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유군 출격 (2)
닷새 후.
모용군이 군사부를 찾았다.
“오셨습니까?”
“바쁘시오?”
“괜찮습니다. 하실 말씀 하십시오.”
모용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당신, 정말 괜찮은 거요?”
“무엇이 말입니까?”
“이번 회의에서 선거를 내년으로 미루고 합동 유군을 건의했잖소.”
“그랬지요.”
“연가주와 당가주가, 당신에게 선수를 치라고 시킵디까?”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주도한 것입니다.”
모용군은 의아했다.
본래 봉공회의에서 이 안건을 낼 사람은 자신이었다. 한데 그것을 제갈문호가 먼저 꺼내 들었고, 또한 강력하게 추천했다.
본디 그것을 원하던 모용군과 당원들은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정작 모용군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런 거요?”
“먼저 건의한 것 말입니까?”
“그렇소.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굳이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책임을 떠맡을 필요는 없었소.”
이번 발의안은 여러모로 정치적인 부담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모용군을 경계하는 제갈문호로서는 홀로 그 짐을 떠안을 필요가 없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책임을 떠맡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그 제안에 흥미를 느꼈고, 나아가 이 길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나는 모용가주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모용가주 역시 명백한 봉공의 일원입니다. 만일 이 안건을 모용가주께서 꺼내셨다면, 이 제안의 효용성을 떠나 괜한 싸움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
“이 정도는 군사인 이 사람이 부담해도 되는 문제입니다. 꿍꿍이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용군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갈문호는 공공의 이익과 무림맹을 위해서라면 본인의 인생을 불사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번 건은 지나치게 손해를 보는 일이었다.
‘분명 뭔가가 있을 텐데.’
모용군의 생각을 읽었을까?
제갈문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한 사람의 눈에는 상대가 건네는 술잔이 호의로 보이고, 악한 사람의 눈에는 상대가 건네는 술잔이 독배로 보일 것입니다.”
“…….”
“모용가주께서 놀라셨으리란 건 압니다만, 정말 별다른 의도는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믿어도 되겠소?”
“안 믿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나아가,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실 때가 아닌 줄로 압니다만?”
제갈문호가 문서 한 장을 흔들렸다.
“내일 봉공회의에 건의할 사안입니다. 탕마멸사군을 하나로 만들어 속히 중원에 보내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
“무림맹의 어른으로서, 외세의 적을 끔찍이도 증오하는 호남 모용가의 수장으로서 곧 출정할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물끄러미 제갈문호를 바라보던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봉공회의에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해 드리리다.”
“그러십시오.”
“이왕 온 김에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은밀하게 봉공들을 조사하고 있음을 아는데, 결과는 나왔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만한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무당의 승현진인은 삼교와 손을 잡았을 확률이 지극히 떨어집니다. 물론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말입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봉공 중 저들의 세작이 있을 시 가장 확률이 높은 사람 몇몇은 추려 놨습니다.”
“그게 누구요?”
제갈문호는 말없이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모용군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거야 군사 마음이지만, 적어도 놈들을 증오하는…….”
“그 부분에 관해서 가주를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저 조심스러울 따름이지요.”
“조심스럽다니?”
제갈문호는 또다시 입을 닫고 모용군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괜스레 답답해져 한마디 하려던 모용군은, 일순 드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우리 측 당원이요?”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 중 하나가 그쪽에 있습니다.”
“그게 누구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갈문호는 단호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문제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봉공 중에 세작이 있고, 그 세작이 자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영영 잡을 수 없게 될 겁니다.”
“…….”
“그나마 모용가주시니 그쪽 당원 중 하나라는 말씀이라도 드린 겁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모용가주는 실수할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제갈문호가 한숨 쉬듯 말했다.
“결정적으로, 이것은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입니다. 만에 하나 봉공 중에 세작이 있다면 그쪽일 가능성이 크다, 정도지 무조건 세작으로 의심하는 게 아니에요.”
“…….”
“내부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 부분은 이쪽에 맡기고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그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길입니다.”
“충고, 잘 받았소.”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뭔가를 더 알아보려 하거나 함정을 파는 등의 일은 절대 금물입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만약 가주께서 그런 일을 벌이신다면, 그땐 어떤 죄를 뒤집어씌워서라도 뇌옥에 가둘 것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제갈문호는 진짜로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말에서 풍겨 나오는 무게감과 진실성은 천하의 모용군이라도 가벼이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시오. 세작을 확신하게 되는 순간, 반드시 이 사람에게 알려 주기로.”
“이를 말입니까? 가주께 알려 드리는 건 물론, 이번 일을 아는 모두에게 알릴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겠소.”
모용군이 집무실을 나갔다.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던 제갈문호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이러다 오 년도 안 되어 백발이 되겠군.”
군사는 내정보다 외정에 더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제갈문호는 내, 외정에 있어 구분을 두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일 처리 또한 빠르고 정확하여 무림맹이 지금껏 별 탈 없이 클 수 있게 한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겠다.
한데 이제는 외세의 적은 물론 혹시 모를 세작의 존재, 나아가 봉공 사이의 관계도 만져야 했다. 정말이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제갈문호는 생각에 잠겼다.
