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범과 사자는 다르다 (1)
펄럭!
상의를 벗은 양천이 거대한 동경을 바라보았다.
동경 안에는 수염을 잘 다듬은 중년 사내가 있었다. 육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한계를 초월한 육신과 궁극의 내공을 지닌 중년의 사내가.
양천이 가슴으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중년 사내도 손을 올렸다.
스르륵.
가슴 한가운데를 매만지자 왠지 찌릿한 통증이 이는 듯했다.
‘음황신장(陰荒神掌).’
음황(陰荒)의 기예는 사음교주의 주력 무공이었다.
권, 장, 지, 각 모든 부문에 있어 악랄하기 그지없는 살법으로 구현되는 음황의 기예는 중원 전역을 돌며 온갖 무공을 경험해 본 양천조차 처음 겪어 보는 신기(神技)의 무공이었다.
‘듣기로, 음황의 기예에 당하면 빠르든 늦든 심맥이 터져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공이지만, 일발 격중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살법들은 많이 봐 왔다. 실제로 양천 자신의 무공 중 몇몇 침투경도 그러한 종류였으니까.
하지만 음황신장은 확실히 달랐다.
‘무조건 심맥을 건드린다. 다른 어떤 부위도 아니야. 오로지 심맥을 터트리는 거야.’
굉장한 살법이지만, 동시에 그리 효율적인 살법이라고 할 순 없었다.
본디 내기발경(內氣發勁)으로 구현되는 암경(暗勁)은 체내에 침투하여 폭발하는 성질을 지녔다.
그 암경은 무공의 종류, 시전자의 경지, 의도 등에 따라 폭발하는 시기가 제멋대로 달라진다. 암경에 기를 덧씌워 침투시키면 한 달 동안 끙끙 앓다가 혈관이나 내장 기관이 터져 죽을 수도 있고, 일격에 내부가 폭발해 죽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암경이 신체의 어떤 부위에서 터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명적이지만, 운이 좋으면 팔 하나 잃는 선에서 끝날 수도 있고, 하늘이 돕는다면 약해진 암경이 피부만 터트리고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음황의 기예는 달랐다. 음황은 오로지 심맥을 터트려 상대를 즉사시키는 데에 중점을 둔 무공이었다.
무서운 무공이지만, 미리 심맥을 진기로 보호하기만 하면 사망 확률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즉,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다른 암경과 비슷하게 위험하지만, 한번 그 특성을 알게 되면 위험도가 급격하게 낮아진다.
무공 수위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한 번 격중당한 걸로는 죽지 않는다. 아니, 제대로 방어만 하면 내외상을 입을지언정 심맥만큼은 확실하게 보호할 수 있다.
‘즉, 음황무를 꺼내 든다는 건 상대를 확실하게 죽이겠다는 의지를 품었다는 뜻이다. 그 무공을 상대해서 살아남으면 자신의 약점이 만천하에 공개될 수도 있으니까.’
양천이 동경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두 눈에 끔찍한 살기가 어렸다.
“……나는 분명 그자의 무공을 막았거늘.”
가슴에 찍힌 황금빛 장인(掌印)은 그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한 번 의식을 잃은 후, 양천은 이 장인에 의식을 집중했다.
하지만 수십, 수백 번을 들여다봐도 이 장인에서 어떠한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흔적에 불과할 뿐, 자신의 내기를 흐트러트리거나 원정을 상케 하는 등의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신경, 피하 지방, 근신경 하나하나 전부 살폈다. 그런데도 이상이 없었어.’
음황신장에 관한 사음교주의 깨달음이 한계를 초월하여, 단순히 내상만 유발하고 끝내거나 정신을 잃게 만드는 정도로 조절한 걸 수도 있었다.
다만, 그것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게 이상했다.
‘대체 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지그시 동경을 노려보던 양천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확히는, 이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벌써 하남성의 관부를 장악했단 말인가?”
양천은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막 나가는 놈들이로군. 아무리 중원을 노리고 있다 한들, 설마하니 관부까지 손을 뻗쳤을 줄이야.”
그는 모용군의 얼굴을 떠올렸다.
혐오와 분노로 얼룩진 그 무서운 얼굴을.
‘다시 묻겠소. 당신, 사음교와 손을 잡았소? 삼교와 한통속이오?’
‘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오! 오랑캐들을 뒷배로 두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계약하여 무림맹을 시작으로 중원 전체를 놈들에게 가져다 바치려 한 못난 놈이냐고 묻질 않소이까!’
양천은 이를 악물었다.
“이놈들이……!”
쿠르릉!
타오르는 분노에 대전 전체가 뒤흔들렸다.
화가 났다. 고작 모용가주 따위한테 그런 폭언을 들은 것이.
화가 났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강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권력자조차 모르는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부끄러웠다.
‘고작 그따위 놈에게 폭언을 들을 정도로, 나는 타락해 버렸단 말인가.’
모용군에게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웠다.
분노로 내공을 발산하던 양천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군.”
피곤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는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다. 묵룡부, 흑도 연합의 총수로서 하루라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함께하겠느냐고?’
양천이 눈을 감았다.
‘백도와 손을 잡고, 삼교를 무너트린다?’
왜일까? 가슴이 답답했다.
양천은 재차 모용군의 말을 떠올렸다.
‘백도와 흑도가 수백 년을 부딪쳤다지만, 그래도 우리는 중원의 사람들이오! 가치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해도 다 같은 중원인이란 말이오! 한데 외세에 빌붙어 그만한 세력을 만들고 젠체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녕 당신이 삼교와 한통속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그간 백도의 위선자들에게 당한 흑도인들의 비참한 삶을 생각하면, 모용군의 말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언사였다.
