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84화 (384/963)

384화. 범과 사자는 다르다 (4)

부선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이럴 수가.’

쩌저저저적! 쩌저저적!

십 장 밖으로 물러난 것도 모자라, 점차 증폭하는 기압에 내공이 뒤흔들려 오 장을 더 물러나야 했다.

총 십오 장에 달하는 거리를 물러났음에도 무지막지한 기압에 속이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스승에게 배운 절정 무공, 혈사자기(血獅子氣)를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는데도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절대자의 위용. 성천의 고수가 작정하고 전력을 끌어내니, 무공의 고하(高下)에 상관없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공포에 질린다.

‘맞서 싸울 엄두도 못 낸다. 싸우기는커녕 눈앞에서 마주할 수도 없어! 한데…….’

부선이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어떻게?!’

파라라라라락!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푸른 옥빛의 진기를 뿜어내는 연호정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양천을 보고 있었다.

손에 쥔 거대한 도끼에서 적백의 불바람이 휘몰아친다. 자세는 낮았고 왼손은 바닥을 짚었으며,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허벅지는 무서운 힘을 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 것 같은 맹수의 자세다. 호장(虎將)이라 함은 무릇 범처럼 용맹한 장수를 이르는 말이지만, 지금의 연호정은 실제로 거대한 범이 되기라도 한 듯 살벌한 눈빛을 피워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연호정을 보는 양천의 얼굴엔, 믿을 수 없게도 희미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저자의 무공은 결코 스승님께 비할 수 없다. 나보다 강할지는 몰라도, 나와 비슷한 영역에 거할 뿐 극치에 달하지도 못했어! 한데 어찌 저리 멀쩡하지? 게다가…….’

부선의 눈이 연호정에게서 다시 양천에게로 옮겨 갔다.

쿠르르르르릉!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붉은 기운이 합쳐지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거대한 야수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것은 혈사자기가 아니다.’

부선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혈사자기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진보된……!’

그때, 양천이 입을 열었다.

“사음교주, 그 작자와 손속을 나눈 이후로 나는 내 무공을 다시 돌아보았다.”

“…….”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내, 천하를 주유하며 언젠가 권신(拳神)과 검선(劍仙)의 아성을 뛰어넘으리라 송곳니를 갈아 놓고 있었거늘, 세상이 모르는 새외의 강자에게 반 수 뒤질 줄이야 뉘라서 알았으랴.”

부선은 깜짝 놀랐다.

사음교주에 관해서는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녀는 스승과 사음교주라는 작자가 가볍게 손속만 나눠 본 걸로 끝낸 줄 알았다.

이유인즉, 그녀에게 있어 스승인 양천은 천하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는 절대무적의 강자였기 때문이다.

“그자에게 당한 내상은 보름도 안 되어 고쳤다. 하지만 찢어진 내 자존심은 한 해가 지나도 그 상처가 아물질 않았지. 오히려 곪아서 썩어 들어가고 있었어.”

“…….”

“내 비록 사음교의 자금력을 빌려 묵룡부를 세웠으나, 그렇다고 놈들에게 고개를 숙인 적은 없다. 그럴 수가 없지. 나는 천성적으로 오만한 사람이다. 내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왔거늘, 한 번 패배했다고 바로 꼬리를 말아서야 쓰겠는가.”

훅!

지진이라도 일으킬 듯 엄청난 압력을 자아내던 검붉은 기운이 일순간 양천의 체내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하여, 내가 익힌 세 가지 신공 중 가장 약하지만, 미완(未完)이기에 가장 장래성이 있는 하나의 무공을 완성시키려 피땀을 흘렸다. 그리고…….”

양천이 오른손을 들었다.

한없이 날카로웠던 연호정의 눈빛에 은근한 긴장이 떠올랐다. 양천의 오른손에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이제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무공이 바로 흑사자기(黑獅子氣)다.”

스스스스.

무형의 불길이 서서히 어둠의 색을 갖추었다.

