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5)
파라라라락!
완연한 봄이 왔다지만, 산세에 이는 바람은 여전히 강하고 날카로웠다.
그 바람에 맞아 펄럭이는 거대한 깃발 다섯 개가 의정군의 출정을 알렸다.
이전에 탕마멸사의 합군이 출정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군병의 수도 같았고 작전을 수행하러 간다는 명분도 같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그들은 이제 하나가 되었다.
동등한 입장에서 각자가 수행할 역할이 생긴 게 아니라, 하나의 부대가 되어 하나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 부담감과 이질감은 의정군 전원의 눈빛을 지독할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 놓았다. 자연스레 그들의 기파도 날카로워졌고, 결국 그들의 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굉장한 박력을 자아냈다.
“장관이로군요.”
성벽에서 의정군을 내려다보는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저들의 날 선 긴장감이 여기까지 전해집니다. 확실히 연호정 대수가 인물은 인물이에요.”
당관이 피식 웃었다.
“그놈이 진짜 걸물이었다면 저 과하기까지 한 기도를 조금 더 잠재울 수 있었겠지. 아직 완전히 하나로 통합하진 못한 것 같군.”
“그거야 어쩔 수 없었겠지요. 연 대수야 워낙에 바빴으니까. 하나 그의 성격과 능력이라면, 이번 임무로 의정군을 진정 하나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흥! 정말 그리된다면 저 싸가지 없는 놈의 콧대가 한층 더 높아지겠군.”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선두에 선 연호정을 보는 당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해 보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 역시 연호정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얼마 전 만천공과 화우공의 부족한 점을 짚으며 무론을 벌인 이후, 연호정을 보는 당관의 시선은 더 유해지고 깊어졌다.
“그나저나…….”
당관이 연위를 힐끔거렸다.
“괜찮으시오?”
“무엇이 말이오?”
“저놈 도끼질이야 워낙 정평이 나 있으니 별걱정이 안 될 테지만, 저 도적 같은 놈이 제 동생까지 데리고 가지 않았소이까.”
“…….”
“내 전에 보기로 둘째의 재능도 보통은 아닌 것 같더군. 하지만 아직 어려 보이던데.”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어리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요(要)는 경험과 무공이 부족하다는 뜻이리라.
연위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둘째의 재능은 본가 역사상 최고라 해도 무방하오. 그러나 당가주 말마따나 아직 많이 부족하지.”
“한데?”
“둘째의 재능을 믿소. 그리고, 첫째의 안목과 능력을 믿소. 필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그 둘이 무사히 돌아오려면 임무를 성공리에 마쳐야 하는 법. 연가주는 저 녀석들이 이번 임무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저 호정을 믿을 뿐이오.”
대답은 꼬박꼬박 해 주고 있지만, 심사가 제법 복잡하다는 걸 말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물끄러미 연위를 바라보던 당관이 몸을 돌렸다.
“갑시다. 가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괜찮소.”
“내가 안 괜찮으니 갑시다. 오늘 회의도 없고 할 일도 없으니, 이럴 때 술이나 한잔하면서 기분 풀어야지.”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관 나름대로 자신을 위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식들을 전장에 보내 놓은 부모 입장에서 술이 입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축배를 들기에는 아직 멀었소.”
당관의 눈이 서늘해졌다.
성벽 위로 걸어 올라오는 자, 바로 모용군이었다.
“이번 임무는 단순히 의정군의 능력과 본맹의 정보력만으로 처리될 만한 사안이 아니오. 중원 남부는 대대적으로 백도보다 흑도의 세가 강한 곳, 묵룡부가 어떻게 나서 주느냐에 따라 임무의 난이도가 달라질 것이외다.”
“그거 재미있는 말이로군.”
당관이 대놓고 비웃었다.
“그래서 우리 능력 출중하신 모용가주를 묵룡부에 보낸 것 아니었나?”
“양천은 위험한 자요. 나름의 긍지가 있는 호협이나, 이미 권력의 단맛을 경험했지. 잘 처리해 줄 거라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가 튀는 행동을 보이면 의정군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소.”
“아주 잘 알고 있구만. 역시 함께 손잡고 무림 정점을 노린 동지였다 이건가?”
모용군이 당관을 직시하며 말했다.
“난 그와 손을 잡은 적이 없소.”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어련하시겠나.”
대외적으로 밝혀져선 안 될 진실이었다. 모용군 역시 그들이 자신과 양천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놓고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하기야, 이제는 그마저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니 별 의미도 없지만.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현재 묵룡부의 움직임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같은 호남에 자리를 잡은 본가요. 호남을 통과해서 최남단으로 향하는 의정군의 뒤는 모용세가가 맡을 테니, 다른 분들은 군사를 도와 모이는 정보 중 중요한 것만 추려 주시오.”
“상전이 따로 없군.”
“가장 합리적인 역할 배분이라 생각했을 뿐이오.”
당관이 재차 입을 열려 할 때, 제갈문호가 말했다.
“모용가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은 우리끼리 투닥거릴 때가 아니라, 의정군이 임무를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뒤를 받쳐 줘야 할 때입니다.”
연위가 물었다.
“군사.”
