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유군 출격 (1)
“흐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예.”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표정이 많이 달라졌다 싶었다. 내게도 따로 말을 하지 않더니, 너와 그런 대화를 했구나.”
차를 한 모금 마신 강량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리 말하지 마라. 너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오히려 제때 조언을 주지 못한 내 잘못이지.”
“아, 그리 말씀하실 것까지는…….”
“그렇지 않다. 근래 외부 일에만 신경을 쓰느라 내실을 다지지 못했어. 앞으로는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
나직이 한숨을 쉰 연위가 이내 웃으며 강량의 몸을 살폈다.
“그나저나, 그간 열심히 정진했던 모양이다. 뿜어져 나오는 기도가 전처럼 흩어지지 않고 잘 정련되어 있어.”
실제 검력을 보지 않았지만, 드러난 기도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하물며 같은 검사이니 연위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부족함이 많습니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지요.”
“그리 생각하느냐?”
“지금보다 더 어설펐을 때는 뭐가 문제인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다릅니다. 제가 얻은 힘의 부족한 부분이 자꾸만 눈에 걸려, 보완해야 할 점과 나아가야 할 길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습니다.”
한층 어른스러워진 말투였다. 실제로 예전보다 훨씬 진중하고 속이 깊어진 듯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쫓아가고 있구나.’
강량을 보는 연위의 눈빛에 자애로움과 걱정이 깃들었다.
‘진지하게 검도(劍道)를 좇고 있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완성을 위한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어.’
대단하다.
변화한 기도,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고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은 오직 하나의 길을 완성하려는 수행자의 그것과 같았다.
이제 갓 스물이 넘은 청년에게서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지닌 바 실력을 떠나, 이리 속 깊은 무도가(武道家)의 얼굴은 전 중원을 뒤져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연위가 입을 열었다.
“네가 익힌 무공, 귀검(鬼劍)이라 하였지?”
귀신 붙은 검. 제법 살벌한 명칭이었다.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귀왕무(鬼王武)라 합니다. 신공과 검, 보법을 아우르는 무공이며, 하위 단계를 완벽히 연성하면 상위 단계로 오를 수 있습니다.”
귀왕진기(鬼王眞氣)는 한때 흑도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평가를 받은 극상승의 신공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하듯, 귀왕진기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단점은 보완되고 장점은 더 살아났다.
그 결과, 현재의 귀왕진기는 귀철검문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도 무림으로 치면 구파일방 최고의 절학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다.
“전에 네가 나에게 보여 주었던 귀검은 무척이나 살기가 짙고 날카로워 보였지만, 그 안에 숨겨진 비할 데 없는 강격(强擊)을 중심 삼아 적을 분쇄하는 검공(劍功)이었다.”
“맞습니다.”
“한데 지금 네가 보여 주는 기도는 조금 다르구나. 근본인 패도(覇道)는 잠시 미뤄 두고 예기에 더 집중한 것이냐?”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정확히 꿰뚫어 보시는군요.”
“자신의 검, 자신이 익힌 무공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무공이 추구하는 길을 자신의 길과 동일시하여 걷게 마련이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무공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무공이 정한 끝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도 그렇지. 하지만 너는 이미 그것을 넘어섰구나. 귀왕무가 추구하는 끝을 보고 있으면서도, 너 자신은 그 길에서 벗어나 버렸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힘들겠지만, 네 노력이 지금과 같다면 분명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감사합니다.”
“흠.”
턱을 쓰다듬던 연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작전에서 적을 향해 쓴 검격이 있다. 내 딴에는 나름의 비기(秘技)라고 만든 무공인데, 기실 구상한 것은 삼검(三劍)이다.”
“……?”
“그중 일검(一劍)을 창안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위력은 완성되었으나 시전까지 소모되는 시간이 길고 진기 소모 또한 지나치게 커서 문제야.”
“예?”
“한번 보겠느냐? 내가 창안한 검을.”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못 보여 줄 것은 또 무엇이냐. 내 이 검을 아직 지평에게 보여 주지 않은 까닭은, 지평은 아직 자신만의 검도(劍道)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야. 자칫 잘못하다간 이 검력에 사로잡혀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
연위가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한번 보도록 해라. 이 검을 보고, 네가 배울 것이 있다면 마음껏 얻어 가도록 해라. 나아가 내게 부족한 점이 보인다면 기탄없이 말해 주길 바란다.”
* * *
“쿨럭!”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연호정이 한 움큼 피를 토했다. 그야말로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최대한 힘을 빼고 독기를 줄였으며 속도도 늦췄다고는 하나, 그래도 비기는 비기였다. 대부분의 암기를 쳐 냈지만 충격은 계속 누적되었고, 그럴수록 암기에 맞은 상처는 늘어만 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당관이 마지막 종장(終章), 비기 중에서도 최후의 비기는 꺼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절반도 완성하지 못했으니 꺼내 들 만한 상태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고작 이 정도에 그쳤다는 게 대단한 것이다.
당관은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만천공(滿天功)과 화우공(花雨功)은 제각기 삼 장(三章)의 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직 두 무공의 중장까지밖에 구현할 수 없었다. 마지막 종장은 감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훗날 만천과 화우를 하나로 합쳐 자유자재의 암기술을 구사하는 것이 당관의 최종 목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중장까지 연성한 두 무공의 위력이 약하다는 건 아니었다.