그렇다고…… 흑도 역시 깨끗하진 않았지만.
‘삼교? 아니면 무림맹? 대체 누굴 상대해야 하는 것이지? 아니, 꼭 상대해야 할 상황이긴 한가?’
양천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구나. 정말 모르겠어. 내가 이리도 멍청하고 무능한 놈이었단 말인가.’
모용군에게는 말을 해 두었다. 길을 비켜 주겠노라고, 야율적을 잡을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은 주겠다고.
그 말 자체가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이유인즉, 야율적은 삼교에서 파견한 사악한 짐승이니까.
약간의 도움이 아니라, 전폭적인 지원을 마다하지 않겠노라고 말했어야 했다. 아니, 너희의 도움 이전에 내가 직접 잡아 족치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적어도 삼교를 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런 말이 나왔어야 정상이었다.
“난 대체 무엇을 위해…….”
그때였다.
“부주님!”
“……뭐냐.”
“무림맹의 유군 부대 수장이 부주님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양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개소리 집어치워라. 사흘 안에 호남을 통과하지 않으면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고 전해!”
그렇다. 이것이 자신의 현주소였다.
고작 모용가주의 부름에 직접 나선 것도 열불이 날 지경이거늘, 이제는 고작 한 부대의 부대장 따위가 자신을 보자고 해?
‘쳐 죽일!’
그때, 다시 백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주님.”
“또 뭐냐?”
“그가 제가 아는 자가 아니었다면, 저 역시 선처리 후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양천이 버럭 소리쳤다.
“그 무슨 헛소리냐! 상세히 말하라!”
“정입니다.”
“뭐?”
“전 정보부장, 정이었습니다.”
“……?!”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돌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쿠구구구구궁!
무지막지한 허공섭물에 그 무거운 돌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돌문 앞에, 백서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금, 뭐라 하였는가?”
백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무림맹 유군 부대, 의정군의 수장 연호정.”
“……!”
“그자가 바로 전(前) 정보부장, 무종문의 후예라 자처하던 정(定)이었습니다.”
번쩍!
양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 * *
“후우우.”
가볍게 내쉬는 한숨에 미세한 연기가 흘렀다.
호남은 하남보다 기후가 따뜻했다. 하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산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별빛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느껴지는군.’
우웅. 우우웅. 우우우웅.
어디서부터인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했다. 이 산, 그리고 산 너머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느껴져. 상상을 초월하는 살기가.’
연호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역시 무극에 달한 강자라 이건가. 거리가 이만큼이나 떨어졌는데도 공기의 떨림이 느껴지다니.’
오감으로 느끼는 게 아니었다.
육감이었다. 호남으로 진입하면서 연호정의 감각은 극단적으로 날이 서 있었고, 그 날 선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첨예하게 일어서 사방 공기를 훑고 있었다.
쿵.
광룡부를 내려놓은 연호정이 자신의 군마, 적풍(赤風)의 턱을 쓰다듬었다.
푸르륵.
적풍은 마치 전설상의 적토마처럼 크고 우람한 덩치를 자랑했다. 말 중 최고라는 한혈마보다도 체력이 좋았고, 서역의 어떤 말보다도 힘이 강했다.
한참이나 적풍의 턱과 콧대를 쓰다듬던 연호정이 말했다.
“잠시 다녀오지.”
스르륵.
기다렸다는 듯 모용우와 묵비가 일어났다.
“함께 가시지요.”
“그래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애증 가득한 악우(惡友)이자 원수와 대면하는 일이야. 굳이 여러 사람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만에 하나 전투가 벌어지면 누구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어. 오히려 우르르 몰려가면 괜히 양천의 신경만 자극하게 될 뿐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아는 양천은 절대 내게 그 주먹을 겨누지 않을 테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괜찮고말고.”
쩍!
광룡부를 뽑아 견봉에 걸친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동이 트기 전에 돌아올 테니까 푹 쉬고 있어.”
“……예.”
“그리고 강량.”
스르륵.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강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호정이 강량을 힐끔거렸다.
“원수의 얼굴을 보러 갈 테냐?”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미리?”
“훗날 내 검에 죽을 위인이오. 미리 말하건대, 형님이라도 그자의 목숨을 넘겨주진 않을 거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배포 하나는 좋다. 그래, 함께 가자.”
그렇게 산속에 의정군을 주둔시킨 연호정은 강량을 데리고 오십 리가 넘는 길을 건너갔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눈에 커다란 공터가 보였다.
환한 달빛이 내리쬐는, 스산하리만치 평평하고 깨끗한 공터가.
그리고 그곳에 두 사람이 있었다.
‘양천.’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깍지를 끼고 있는 양천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떠한 기파를 뿜는 것도 아닌데 무지막지한 존재감이 드러난다. 마치 사자가 사냥하기 직전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가만히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제자야.”
거리가 제법 되는데도 불구하고, 양천의 담담한 목소리는 연호정과 강량의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기서 걸어오고 있는 저 망할 자식이 진짜인지, 어디 네 무공으로 시험해 보겠느냐?”
파아아아앙!
양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체격 좋은 여인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며 주먹을 내뻗었다.
연호정의 눈에서 벼락이 쳤다.
콰앙!
광룡부의 파멸적인 일격으로 여인을 물리친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혈남아들의 재회답소이다. 말을 섞기도 전에 주먹부터?”
“…….”
“잘 계셨소, 양 부주?”
양천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달빛이 허물어지고, 세상에 어둠만이 가득해지는 듯했다.
“……쥐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