종전의 검붉은 색이 아닌, 흑회색의 살기 넘치는 기운이었다. 일렁이는 그 흑회색의 불꽃이 마치 사자의 갈기를 연상케 했다.

“제자야.”

양천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부선이 고개를 숙였다.

“네, 스승님.”

“혈사자기에 대한 너의 깨달음이 실로 기특하다. 조만간 네게도 이 힘을 전수하겠다.”

“가, 감사합니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슬슬 시작하지. 부디 한 합이라도 버텨 내기를 바란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간다.”

쿵!

양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순간 연호정은 세상이 어두워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고작 한 걸음이지만, 그것은 양천의 의지가 제대로 발현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셋.’

지이이이이이잉!

연가신단을 연성한 이래, 이 정도로 빠르게 회전한 적은 없었다.

신화교의 강자들과 싸울 때도 이러지 않았다. 그들과의 싸움은 숙명의 영역이었지만, 양천과의 싸움은 죽음의 영역이다.

전투의 화신인 연호정조차 극단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전신의 모든 진기가 한계 이상으로 활성화되고, 양천을 보는 연호정의 두 눈에 천부의 재능이 깃들었다.

‘둘.’

광룡부를 쥔 손에 땀이 배어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양천의 약점을 찾아보고 있었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시간에 수십 번이나 상대의 자세를 훑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약점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평생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나.’

약점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문제는 상대의 힘과 속도에 이쪽이 대응할 수 있는가였다.

그렇다면?

일순 연호정의 안광이 순백의 화염을 토해 냈다.

‘온다!’

번쩍!

양천이 움직이기도 전에 연호정의 발이 좌측 전방으로 세 치 반 움직였다.

퍼어어어어엉!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양천의 주먹이 허공을 꿰뚫었다. 허공을 꿰뚫은 그의 주먹에서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십 장 밖에 있던 나무 네다섯 그루가 우수수 쓰러져 버렸다.

‘……!!’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그건 결코 인간의 육신에 담아낼 수 있을 만한 힘이 아니었다. 속도를 떠나서, 권압(拳壓)만으로 십 장 밖의 나무들을 수수깡처럼 쓰러트렸다.

‘무신(武神)의 경지. 그리고 이 경지는…….’

양천의 입이 열렸다.

“공격선을 읽고 미리 움직여 상체가 날아가는 것을 막았군. 참으로 대단하다만…….”

그가 연호정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넉 자도 되지 않았다.

“받아 내지 않고 피했다? 규칙을 지키지 않을 셈이냐?”

순간 연호정의 광룡부가 무지막지한 폭풍을 일으키며 휘둘러졌다.

콰아앙!

양천의 몸이 들썩거렸다.

실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절정고수 서너 명의 몸뚱이를 찢어 버리는 광룡부의 일참(一斬) 공력을, 양천은 여유로이 한 손으로 막아 낸 것이다.

심지어 도끼날을 막은 손바닥에서는 피 한 방울 배어나지 않았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연호정의 얼굴에는 여유가 어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해서 말이오.”

“이상하다?”

“흑도의 규율은 잘 알고 있소. 당신에게 나는 변절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

“물론이다.”

“하지만 나는 변절자가 아니외다. 그저 당신을 속였을 뿐.”

“말장난을 하고 싶은가?”

“공평함을 말하고 싶은 거지. 미안하지만 난 흑도인이 아니거든.”

흑도인이 아니다.

연호정은 그 말을 내뱉으며, 흑암제로서의 과거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 냈다.

“나는 백도 정파, 강동 벽산연가의 장자외다. 흑도의 규율이 삼 초라지만, 내 규율에 그딴 건 없소.”

“……?”

“삼 초고 뭐고, 별 시답잖은 짓거리 집어치웁시다. 당신 역시 풀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있을 터이니, 당신의 그 별호답게 제대로 붙어 보자고.”

양천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버티는 게 아니라 싸우자고? 이 나와?”