‘이로써 내 영향력이 강해짐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모용군의 제안을 선수 쳐서 회의 때 발의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함이었다.
모용군이 발의하면 싸움이 되지만, 군사가 발의하면 진지한 토론이 된다. 그리고 이 제안을 찬성할 사람이 많으니, 결국 맹주 선거는 일 년 뒤로 미뤄질 것이고 두 개의 유군은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
그 큰일을 성사시키면 제갈문호의 영향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봉공들의 시선이 제갈문호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갈문호가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만에 하나 진정 봉공 중에 세작이 있다면, 그들은 나를 가장 주시하게 될 것이다.’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꼭 그래 줘야만 했다.
적들이 제게 집중할 때, 자신의 아군이자 희대의 괴물들이 은밀하게 움직여 적을 격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갈문호가 모용군의 의견을 빼앗아 주도권을 가져온 이유였다.
“……그나저나.”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 그들이 세작일까?”
제갈문호는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당히 조사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싶으면 진즉에 조사를 접었을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봉공들을 조사하다 보니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가 세작일까? 아니면 그중 하나가 세작일까? 만약 그들이 세작이라면, 왜 지금까지 입을 닫고 있었을까? 물론 우리가 봉공들 몰래 움직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조용했는데.’
한참 고민하던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 역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지금은 조사가 먼저야. 이랬으니 저랬을 것이다, 왜 그러지 않았는가 등을 따지는 것은 훗날 고민해도 늦지 않아.’
중요한 것은, 무림맹의 봉공을 세작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만큼 삼교가 위험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제갈문호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강호가 어떻게 돌아가려는가.”
* * *
“끄으응.”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매만지는 연호정을 보며 묵비가 혀를 찼다.
“동네북이 다 됐네요, 정말.”
“시끄러워. 네가 그 무공을 직접 봤어야 해. 진짜 황천길 건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럼 상대를 안 하면 되잖아요.”
“야, 이 멋진 무기들을 봐. 이렇게 큰 선물을 받았으니 보답을 해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웃기시네. 또 혼자 신나서 직접 받아 보겠다고 호기 넘치게 나섰다가 피투성이가 돼서 땅을 기었겠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언변이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군.”
“말 돌리시네.”
“아프다. 적당히 하자.”
“적당히 하고 말고는 내 마음이고요.”
“왜 이렇게 까칠해?”
“내가 뭘요? 난 진짜 까칠하면 말로 안 해요. 활을 들지.”
“세상에…….”
“그러니까 괜히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갑옷 입고 나와요! 유군들 기다리잖아욧!”
묵비의 뾰족한 외침에 연호정이 투덜거렸다.
“이건 뭐 상전이 따로 없구만. 알겠다, 조금만 기다려.”
잠시 후.
멸사군장의 경갑 갑주를 입은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는 달리 동그랗게 만 교룡쇄는 우측 요대에 찼고, 당관에게 선물 받은 흑백쌍룡부는 등허리에 사선으로 맸다.
거기에 광룡부까지 턱 하니 어깨에 메고 나타난 연호정. 실로 오랜만에 군장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그였다.
묵비가 그의 어깨를 치며 재촉했다.
“얼른 가요, 얼른.”
“아, 좀 살살해. 아직 다 낫지도 않았구만. 근데 말은 없냐?”
“뭘 잘했다고 말까지 타고 가요? 뛰어요!”
“쓰벌.”
파아아앙!
두 사람이 멋들어진 신법으로 달려 나갔다.
연호정이 물었다.
“형님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알잖아요? 모용 군장 성격. 휘하 군병들 불만 잠재우려고 군기 확 잡아 놨을 거예요.”
“하긴, 그 양반이 그런 건 잘해.”
“그런데 연 공자.”
“공석이다.”
“우리 출정해요?”
“말 안 듣네, 이거.”
“대답해 봐요. 합군이 되자마자 출정하는 거예요? 맹 곳곳에 그런 소문이 돌더라고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당장은 아니고, 조만간 하겠지. 창설식은 창설식일 뿐이야. 서로 조율할 최소한의 시간은 필요해.”
“어쨌든 가긴 간다는 말이네요.”
“왜? 기대돼?”
“글쎄요?”
묵비가 입맛을 다셨다.
“뭐, 무림맹에 있는 것보다는 강호에 나가는 게 더 재밌긴 하죠.”
“우리가 나가면 필연코 전투가 발생한다. 피와 죽음이 흐를 거야. 벌써부터 그런 걸 좋아해선 안 돼.”
“안 좋아해요. 다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뿐이죠.”
그렇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이내 거대한 연무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오백오십에 달하는 거대한 부대가 도열해 있었다.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묵비가 웃으며 물었다.
“긴장되죠?”
“그러게. 이게 뭐라고 긴장씩이나 되네.”
“쓸데없이 솔직하네.”
“껄껄껄.”
나이 지긋한 노인처럼 괴상하게 웃던 연호정이 자신의 뺨을 툭툭 쳤다.
“자,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