“말씀하십시오.”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제갈문호는 연위가 왜 그리 묻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리하게 의정군을 출정시킨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리라.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잠시 모용가주와 얘기를 나눌 것이 있으니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알겠소. 집무실에서 기다리리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연위와 당관이 떠난 성벽 위에는 제갈문호와 모용군만이 남았다.
모용군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사람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 무엇이오?”
제갈문호가 말했다.
“묵룡부와는 완전히 거래를 끊은 것입니까?”
“재미있는 말이오. 나는 그쪽과 거래한 적이 없다 하지 않았소?”
“더는 이 부분에 관해서 논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이 마지막 대화지요.”
제갈문호가 품에서 문서 몇 장을 꺼내 들었다.
“그대가 묵룡부주 양천과 관련이 있음을 입증하는 문서입니다.”
“……!”
“물론 대단한 물증은 아닙니다. 그저 그간의 심증을 적어 두고 분석한 것일 뿐이지요. 난 이 문서를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차가워졌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오?”
“결정적인 물증은 아니지만, 이것이 강호로 퍼지게 되면 모용가주는 물론 모용세가의 입지도 땅에 떨어지겠지요. 어쩌면 치명적인 자금난을 겪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용가와 거래하는 상회들도 신용과 소문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이런 악소문이 돌면 그들 역시 등을 돌릴 확률이 높겠지요.”
“본가와 전쟁이라도 해 보겠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화르르륵!
제갈문호의 손에서 시퍼런 화염이 솟구쳤다.
제갈세가의 신공은 근본적으로 목기(木氣)와 수기(水氣)를 기반으로 한 무공들이 많다. 그런 제갈문호가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숨 쉬듯 자연스레 일으켰으니, 그의 무공이 다른 가주들에 비해 부족함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손을 턴 제갈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다 싶어 체계적으로 정리해 둔 문서입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에 관련된 자료는 지금 보여 드린 게 전부입니다.”
“…….”
“다 태웠으니, 마지막으로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봅시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것이오?”
“다시 묻겠습니다.”
제갈문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묵룡부, 정확히는 묵룡부주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습니까?”
“…….”
“대답해 주십시오.”
“내 대답이, 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러는 것이오?”
“나는 원활한 대화를 위해 먼저 문서를 태웠습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말을 돌려 제 질문에 담긴 진지함을 희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묻겠습니다. 묵룡부주와의 관계는 완전히 청산된 것입니까?”
물끄러미 제갈문호를 노려보던 모용군이 씹어뱉듯 말했다.
“양천의 역린을 건드리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온 나요.”
“…….”
“그렇게 자존심이 대단한 위인의 가슴을 비수로 헤집어 놓았소이다. 나 같으면, 당장은 살려 보낼지언정 다시 만났을 때만큼은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다짐했을 거요.”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났음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 그였다.
제갈문호가 눈을 빛냈다.
“그럼 양 부주와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이해하겠습니다.”
“한데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이러는 거요?”
“중요하지요. 연가주께서 그대 홀로 양천에게 가는 것을 용인하자 말씀하신 데에 동의한 건, 그대의 반응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모용가주 말마따나, 모용 군장이 연 대수 휘하로 들어갔으니 그만한 인질은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제가 아는 모용가주는 작정하면 숨 쉬듯 자연스레 거짓을 뱉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이 보기에,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군요.”
“…….”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작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고작이 아니지요. 앞으로 함께 싸워야 할 전우에게 우리가 모르는 악랄한 의도가 있다면, 어찌 신뢰하고 한배를 탈 수 있겠습니까.”
“…….”
“무례하게 몰아세운 점, 사과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가만히 제갈문호는 노려보던 모용군이 몸을 돌렸다.
“우는 건드리지 마시오. 사실이니까.”
“물론입니다.”
그렇게 모용군이 성벽에서 내려갔다.
제갈문호가 다시 의정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의정군은 저 멀리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었다. 굉장한 속도였다.
“……연 대수.”
제갈문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진행해도 될 것 같네.”
반 시진 후.
푸드드득!
커다란 날개를 쭉 펴고 활공하는 까마귀 한 마리가 연호정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연호정이 까마귀의 발목에 달린 연통을 꺼내 읽었다.
“……음, 역시 장난질은 없었군.”
쓴웃음을 짓던 연호정이 품에서 육포 조각을 꺼내 까마귀에게 먹였다.
“고생했다. 다시 돌아가도록 해라.”
까아아악!
힘찬 울음과 함께 날아오른 까마귀가 어느새 저 멀리 산봉우리 쪽으로 접근했다. 굉장한 속도였다.
모용우와 묵비가 그의 곁으로 접근했다.
“맹에서 온 연락입니까?”
“그래.”
“뭐라고 합니까?”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아니야. 그저 출정 전에 하달받았던 명령을 그대로 실행해도 된다는 내용이지.”
“예?”
하달받았던 명령을 실행해도 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연호정이 말의 고삐를 틀었다.
히히히히힝!
광룡부의 무게가 워낙 대단해서 그 무게를 버틸 만한 군마가 따로 필요했다. 이번에 연호정이 탄 군마는 군병들이 탄 어떤 군마보다도 굵고 잘 빠진 몸매를 자랑하는 신마(神馬)였다.
“호남을 거쳐 남부로 향하기 전, 들를 데가 있다.”
“들르다니, 어딜 말입니까?”
“묵룡부.”
“……예?!”
연호정이 서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겠군, 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