“그래.”

화아아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불꽃 같은 살기가 터져 나왔다.

“댁은, 이 나와 붙는 거다.”

콰앙!

힘찬 진각에 백호의 기세가 어렸다.

“으아아압!”

흔치 않은 연호정의 기합이다. 전신의 모든 근육에서 힘을 쥐어짠 연호정이 엄청난 힘으로 상체를 비틀었다.

쿠르르르릉!

양천의 얼굴이 점차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광룡부의 도끼날을 잡은 손은 그대로다. 그 동작, 그 자세 그대로 다섯 자나 밀려나 버렸다.

‘이놈 봐라?’

딱히 놀라울 건 없다. 상대가 무극의 경지에 진입했다면.

문제는 그래서 놀랍다는 것이다.

무극의 경지에 진입하긴커녕 초절정의 영역에서도 극치를 엿보지 못한 젊은 천재가 힘으로 자신을 밀어 버린 것이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치이이이이익!

광룡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화기이자 살기였다. 연가신단의 모든 힘을 증폭시켜 주작기에 힘을 실어 주니, 양천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의 온도가 넘실거렸다.

물론 그 정도로는 양천의 내공 방패를 뚫을 수 없었다. 그저 상상을 초월하는 역량에 한순간 놀랐을 뿐이었다.

‘이놈…….’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그때도 제 역량을 숨기고 있었던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이 정도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지금 연호정은 본인의 역량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신력이든 뭐든 이놈은 사람의 상식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연호정이 보여 주는 그 살기와 투기(鬪氣) 앞에서.

싸움의 제왕, 무림의 절대고수 양천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파아아악!

광룡부에서 손을 놓은 연호정이 혈익휘천을 펼쳤다.

병장기를 놓아 버린 것도 모자라 일 장도 안 되는 거리에서 초고속 보법을 펼쳤다.

제아무리 양천이라도 이 정도 거리, 이 정도 속도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의 주먹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번쩍!

내공 방패로 완벽한 보호막을 세운 양천은 또 한 번 놀랐다.

자신의 명치를 노리고 휘둘러진 연호정의 주먹이 급격하게 꺾이더니, 어느 틈에 오른팔의 팔꿈치 역관절을 노린 것이다.

빠각!

양천의 팔이 가볍게 위로 튕겨 나갔다.

물론 연호정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양천이 일부러 팔을 세워 관절을 보호한 것이다.

파박!

연호정이 짧은 두 걸음으로 양천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그 움직임은 또 다른 놀라움이었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사람의 품 안으로 파고들 생각은 누구라도 쉽게 하지 못한다.

이내 연호정의 두 주먹이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졌다.

퍼버버버벅! 파파팡!

주먹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단순히 빠른 것만이 아니었다. 그 못지않은 힘도 실려 있었고, 그 정도 속도로 휘두르는데도 연계기의 부드러움이 확실하게 살아 있었다.

퍼퍼퍼퍼펑!

폭발하는 권격을 쳐 내니,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그 쾌공(快攻)에 반응하는 양천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생전 처음 보는 연호정의 권법을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손짓으로 모조리 파훼하고 있었던 것이다.

‘빠르고 강하다. 연환기에 대한 이해도가 실로 높아. 근접 박투에 있어서 이 정도의 역량을 보여 준 후배가 또 있었던가.’

하지만, 그뿐이다.

양천의 눈에 결심이 어렸다.

‘분명 대단하지만, 아직 내게 싸움을 걸 만큼의 역량은 못 된다.’

양천의 발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쾅!

“큭!”

연호정이 삼 장이나 훨훨 날아 바닥에 착지했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강하구만.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지.”

주르륵.

양천이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정강이 부근의 의복이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그리고 잘려 나간 의복에 점점이 피가 묻어 나왔다.

연호정이 차가운 얼굴로 흑백쌍룡부를 들어 올렸다.

“다시 가도 되겠나, 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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