‘화우 초장과 중장, 만천 중장을 다 받아 냈다고? 그러고도 고작 저 정도에서 그쳤단 말인가?’
피투성이가 된 연호정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몸서리가 쳐지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하지만 당관은 알 수 있었다. 보이는 것에 비해 연호정은 그리 크게 다치지 않았다. 독기와 침투경 때문에 내상도 제법 크고 외상도 상당했지만, 치료만 받으면 당장 이틀 뒤에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초장이든 중장이든, 이 비기는 구현되는 즉시 부대급을 쓸어 버릴 수 있는 막강한 무공이었다.
그걸, 제아무리 위력과 독력, 속도를 줄였다고 해도 혼자 받아 낸 것이다. 하물며 익숙하지도 않은 쌍부를 들고!
“쿨럭! 카악, 퉤! 어우, 진짜 죽다가 살아났네.”
연호정은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심각한 내외상은 아니지만, 기운이 쪽 빠져 버렸다. 암기의 움직임과 진기의 흐름을 파악하며 도끼를 휘두르느라 심력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철컹.
연호정이 흑백쌍룡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무공이군요. 당금 무림에 받아 낼 만한 사람이 몇 없겠어요.”
“…….”
“위력을 최대한 조절한 것, 맞지요?”
“……그렇다.”
치이이이익!
연가신단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주작화기의 크기를 불렸다.
전신에 침투했던 독기가 빠르게 증발되었다. 가부좌를 틀고 독기를 물리치라 했지만, 그래도 당관이 최대한 독기를 억눌렀기에 집중해서 빼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래도 저리 멀쩡하게 입을 놀리는 건 대단한 일이다. 당관은 감탄하며 말했다.
“철인이 따로 없군. 솔직히, 마지막 화우 중장을 받아 냈을 때 실려 갈 줄 알았다.”
“손속에 사정을 두신 덕분입니다.”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고 해서 아무나 막아 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무공이 아니다. 이건 분명 네가 대단한 것이야.”
흔치 않은 칭찬이었다. 비기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없다면 이런 칭찬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렇다고 치지요. 그나저나…….”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당관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떠냐? 보완할 점이 보였느냐?”
“예, 보였습니다. 보이긴 했는데, 이걸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웃기는 소리. 네가 어떤 말을 하든, 내가 소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내치면 그만이다. 기탄없이 말해 보거라.”
연호정이 주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 때문에 틀어지진 않을까?’
만독제 당관의 무적 비기, 당가 역사상 최강의 무공이라 불리게 될 전설의 비학 만천화우(滿天花雨)는 선대가 틀을 잡고 당관이 뼈를 갈아 넣어 완성한 무공이다.
굳이 자신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당관은 만천화우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이었다. 자신의 섣부른 조언이 훗날 꽃피우게 될 무적의 절기에 해가 되진 않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사소한 말 한마디로도 바뀔 수 있다. 괜히 내 조언으로 무공 연성에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최악의 경우엔 아예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연호정의 얼굴이 흐려졌다.
‘받아 보기 전에 생각했어야 했는데. 참으로 부담스러운 부탁을 받았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미 내가 죽어서 되돌아온 시점부터 역사는 바뀌었어. 명가가 내 손에 무너졌고, 무림맹은 본래 역사보다 일찍 세워졌다. 이미 천하의 흐름이 과거와 달라졌는데, 굳이 이런 부분에서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거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현재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리라.
연호정은 마음을 굳혔다.
“그럼 화우공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화우 초장에서는…….”
그는 자신이 간파한 만천화우의 약점을 가감 없이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며, 당관은 매 순간 크게 놀랐다.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 한들, 이 정도 경지가 되면 각자 깨달은 바가 다를 수밖에 없다. 상대적인 강자라도 약자의 전문 분야에선 빈약한 지식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연호정이 짚은 만천공과 화우공의 허점은, 지금껏 당관이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들이었다. 나아가 부분을 짚으면서도 큰 흐름을 놓치지 않아, 연호정이 얼마나 이 무공에 집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호정의 깨달음은 흑암제의 그것이라, 당관이 놓쳤거나 창의적으로 부족했던 부분을 기가 막힌 통찰력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즉, 제가 말한 초장과 중장의 연계기만 잘 잡아도 종장까지의 흐름이 저절로 열릴 것 같습니다. 물론 그 흐름을 조절할 구결과 법문은 가주님께서 직접 만드셔야겠지요.”
당관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공섭물로 소모되는 진기는 줄이면서…… 난반사를 유도…… 파편끼리의 충격으로 인한 흐름의 다양성이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서서 중얼거리는 당관의 모습은 꽤 신선한 것이었다. 완전히 집중해 버린 듯했다.
연호정은 조심스레 흑백쌍룡을 들고 일어났다. 괜히 당관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을 돌려 연무장을 떠나려 할 때.
“잠깐!”
“잉?”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당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시간이 있느냐? 그렇다면 나와 차 한잔 마시고 가거라.”
“……다친 거 치료해야 하는데요.”
“내가 알아서 치료해 줄 테니까 잔말 말고 따라오너라!”
당관도 결국은 무림인이었다.
결국 연호정은 다음날 새벽이 되도록 당관에게 붙들려 만천화우를 함께 개량하다가 또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당관은 혀를 차며 연호정을 둘러업고 기우희에게 향했다.
“젊은 놈이 이렇게 빌빌거려서야, 원. 나 때는 피를 세 바가지를 쏟고도 사흘 동안 술독에 빠져서…….”