함께 온 청년 검사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형님께서 강하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투왕과 박투전이 가능할 줄이야.”
두 초고수의 격전을 피해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거리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부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음?”
힐끔 부선을 본 강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스승님과 박투전이 가능하다고?”
강량이 턱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당신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요? 잘 싸우고 있잖소?”
“웃기지도 않는 소리! 누가 봐도 사부님께서 힘을 아끼며 싸우고 계신 거다. 만약 사부님께서 전력을 내셨다면 삼 초 안에……!”
“하면, 지금 저건 싸움이 아니오?”
“……!”
“당신이라면, 천하의 투왕과 저 정도의 박투전을 벌일 자신이 있소?”
순간 부선은 할 말을 잃었다.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힘을 숨겼느니, 놀아 주느니 따위의 말은 결국 탁상공론에 불과하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일 뿐이오.”
“놀아 주시는 것뿐이다. 스승님께서 지루함을 느끼시는 순간 저자는 죽어.”
“그건 모르는 거요.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까.”
“말장난을……!”
“그리고 보시오.”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다는 듯, 혹은 씁쓸한 듯 느껴지는 묘한 미소에 부선은 괜스레 마음이 아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 스승의 얼굴 어디에서 지루함이 보인다는 거요? 지루함은커녕, 오랜만에 벌어진 싸움다운 싸움에 형님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은데?”
부선이 양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그렇다. 강량의 말이 맞았다.
연호정의 주먹질과 발길질에 대응하는 양천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부선은 알고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양천의 볼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반짝였고,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기도는 안정적인 가운데 묘한 흥분으로 젖어 있었다.
강량의 말이 맞았다. 양천은 지금 이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형님이 진다고? 맞는 말이오. 그럴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지. 하지만 중요한 건 투왕이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오.”
말을 하면서도 강량의 눈은 두 사람의 무지막지한 움직임을 하나하나 좇고 있었다.
단 하나의 동작도, 한 번의 부딪침도 허투루 넘기지 않겠다. 그런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투왕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는 것, 투왕이 이 싸움을 보다 길게 즐기도록 상대하는 것.”
“……!”
“투왕이 이 싸움에서 전력을 발휘하지 않게끔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형님이 대단한 이유요.”
“……애초에 그것을 노리고 접근했다고?”
“그건 당사자가 아니고는 모르는 일이오. 다만 내가 아는 형님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적지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외다. 필시 자신이 있었겠지.”
강량이 미소가 짙어졌다.
“투왕이 자신을 죽이지 못하도록 할 자신, 그리고 본인의 무공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삼을 자신이.”
퍼어어어어어엉!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연호정이 오 장 밖으로 튕겨 나가 땅을 굴렀다.
“쿨럭!”
참고 참았던 피를 토한 연호정이 벌게진 눈으로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의 자세는 더더욱 낮아져 있었다.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려는 사자의 자세 그 자체였다.
물끄러미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이내 히죽 웃었다.
“졌소.”
“……?”
“여기까지 합시다.”
양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기까지 하자고?”
푸스스스.
연호정은 한계까지 끌어올렸던 내공을 안정적으로 갈무리했다. 더는 싸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 싸움은 아직…….”
“끝났소. 이제는 내가 한계거든.”
“……?”
“다만, 오늘과 같은 싸움을 또 즐기고 싶다면 이번 임무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겠소.”
“뭐라?”
“괜찮았소? 나와의 싸움은?”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던 양천이 자세를 풀었다.
양천의 얼굴이 묘해졌다.
“괜찮았지. 괜찮았고말고. 내, 무극의 별빛에 몸을 담은 이후로 이처럼 박진감 넘치는 대무(對武)는 처음이었다.”
“영광이오.”
잠시 말이 없던 양천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이걸 노린 거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적이라면 몰라도 손속을 나눌 가치가 있는 악우(惡友)를 죽이긴 어렵지. 덕분에 잘 놀았다만, 나에게는 재미있는 놀이가 너에게는 생사가 걸린 눈치 싸움이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하긴 했소. 다만 싸움이 지속될수록 그런 건 머리에서 사라지더군. 잡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싸움은 아니었으니까.”
“…….”
“다만 살려 둘 만한 가치가 있는 악우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날 도와주시오. 함께 삼교를 부숩시다. 물론, 당신 역시 놈들에게 갚을 빚이 남았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참으로 미워할 수 없는 놈이로다.’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다. 물론 처음부터 연호정을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호쾌하게 마무리될 줄은 몰랐다.
“머리 좋은 적은 언제나 제거 대상 일 순위지. 하지만 넌 지금 죽이기 아까운 놈이다.”
양천이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적어도 이번만큼은 손님으로 맞아 주마.”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묵룡부로 초대하겠다는 거요?”
“왜? 무서우냐? 데려가서 죽일까 봐?”
“그럴 리가. 죽일 거면 진즉 죽였겠지. 오히려 영광이오. 다만, 임무가 있어서 오래 머물진 못할 거요.”
“내 몸뚱이만 고치고 떠나라. 홍관에 관한 정보는 내 몸이 멀쩡해진 연후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마음에 드는 거래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